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함석헌 사상에서 찾는 평화와 통일

와단 2009. 6. 27. 22:15
 

함석헌 사상에서 찾는

평화통일




김성수함석헌 평전 저자





. 들어가는 말


함석헌(1901-1989)은 20세기 ‘폭력의 세기’를 온몸으로 살다 간 한반도의 평화사상가였다. 그는 태평성대에 태어났으면 조용한 정원사가 되기를 바라던 수줍음을 많이 타던 시골처녀 같은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론 양차세계대전과 대내적으론 한국전쟁 등 국가폭력이 판을 치던 20세기 한반도에서 ‘조용함을 좋아하는’ 평화주의자가 자신의 소박하고 평화스러운 꿈을 키우고 가꾸어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함은 좌우를 넘어서 끊임없이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이념집단과 종교적 배경이 상이한 집단사이에서 평화와 통일의 길을 추구하고자 노력했다.

 “오늘날 세계인은 내나라 민족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역사를 통해서 한 개인의 인격뿐 아니라 민족전체도 민족의식과 민족주의, 민족정신이라는 자의식의 강물을 중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해왔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이타주의에 입각한 세계주의를 향한 큰 바다로 나아감으로서 타민족, 타문화를 포용, 이해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 전 인류는 하나라는 공동체정신과 전체를 품고 있는 보편적 가치와 정신만이 곧 평화를 이루기 위한 씨앗역할을 할 수 있다. 일생을 오직 소외된 자들과 평화를 위하여 저항한 함의 가슴속에는 나와 너 가 따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은 물론 한국인이었고 기독교인이었지만, 함은 어느 특정한 국가나 종교에만 붙잡혀있지 않도록 힘썼고 그 민족과 종교의 경계를 넘고자 힘썼다.


9.11의 굉음과 함께 시작된 21세기 세계는 여전히 화합이나 조화로운 구도보다는 대결적이고 전투적인 분위기로 팽배해있다. 마치 폭발일보 직전의 시한폭탄위에 올려진 무기력한 한 인생의 모습처럼 인류가 당면해 있는 앞길은 전운과 어두운 기운마저 감돌고 있다. 그러나 그림자가 어둡다는 것은 그만큼 태양이 더 밝다는 것을 의미하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겨울이 깊어질수록 따사로운 봄날은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오늘 함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음미해 봄으로서 극단의 세기를 살고 있는 21세기 현대인들이 처한 가치관 혼동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나침반으로 삼았으면 한다.



Ⅱ. 평화


1979년과 1985년 두 번에 걸쳐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퀘이커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함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비폭력을 통한 평화의 길을 추구한 것을 생각하면 결코 뜻밖의 일은 아니다. 함은 민족과 국가 간의 평화는 하느님 즉 역사의 ‘절대적 명령’이라고 믿었다.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의 길이지 계산의 길이 아니다."1)

자신은 기독교사상가였지만 세계의 주요종교가 혼재에 있는 한반도에서 배타적 의미나 독선적 뉘앙스를 풍기는 특정종교의 특정표현보다는 좀 더 보편적이고 포용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 하고자는 의도에서 함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이란 표현을 역사라는 표현으로 대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함의 보편적이고자 하는 노력과 모습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나 극단적 수구세력들의 눈엔 ‘무소속종교인’ 이나 ‘이단자’로 보일 때도 있었다.

함은 불의와 악에 묵묵히 순종하고 저항하지 않는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을 평화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평화와 사회정의의 가치는 둘 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구경의 목적은 세계평화에 있지만 평화는 정의 없이는 실현 되지 않는다. 사람은 근본이 사회적인 존재다.”2) 그래서 평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함은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평안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희생하며 불의와 부정에 저항했다.

함은 만약 자신이 혼미한 20세기의 한반도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저 “조용한 정원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난초 가꾸기를 끔찍이도 좋아한 것을 보면 그리 놀랄만한 술회도 아니다. 고요함과 평화스러움은 그의 삶의 최고의 가치였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이야기 했듯이 “그저 조용히 집에 홀로앉아 화초만 기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3)

그러나 불의와 부조리가 사회전반에 부패한 정치권력을 업고 판칠 때, 그래서 개인이 조용히 평화롭게 일상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소망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을 때, 한 개인은 선택의 여지없이 그 사회의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함이 위대한 “민족의 메시아”라기 보다는 오히려 평범하고 조용한 성격의 아주 양심이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난세에 한반도의 급격한 정치사회적 풍파가 그를, 지금은 표현도 사라진 “재야의 지도자” 이자 “한국의 양심”의 위치로 밀어 버렸던 것이다.


