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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生 나의 藝] 9. 만화가 김기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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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4-12-01 20:03] |
만화와 함께 평생을 살아서 그처럼 맑은 눈의 동안(童顔)일까.
만 나이 82살에, 이처럼 말간 ‘도토리’ 같은 풋풋한 미소를 띨 줄 아는 어른이 우리 주위에 또 있을까 싶다. 지난 3월, 증언채록(證言採錄)을 위해 경기 파주시 광탄면의 한 외딴마을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뵀던 원로만화가 김기율(金基律) 선생이 그랬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전경찰국 작전상황실에서 경사로 근무하다가…. 그때가 아마 1954년, 아니 55년인가? 여름이었지…. 그림 솜씨를 좀 뽐내려고 서울신문에다 독자만화를 투고했어요. 아, 그런데 두 갠가 세 갠가를 보냈더니 곧바로 연락이 왔어요. 당시 서울신문 사장도 아마…. 이북 출신이었을 겁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이덕송인가 하는 문화부장이었는데 ‘당장 서울 올라와서 우리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어요…. 허허허.”
김기율 선생이 평생을 보듬어왔던 친구 ‘만화’는 그렇게 인연이 닿았다. 상경한 33살 청년 김기율은 곧바로 서울신문 편집국에 둥지를 틀고 ‘봉이 김선달’이란 만화를 그렸다. 그러다 ‘허풍선’이란 4칸 연재만화를 담당했던 김용환의 후임으로 ‘도토리’의 연재를 시작했다. 1955년 8월17일이었다. 지금의 장·노년층이라면 누구나 “아, 그 ‘도토리군’ 만화!”라며 뚜렷하게 기억해내는 그 만화다. 깡총한 까까머리에 귀여운 얼굴, 장난기와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그 예닐곱 살이나 될까 말까한 소년 캐릭터.
김기율은 함남 북청이 고향이고 그곳에서 자랐다. 스물두어 살에 장가도 들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땐 일곱 살 먹은 큰 딸과 다섯살배기 남자아이 희근(熙根)이, 그리고 막내딸을 두었다. 북청에서는 공산당이 싫어 반공청년단원으로 활동했다. 북한군의 대공세가 시작되기 전날, 김기율은 단신으로 흥남에서 유엔군의 엘에스티(LST)에 몸을 실었다. 1·4후퇴였다.
“엘에스티에서 내린 곳이 거제도였는데, 참…. 고생 많았습니다. 전쟁 중에 부산에서 전투경찰에 지원했지요. 경북 상주에 있던 태백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에 배속돼 등사용지에 철필로 긁어서 기관지나 문서도 등사(謄寫)해서 만들고…. 이러구러 전쟁이 끝나고 나서 서울에서 만화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만화가를 직업으로 선택하고 싶다 해서, 그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일까. 더군다나 서울의 유명 일간지에다 기명(記名)의 연재만화를 싣는다는 것이. 만화가의 일상은 단조롭다. 하얀 원고지에 그림이 들어갈 4칸을 신문사 편집국의 책상 위에다 펼쳐 놓고 그는 날마다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쥐어짜내야 했다. 일곱 살 ‘도토리’의 천진난만함이 그의 정신세계에 온전히 박혀있지 않았더라면, 그 도토리의 동심이 김기율을 연기하는 또 하나의 페르소나(persona)가 아니었다면, 그것이 어디 가능한 일이기나 했을까.
“만화가 생활을 시작할 때…. 그 살벌한 전쟁 후의 서울에서 말이지요,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준 선생님이 한분 계셨어요. ‘고바우영감’을 그렸던 김성환씨(72)지요. 난 서울에 올라와서 월간잡지에 실린 그 사람의 만화를 처음 봤어요. 그 순간에 ‘아, 바로 이거다’하고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그 사람 참 대단합니다. 붓 그림 솜씨도 그렇고, 만화에 등장하는 하찮은 인물 하나도 토종 ‘조선사람’만 그렸어요. 그 당시만 해도, 상당수가 일본만화를 베끼던 그런 시절이었지요. 서울 돈암동인가 어디에 있던 김성환 선생의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인사를 하게 된 겁니다. 이후에 김성환 선생은 나를 데리고 이 잡지사 저 잡지사를 다니며 두루 소개도 시켜주고, 만화 그리는 방법도 자세하게 가르쳐주더군요. 김선생은 입버릇처럼 ‘만화를 그리려면 산수화(山水畵)는 물론이고 옛날 우마차라든가 상여는 물론이고 쇠(牛) 입에 씌운 주둥망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림 속에 살아 숨쉬는 한국의 혼을 강조한 게지요. 나이로 따지자면, 나보다 10살이 아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김성환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내 인생의 동반자인 만화에 철학을 불어넣어 준 소중한 스승이니까요.”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김기율의 ‘도토리’는 60년대의 어린이만화로도 빅 히트를 했다. 대도시의 골목마다 만화방이 빼곡하게 들어섰던 시절이다. 마른버짐과 쇠버짐으로 덕지덕지 했던 ‘도토리 팬’들이 성장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든 주인공세대가 됐다. 어쩌면, 그 코흘리개들 중에는 지금 막 도토리 같고 밤톨 같은 손자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게다.
“만화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것에는 서툴러요. 날마다 하얀 그림 칸의 원고지와 시름해야 되고. 그래서 친구 사귀는 게 어려워요. 만화를 그릴 땐 그저 날마다 술을 마셨지요. 60년, 70년대만 해도 신촌 쪽에 만화출판사가 몰려 있어서 언제나 그쪽 어디서 막걸리를 마셨지요. 5·16이 일어나고서는 만화자율심의회가 구성돼 내가 심의부장을 맡았지요. 초대 위원장은 대구 매일신문 주필 출신의 만화가 김일소씨(1962년 작고)였지요. 참, 그 양반하고도 엄청 마셔댔지요. 껄껄껄.”
상경하기 직전 그는 지금의 부인 김홍옥(金洪玉·72) 여사를 만나 재혼했다. 김여사와는 이미 반세기를 해로한 사이다. 세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은 고학으로 영국 유학까지 마쳤다. 그리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며느리를 맞았다. 지금의 파주집은 몇년 전 아들 셋이 돈을 모아 산 농가주택이다. “번잡한 서울보다 깨끗한 시골공기를 마시는 게 낫습니다”라고 권해서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이제는 집 앞에 펼쳐진 산이며 들이 “그렇게 정겨울 수 없다”고 활짝 웃는다. 반세기 전에, 서울신문에 등장했던 그 ‘도토리’의 말간 웃음이다.
그의 파주집 대문 앞에는 ‘남대천(南大川) 편집실’이란 자그마한 안내판이 붙어있다. 북청 출신 실향민 가족들을 위한 부정기 소식지다. 컴퓨터의 한글 자판으로 소식지를 편집하고 칼럼도 쓰고, 외부인사의 글도 받아서 싣는다. 그는 필자도 아직 해보지 못한 ‘포토샵’ 작업을 척척 해낸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이 왜 생각 안 나겠습니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이 가슴 속에는 피멍으로 남아있지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숱하게 생사를 수소문했지요. 아마도, 지금 살아있지 않은 것 같아요.”
왜 하필이면 만화주인공 이름이 ‘도토리’냐고 물었다. 선생은 또 말간 웃음을 지었다.
“그게…. 북청에 두고 온 둘째 사내애…. 희근이지요. 고 녀석의 귀여운 모습을…. 그대로 만화 그림으로 그린 거랍니다.”
-김기율, 대중만화시대 ‘1세대 작가’-
만화가 김기율은 1950년대 중반부터 ‘도토리’라는 캐릭터로 신문만화를 연재했다. 60년대에는 같은 캐릭터의 어린이 명랑만화를 창작, 10여년간 인기정상의 만화가로 소년소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제강점 시절 경찰이었던 아버지와 평범한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22년 함남 북청에서 출생했다. 일본 만화잡지 ‘쇼넨 구라부(少年俱樂部)’를 탐독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6년제 북청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읍내의 잡화가게에서 점원생활을 시작했다.
1936년에 개원한 북청도립병원에서는 서무직을 맡으면서, 1·4후퇴 직전까지 청진의 일본제철병원에서 책임자급 병원관리직으로 근무했다. 단신으로 월남한 그는 거제도를 거쳐 부산에 정착했다.
피난시절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하다 평생지기 박기당을 만났다. 전투경찰에 지원, 55년 경사로 퇴직하면서 서울에서의 만화가 생활을 시작했다. 61년 어린이만화자율위원회 심의부장을 역임했으며, 70년대 후반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만화창작을 그만두었다.
김기율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 대중만화시대의 1세대 만화작가다. 동시대를 풍미했던 작가군의 대부분이 작고하고 말았다.
한때 인기만화가였으나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며, 만화창작 이외에 잡지·서적의 편집자 일을 병행해왔다. 그는 만화창작 외에도 악기연주(클래식 기타)와 무비카메라 촬영 등에서도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지금은 경기 파주시의 한 한적한 농가주택에서 올해로 결혼 50주년을 맞는 부인과 함께 고즈넉하고도 건강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손상익/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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