1. 노장사상


함이 본격적으로 평화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이다. 그때 함은 후배 김두혁이 물려준 평양근교의 송산농사학원에서 교육, 농사, 종교를 혼합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고자 일하던 중 후 에 근거가 없는 사건으로 밝혀진 계우회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명으로 일본경찰에 의해 1년간 수감된다. 2남5녀의 가장인 맏아들 함이 속수무책으로 수감된 상태애서 그의 부친은 사망하고 함은 감옥에서 부친의 임종도 지켜 볼 수 없는 동아시아 유교적 국가의 가장으로서는 실로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착잡한 마음을 갖고 감옥에서 함은 ?도덕경?과 ?장자?를 읽으면서 도가(道家)의 평화주의 사상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일본이 조선을 삼키고 미국은 필리핀을 삼키고, 유럽은 아프리카대륙과 동남아 등지에서 군사적 패권경쟁을 일삼는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를 지켜보면서 아마도 도덕경의 아래 구절들이 수감되어 몸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함에게 깊이 다가왔지 않았나 생각 된다: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은 큰 나라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중략‥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손한 태도로 대하면 자연히 작은 나라의 신뢰를 얻어서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겸손으로 대하면 큰 나라의 번영을 얻을 수 있어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중략‥이 두 나라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려면 큰 나라가 먼저 하류에 처해야만 천하의 모든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4)

      

함은 기독교 국가들인 서구열강이 서로 잔혹한 전면전을 치루는 것을 보고 아마도 소위 서구문명의 진보나 이성적 발전이라는 것에 대한 가치체계에 회의를 느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서구문명을 대표한다는「성경」보다는 동아시아 문명의 산물인「도덕경」이나「불경」에 더 관심과 정신적 위로를 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이때 감옥에서의 독서를 통해 기독교나 불교나 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그 근본 에서는 하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5)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함은 이제 인류가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스런 세계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전쟁이 인간의 종자를 아예 지구상에서 멸종해 버릴 것이라고 직감했을 것이다. 산 정상을 올라간 등산객은 비로소 정상에 오르는 길이 한길만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함의 주요종교에 대한 총체적이고 포괄적 인식은 그가 서구기독교와 동아시아의 주요종교를 사상적으로 융합하고 화해시킴으로서 평화로운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근본적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인간의 생명이 벌레처럼 경시되는 잔인한 전쟁을 지켜보면서 함은 평화스러운 세계와 국제관계를 더욱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에 대한 깊은 애착 때문에 함은 감옥에서 노자의 평화사상에 매료되었고 급기야는 노자를 최초의 평화주의자라고 선포했다. “노자는 전쟁의 무익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폭력이 국가정책으로 쓰여서는 안 되고, 국가 간에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 했습니다.”6) 그래서 나와 남을 구별하고 편 가르지 않는 전체의식, ‘우리는 하나다’ 하는 자각이 모든 가치의 근원이 되고 도덕정신을 통해서 인류는 평화운동을 전개 할 수 있다고 함은 역설한다.7)

노자가 살았던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제후국 위정자들은 천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이로 인해 무고한 씨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이런 참혹한 상황 속에서 노자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반전평화사상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노자는 모든 군대와 무기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해치는 좋지 않은 것이므로 되도록 멀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함의 평화사상이 노자를 통해서 더욱 절실하게 무르익어 가던 1940년대 제국주의 열강들이 판치던 한반도와 세계형편이 노자가 살았던 기원 5세기의 중국 춘추전국시대와 너무나 닮은꼴이었고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함은 노장의 평화사상을 절실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와 서구패권주의, 그리고 이승만정권의 권위주의와 나중에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국내외 정세의 외적 혼란 중에서도 함은 더욱더 노장의 평화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국제관계에서 평화의 절실함을 호소했다. 함은 그가 속했던 역사적 시대의 정치적 통제와 사회적 불의 그리고 구조적 악에 대항해 인간의 침해당할 수 없는 존엄성, 자유 그리고 평화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는 진지하게 노자와 장자가 주장한 도덕적 가치들이 보다 나은 인류전체의 향상된 질적인 삶을 위해, 물질과 군사력을 앞세운 제국주의나 물량주의를 맹신하는 자본주의 가치들을 대체할 수 있고, 대체 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국제간의 분쟁을 넘어선 평화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는 이렇게 노장의 평화사상에 흠뻑 빠졌다.      

더욱이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 함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노자?와 ?장자?의 공개강좌를 진행했다. 공개강좌를 통해 함은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더불어 그는 인간의 가치를 “잘살아 보세”나 “부국강병” 보다는 “바르게살기” 나 “같이 살기 운동을 벌이자”고 주장하며 도덕제일주의의 가치를 내세웠다. 그럼으로써 함은 독재 권력과 국가폭력아래서 피폐해가는 씨알의 심성과 사회정치적 상황을 평화와 도덕성을 통해서 개혁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함의 시각에 도덕성을 상실한 종교는 미신이나 광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8)

함은 노장의 다툼을 싫어하는 평화사상이 또한 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 건강한 영적생활과 낙관론을 유지 할 수 있도록 어떠한 공헌을 해 왔는지를 밝혔다: "이 몇 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 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干道)9) 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漠之野)에 심어놓고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10), 이 약육강식과 물량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11)

이렇게 노장의 평화초월사상은 20세기 흑백논리와 국가폭력이 난무하던 한반도에서 함의 평화사상을 공고히 하는데 정신적 안내자, 휴식처가 되었고 그의 영적인 숨통을 후련하게 터놓았던 것이다.


2. 퀘이커리즘


함은 우리나라 기독교 1세대로 어려서부터 서당이 아닌 장로교계통 미션스쿨과 주일학교를 다닐 정도로 특히 개신교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아왔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는 만큼 동시에 이에 대한 그의 직선적 비판도 맹렬했다. 함은 서구기독교가 로마 콘스탄틴 대제 이후 지배 이념화되고 정치 제도권과 결탁함으로써 일반 씨알과 생활을 함께 했던 예수정신의 본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았다.

사전적 분류상으로도 퀘이커리즘은 비국교도12)에 속하는 개신교의 한 종파이다.13) 서구에 기독교가 국교14)가됨으로써 그때부터 영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가 되기 시작했고, 서구제국주의의 침략과 폭력정책을 묵인하는 앞잡이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함은 국법에 의해 공인을 필요로 하는 국가종교는 늙은 종교, 침체된 종교로 믿었다. 함에게 있어서 교회가 세속권력으로부터 공인을 얻어서 국가교회가 되어가는 것은, 교회가 자체의 정신적 통솔력을 잃었다는 증거이고 결국 그것은 세속정치세력의 간섭을 받게 되는 시작이었다.15) 

아마도 그래서 함이 국교가 아닌 비국교, 퀘이커리즘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분명히 국교는 국가 통치이데올로기로서 국가정책과 충돌을 피하고 보조를 맞추거나 타협을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함은 이런 세속권력과 결탁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뜨거운 비판의 고삐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함은 성전을 뒤엎은 예수에게서 사회정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한시대의 예언자이자 사회비판가 이사야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함은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이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국가종교가 되어버린 기존의 기독교엔 거부감을 느꼈다. 반면 국가종교가 아닌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비국교, 퀘이커교에 함이 한없는 친근감을 느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비록 함은 퀘이커리즘의 무조건적 평화주의에 매혹되었지만 그는 절대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때로 자기방어의 윤리를 순진한 절대평화주의 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로 믿었다.16) 평화주의자들도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이 속한 민족이 불의의 세력에 의해 공격받았을 때, 그 가족이나 민족을 방어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함도 사회정의 없이 평화스런 사회는 이룰 수 없다고 믿었기에 유연한 평화주의자였던 것 같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경우도 유사했다. 그가 별다른 대안이 없었을 때 그는 완력을 통해서 고리대금업자들을 성전으로 부터 내 쫒아버렸다. 물론 예수는 폭력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악에 대항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땐 그런 예수조차 완력을 쓰기도 했다.

최초 퀘이커 조지 폭스(1624-1691)가 17세기 영국 장인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하고 근엄한 청교도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의 영적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 것처럼, 함도 20세기 상공업이 발달한 평안도지역에서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장로교인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그는 3·1운동이라는 정치사회변혁을 체험하고 경직된 장로교로부터 영적만족을 못 느끼게 되는 것도 폭스의 영적행로와 유사성이 있다. 고난의 삶을 살다간 조지 폭스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아들 함도 아무런 세속의 매개 없이 절대자와 직접 대면하려던 사람이었다.

함의 사상편력이 개혁성향이 강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17세기 영국교회의 세속적 권위에 대항해 폭스가 주장한 ‘내면의 빛’ 혹은 ‘성령’의 개념이 20세기 국가폭력의 시대를 살면서 노장의 비폭력 평화사상에 심취해있던 함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퀘이커들이 평화적인 ‘내면의 빛’을 교회나 소위 성직자들의 권위보다 중요시한 것을 보고 함은 “약으로 강을 제하는” 노장사상과 유사점을 보았을 것이다. 동시에 함도 폭스처럼 제국주의의 국가종교가 되어버린 기성교회의 절대적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탈권위적 성향의 퀘이커리즘로부터 고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함이 이렇게 평화를 중요시 하는 조지 폭스나 퀘이커리즘를 처음 접한 것은 1919년 3·1운동 후 오산학교에서 면학에 힘쓸 때인 1921년이었다. 그 후 함이 유학차 일본에 있을 때(1923~1928) 그는 처음으로 일본 최초의 퀘이커교도 니토베 이나조(1862~1933)와 함께 일본 퀘이커 모임에 출석했다.17) 그러나 이 때 함은 퀘이커리즘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을 뿐 깊은 흥미는 못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후일 만주사변의 정당성을 서구사회에 옹호하는 니토베의 인격에 별 감동을 못 받아서 일수도 있겠다.

하여간 그 후 함석헌의 퀘이커리즘에 대한 관심은 해방 후인 1947년까지 약 20년 동안 잠복기에 들어갔다. 1947년 함은 김일성과 소련군정의 국가폭력으로부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북한에서 막 탈출한 상태에서 YMCA 총무 현동완으로부터 서구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대해 듣는다. 함은 그 당시 미국퀘이커들의 평화운동을 듣고 놀랐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령을 반대하고 기꺼이 감옥행을 택하고 반면 남아있는 퀘이커교도들은 수감된 사람의 가족을 책임지고 뒤를 돌봐주며 계속해서 평화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비폭력공동체정신 이야기를 듣고 특별히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함은 이렇게 고백하기까지 한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은 온전히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습니다.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18)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함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앞세운 무차별적 전쟁으로부터 세계평화를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지 그 중요성을 실감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에서 맞은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소련군정하에서 겪은 야만적 폭력과 수감생활은 그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깨우쳐 주었다. 더구나 그 후 함은 부모형제가 서로 총을 겨누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절정인 6·25전쟁을 통해 총체적 국가폭력을 체험했다. 전쟁기간 중 하늘을 지붕 삼아 여기저기 피난생활을 하며 그는 온 세계와 민족이 이념을 넘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6·25를 겪은 그는 “이제 일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도 아니요, 민족도 아니요, 계급도 아니다. 세계다”19) 라고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 곧 세계평화주의를 선포하게 된다.

함은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을 20여일 앞둔 7월 4일 부패한 기독교정권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특별히 기독교국가라는 미국이 지원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진리는 더 위대하다”는 「대선언」이란 시를 발표하고 탈기독교주의를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이런 와중에 함석헌이 그 생애에 처음으로 서양 퀘이커들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6·25전쟁 직후 전북 군산에서였다.

1953년 6·25 직후 함은 전북 군산병원(현 원광대병원)에 한국피난민들을 위해 의료봉사단으로 온 영·미 퀘이커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20~30대의 젊은이들로 전후에 과부와 고아가 되어버린 한국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1953년부터 5년 동안 자원봉사를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함은 서구의 젊은 퀘이커들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6·25 직후 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 복구공사를 했는데 거기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에 참 감동했어요. 그들로 인해 나는 퀘이커리즘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20)

함이 퀘이커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가 문헌이나 어떤 사상에 감동해서가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의 직접적 행동 때문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조지 폭스가 주장한 ‘네 삶으로 말하라” 는 퀘이커의 핵심이 그대로 함에게 전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함은 “행함이 불을 지피지 않으면 믿음의 향기는 없다”고 믿기에 비폭력과 평화를 위한 사회참여를 아주 중시한다. 그래서 그런지「대선언」발표 후 ‘조직기피증’이 있었던 함이 1967년 특별히 퀘이커 회원으로 가입한 핵심적인 이유를 퀘이커들의 평화운동에 가담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17세기 영국중부 랭카셔(Lancashire)지방에서 종교개혁의 한 운동으로 태동하게 된 이 퀘이커회는 현재 미국과 영국 등을 중심으로 평화를 중시하는 세계적인 종교기구로 자리매김해 있다. 특히 전쟁 및 핵무기반대,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는 전시 및 전후 구제사업, 교도소 및 정신병원 시설 개선운동, 노예제도 및 사형제도 폐지운동, 여성참정권운동, 인권운동 등을 비폭력과 평화적인 방법으로 활발히 전개하는 단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게 퀘이커회는 내세구원보다 정치사회적 개혁과 세계평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해왔기 때문에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퀘이커들이 삶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신앙형태 중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회참여다. 이들은 전적으로 평화를 옹호하고 그것이 절대자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평화운동을 벌여왔던 것이다.

함은 이렇게 퀘이커들의 평화에 대한 엄격한 실천에 감동받아 퀘이커가 됐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퀘이커의 역사의식, 공동체와 ‘내면의 빛’을 중시하는 전체의식, 평화사상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함은 특별히 퀘이커들의 단체적인 명상을 인류의 새 종교를 위한 한 가능성의 씨앗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퀘이커들의 단체적명상인 침묵예배와 동아시아의 개인적명상인 참선과 어떻게 다른가를 지적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參禪)과는 다르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 한다고 믿는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이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이다.”21)

이런 면에서 함이 퀘이커 역사가 하워드 브린튼의 ?퀘이커 300년?을 읽었을 때 퀘이커들의 전체를 생각하는 공동체의식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별히 브린튼이 퀘이커들의 ‘내면의 빛’이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임을 강조했던 것을 상기하며, 함은 퀘이커리즘이 그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했다. “내가 ?퀘이커 300년?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정신 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22)

동아시아 사회가 역사를 통해 강한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퀘이커리즘과 비교해 함은 동아시아 전통이 전체를 위한 시민의식과 자발정신이 부족하다고 보았고 이것을 동아시아의 결정적인 한계로 보았다. 퀘이커리즘을 통해 함은 전체공동체의식이 없는 한 개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를 깊이 깨달았다. 함이 갖고 있던 전체공동체의식이나 전체론(wholism)은 결국 독단적 통치를 견제하기 위한 씨알의 적극적인 참여정치를 예견했던 것이 아닐까.



3.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동서)의 만남


이 땅에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풍기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입장보다는 종교적 보편주의의 입장에 선 함은 또한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의 평화주의 사이에 동서의 공간과 역사적 시간을 뛰어 넘어 많은 유사성을 느꼈다. 비폭력, 페미니즘, 검소함, 초월주의, 신비주의, 현실개혁적면 등 퀘이커리즘과 노장사상사이에는 여러 가지 비슷한 면이 많이 있는 것만큼, 함은 퀘이커리즘을 ‘새로운 종교’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필자도 영국퀘이커회의회원으로서 퀘이커리즘이 근본적으로 타기독교 종파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본다.

17세기 영국에서 내면의 빛 혹은 성령이 「성경」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종교 및 정치적 집권세력으로부터 퀘이커들은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23) 더욱이 1662년에는 퀘이커법령(The Quaker Act)도 공포되었는데 이 법령은 특별히 퀘이커들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믿음 아래 왕의 면전에서 모자 벗기를 거부하거나 맹세하기를 거부하는24) ‘괘씸죄’에 대해 제도적 박해를 집중적으로 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안이었다.25)

 역성혁명이 성공하여 618년 이연(李淵)이 당나라를 세운 후에는 중국에서 도교26)가 불교를 누르고 국교가 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노장사상은 중국사를 통하여 권력자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아왔다. 반면 비권력층으로부터, 즉 노약자, 빈곤층, 억눌린 사람들, 반란자들 혹은 비밀결사회 등 사회의 기득권층에 의해 탄압 받는 이들에게 노장사상은 정신적 '피난처' 역할을 해주고 저항력을 공급해 주었다.27)

한국역사를 통해서도, 도교는 유교에 의해서 많은 박해를 받아왔다. 전통적으로 유교는 통치이념과 관료, 학자의 종교였던 반면 도교는 상민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으며, 이러한 상민의 종교, 도교는 유교지도층에 의해서 역시 중국경우처럼 이단취급을 받았다.28) 특히 신유교, 성리학, 주자학이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유가에서는 공식적으로 도교를 이교(異敎)로 낙인찍기도 했다.29) 그럼에도, 노장사상은 서민층에게는 민속종교의 형태로 환영받아 왔다.30)

함은 무력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는 국제관계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 해주며 세계를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국가주의로 몰아간다고 지적했다. 현대국가는 본질적으로 강한 군사력 위주의 전투적인 국가이다. 이것은 특별히 오늘날 미국 부시정권의 국제사회를 무시한 독선적이고 오만한 국제정책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 경제적 의미에서 이건 군사적 의미에서 이건 각 국가는 서로 긴장대치 되어있다. 이 긴장대치상황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현대국가는 끊임없이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체계, 군수산업체계를 추구하고 있다.31) 

결과적으로, 강한 국가주의의 사회에서는 전체민족과 국가가 철저하고 강력한 중앙정부의 통제아래 놓이게 된다. 오늘날 미국에서 국가안보라는 미명하에 씨알의 알권리가 무시되고, 언론자유보다 중앙정부의 통제가 국익의 미명으로 우선시 되는 현실의 작태가 그것을 명확히 반증한다. 이래서 강력한 국가주의의 근본은 이타주의라기보다는 강한 집단이기주의와 자국이익중심주의를 그 근본으로 한다.

이런 집단 이기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국가주의에 대해 함은 일찍부터 경고하고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함은 국가주의를 반대했고 국가, 민족, 인종을 초월하려 국가 간 세계평화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로서 공명을 느꼈다. ‘도덕적 인간’이 모여서 사는 사회는 ‘비도덕적 사회’ 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32) 함은 도덕적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도 도덕적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느꼈고,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실마리를 동아시아의 노장사상과 서구의 퀘이커리즘의 평화주의를 통해서 보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역사적 보편주의33)


함은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한평생을 동분서주한 덕에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전두환 독재정권 때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도소문을 들락거려야했다. 그런 그를 보고 “감옥에 가는 것이 일이야” 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주변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였고 ‘민족주의자’였던 함이 어느 때부터인지는 우리에게 덜 민족주의적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함의 탈 민족주의적 변모가 그의 평화사상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함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자아발견은 함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자아발견을 이루면 그 후에는 자아실현을 해야 하는데 그 자아실현의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자아극복 즉 내 고정관념, 내 주관적 고정가치체계를 넘어선 좀 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의 정립이다.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타인도 최소한 나만큼, 때로는 심지어 나보다, 더 소중할 수 있다는 진리다.

각 개인이 나만의 문제만 생각하면, 내 종교, 내 문화, 내 전통, 내 이념, 내 관습, 내 민족, 내 국가만 생각하고 타인의 여러 다른 가치와 생각, 문화를 배척하거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면, 결국 타인과는 싸움이나 전쟁밖에 할 게 없다. 이 처절한 깨달음은 필자가 영국여성과의 국제결혼생활을 통해서 사상이 생활에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수없는 두 ‘문명의 충돌’ 과정을 통해서 몸으로 체험한 것이라 어느 정도 자신 있게 확신 할 수 있다. 결국 두 다른 문명과 문화의 만남에서 필요한 덕목은 대결 보다는 이해, 포용, 합의 즉 사랑이다.

국제결혼의 경험은 없었지만 함도 역시 민족주의(제3세계)와 민족주의(제국주의)가 충돌, 대결해서는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고난 받는 민족이 고난 속에서도 더불어 사는 지혜와 사랑을 배울 때 다른 민족들을 평화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 따라서 민족문제는 세계평화문제다. 함은 가해자인 제국주의 강대국은 민족문제를 풀 수 없다고 본다. 오직 피해자인 고난 받는 민족만이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 주체적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민족문제를 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러 전쟁과 혼란의 와중에서 함은 일찍이 민족문제를 세계평화와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하고 세계가 하나의 공통체임을 확신했다. 함에게는 사람과 사람, 집과 집, 단체와 단체, 나라와 나라, 하늘과 땅 사이를 조화롭게 하는 것이 곧 평화였던 것이다.

세계사상사조와 국제정세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고민한 그였기에, 전반기 생애에 기독교중심주의적 사고체계와 민족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었던 함도, 폭력으로 점철되어진 일제강점기를 거쳐, 양차대전과 6.25전쟁, 기독교편애주의 정책을 편 자유당정권을 겪는 동안 그의 사상은 점점 더 보편적 가치체계를 지닌 사고의 양상을 띄어가게 된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군부가 폭력으로 나라를 탈취한 뒤 자유와 평화를 총칼로 억누르자, 인간존엄성과 기본권을 빼앗긴 씨알과 하나 되어 함이 독재정권에 저항하게 된 밑바탕에는 그의 보편적 가치인 비폭력, 즉 평화사상이 있었다. 전 생애를 국가폭력과 반 평화적 현실에 응전하면서.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노력한 저항하는 평화주의자가 함이었지만 그는 그래서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탈 민족주의자였고 기독교이었지만 기독교의 틀에만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함의 보편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도 일각에서는 대중적 인기에 편승, 영합하려는 ‘포플리즘’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함은 지난 과거의 여러 권위주의 정권아래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비폭력, 평화시위에 앞장섰다. 기독교교리에서 원죄설이나 성악설을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함은 근본적으로 인간본성이 평화적이고 선하다고 믿었고34) 각 인간 속에 하느님의 빛이 있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인간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함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데 끊임없는 원동력이 되었다. 함은 독재자와 권위주의적 정권에 눌려서 신음하며 제소리를 빼앗긴 불쌍한 역사의 주인인 씨알을 사랑의 눈으로 일깨우고자했다. 그래서 그가 1970년 4.19혁명 10주년을 기념하여 창간한 잡지가 월간 「씨알의 소리」이다.

조국과 씨알에 대한 애정과 낙관적 믿음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그를 두려움 없이 외치는 “광야의 소리”로 변화시켰고, 평화를 좋아하는 수줍은 촌색시 같은 그를 시대의 '독설가', '선동자'로 만들었고, 가정적이고 다정한 아버지일 수 있었던 그를 머리 둘 곳이 없는 이산가족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신사적이고 평범한 사람이던 그를 한시대의 '이단자', 저항자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함은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였고 탈 민족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자기가 역사적으로 속한 사회와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현실적 평화주의자로서 온몸으로 그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였다.

함은 가족의 생계와 병든 아내를 돌보아 줄 틈도 없이, 쉬지 않고 민주화의 전선에 앞장선 한편, 장준하가 창간한 잡지사 사상계(思想界)의 요청으로 글을 쓰면서 남한사회에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는 호된 값을 치러야 했다. 함은 계속 권력의 감시, 사찰, 연금, 수감 되었으며 재판정에 서서는 ‘자유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정죄를 당하는 쓴 경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고난에 찬 삶의 여정에서도 그는 일관되게 비폭력평화사상을 계속 주장해왔으며 때로 민주화의 전선에 선 젊은 청년들의 과격성과 상충되어 냉혹한 비난과 냉대를 맛보기도 했지만 비폭력과 평화는 그가 결코 버릴 수 없는 가치였다.

1988년 10월,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에 함은 서울평화올림픽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입원 중인 중환자의 몸으로 88올림픽공원에 세운 세계평화문에 설치한 평화의 불 점화에 나섰다. 함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항상 평화주의를 추구한 것을 고려할 때 그가 평화올림픽위원장으로 선정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서울평화올림픽선언문은 올림픽을 통한 세계평화를 선언했고 함을 포함 600명의 전 세계 주요민간지도자, 세계정치지도자, 세계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함께 이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함의 평화를 위해 일하고자 하던 행동은 “노태우 정권에 이용당하는 노망난 함석헌” 이라든가 “거짓 평화주의자의 속임수에 넘어간” 행위로 조롱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함석헌이 나이 들어 정신이 흐려졌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함은 단호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서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악수도 하지 말란 말이냐” 며 그는 오히려 편 가르기를 옹졸하다며 거부했다. 그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 냉대, 조롱에도 불구하고, 함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절대명령” 이었던 것이다.

이런 함에게 노태우정권보다 더 큰 가치는 대한민국이었고, 대한민국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세계평화였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공산주의국가만 참여한 반쪽올림픽으로 끝났고, 1984년 LA올림픽은 자본주의국가만 참가한 절름발이 올림픽이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이 평화롭게 함께 참여한 문자 그대로 평화올림픽이었다. 서울올림픽에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이 다수 참가하였고, 이 제전은 한국이 사회주의 국가들과 평화스런 관계를 개선해 나가는 데 주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동서 양진영의 국가들이 모두 참가한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과 동구권 나라들은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과 동구권을 포함함 공산국들 대부분이 참가함으로써 동서화합을 이루게 되었다. 특별히 동서진영의 선수와 관람객들은 실로 제 21회 올림픽대회가 1976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스포츠를 통한 화합의 대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88서울평화올림픽의 영향은 세기적인 대변혁을 불러왔다. 냉전으로 한국과 왕래가 없었던 중국과 구소련 등 동구권국가들에게 한국이라는 이미지는 6.25전쟁이었고 한국인은 비참하게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로 새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로 서울시를 내려다 본 소련과 동구권사람들은 눈을 의심했다. 서울밤하늘이 휘황찬란한 각종 네온사인으로 빛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구권사람들이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방문해본 한국선수들의 가정은 그들의 눈으로 볼 때 화려한 아파트, 자동차,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 여러 가지 가전생활제품을 갖추고 있었다. 동구권사람들의 눈에 보인 한국은 6.25의 빈곤보다는 현대적 생활기기 들을 갖추고 마냥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노태우정권은 전시행정은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물론 이것이 서울의 전모는 아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35)

하여간 동구권 사람들은 서울올림픽기간 동안 한국의 자유와 번영, 풍요한 듯해 보이는 모습을 목격하고 자기들의 가난한 조국과 억압일변도의 동구권체제에 회의를 느꼈고 이것이 그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동구권사람들의 생생한 서울방문경험과 목격담이 동구권국가들의 민주화혁명과 몰락을 유발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대체로 국제정치학자들의 공통된 평가다. 하여간 함도 예측하지 못했지만 서울평화올림픽위원장으로서 함은 자신도 모르게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좌우익을 넘어선 세계평화에 일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5. 한국사, 평화의 전형


함은 한국사 자체를 근본에 있어서 평화의 전형으로 보고 있다. 전쟁이나 싸움이 없는 평화스런 전통의 단군신화, 동북아의 평화를 가져온 고구려 온달신화, 아내의 정사를 평화스럽게 대처하는 처용,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 을지문덕의 화해 제스처 등은 함이 한국사 평화전통을 해석 할 때 줄 곳 이야기 하는 부분이다.36)

또한 함이 30대 초반에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37) 에서 그의 평화사상의 면모를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함은 「조선역사」에서 우리민족의 세계사적 비전을 드는데, 그것은 유약하고, 무능하고, 이름 없이 음지에서 고난 받는 민중이 오히려 역사의 담지자로서 평화운동의 주역이 되어 온 세계에 평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신념이다. 1930년대 함은 우리민족이 그 시대의 전 세계 죄악의 짐을, 마치 신약시대의 예수가 인류를 위해서 지었던 것처럼 지고 가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평화의 제물이라고 이야기한다.

함에 의하면 예수가 인류전체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으로써 인류의 메시아가 되었듯이 씨알도 민족과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기꺼이 감으로써 정의와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다. 자발적 고난의 길, 희생의 길을 걷는 씨알의 평화주의는 패배주의가 아니라 인류역사와 우주생명에 대한 낙관적 비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렇게 함에게 한반도는 평화의 제단이고, 전 세계 모든 문제와 고통을 안고 여기까지 온 것이 조선민족이라고 해석함으로써, 1930년대 일본의 제국주의 아래서 패배주의와 열등감에 사로잡힌 조선민족에게 함은 역설적으로 자긍심과 자부심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고난 자체를 살았던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세계사적 사명이며. 세계평화를 위해 자신의 몸을 고난의 재단에 바치고 피를 흘리는 희생적 신앙으로 살라고 함은 역설한다. 수난의 여왕, 거지처녀 그리고 세계사의 하수구로 명명된 거부 할 수 없었던 민족의 고난사 속에서 함은 세계평화를 가져올 사명이 우리 민족에게 있음을 역설한다. 이렇게 함의 역사관이 최종적으로 이른 결론은 “고난을 사랑으로 극복한 평화”이었던 것이다.

 함은 또한 생명과 평화를 연결시키면서 생(生)은 명(命)이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의 길이요 운동이며 그것이 바로 대도(大道)인데 그 대도가 곧 평화의 길이라고 한다. 그는 산다는 것이 곧 하늘의 명령이고 그것이 곧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라고 본다. 이렇게 함에게 있어서 평화는 생과 마찬가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생이 가야만 할 유일한 길이다. 생은 '살아있다'가 아니라 '살아라'는 명령이듯이 함에게 평화는 어떤 사상의 대상이 아니라 행동이므로 이루어나가야 하는 사명인 것이다

함은 정부에 대해서는 작으면 작을수록 좋고 통치는 없어지면 없어지는 것만큼 평화가 온다고 본다. 소국이 더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로 들어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특별히 유럽의 작은 나라일수록 높은 사회 안정성과 삶의 질을 향유하고 있는 면을 강조하며 함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지금은 대국주의가 없어지려는 시대다. 실지로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비교적 실속 있게 행복스럽게 사는 나라는 결코 강대국들이 아니고 모두 자그마한 평화주의의 나라들이다."38) 아울러 함은 소국과민이 다른 나라를 탄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대국주의가 세상을 망쳐 놓는다고 비판한다.39)

6.25전쟁을 일컬어 함은 “전쟁으로 두 동강 난 유일한 나라가 한반도”라고 지적하고, “이 나라 안에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시급한 것이 평화“라고 역설했다. 그럼으로써 민족분단이란 산통을 겪으면서 모두를 해방시키는 진정한 평화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 함의 고백이다. 함은 한국의 분단 상황이 대국, 즉 미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산물이라고 본다. 또한 한국의 분단은 세계적으로 군수산업 자들이 정치인들과 서로 밀약, 흥정해서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한반도의 평화를 파괴한 주범이 지금 6자회담에 열심히 나오고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임을 들고 있다. 그리고 중․미․일․러 를 대국주의라고 보며 이 대국주의가 없어지는 시대가 올 때 세계평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렇게 함의 평화사상이 ‘강대국혐오증’ 내지는 ‘조직기피증’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겪었던 20세기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 곧 폭력, 광기를 바탕으로 한 비이성적인 시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함의 평화사상은 자연히 반정치, 비폭력, 반국가로 이어졌고, 정권에 대하여 회의적인 무정부주의의 성향을 띄는 것이다. 이것은 함이 겪은 정부가 도덕성이 없고 폭력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함의 이런 사상은 근대국가 형성을 폭력의 기원으로 보고 세계화와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는 더 한층 군사화 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국가성립자체를 조직범죄로 평가하고 국가행동양식을 조직범죄에 비교하는 사회학자 찰스 틸리(1929- )의 이론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함이 고난과 통찰을 통해서 느낀 국가에 대한 속성이 학자의 체계적 연구결과와 일치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결론이다.

박정희의 반공과 부국강병 그리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비교해, 함이 주창한 씨알의 주도에 의한 평화사상이나 이타적 도덕주의는 오늘날 냉랭한 현실주의와 실익정책의 구호에 밀려 아주 무력하게까지 보인다. 약육강식, 무전유죄 유전무죄, 적자생존의 논리가 여전히 판을 치는 인간사의 일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박정희가 주장한 단순한 물리적 힘의 가치관이 함의 평화주의가치관보다 좀 더 적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도 하게 된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인간사에는 경제가 정치나 문화보다 우선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우선 먹어야 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또한 떡으로만 살수는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존재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승자, 권력자, 부자의 가치보다 세계는 이제 다른 가치에 귀를 더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40)



Ⅲ. 통일


1947년 2월 26일 함은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며 문간에 기대서 하시는 노모의 음성을 들으며 북한을 탈출했다. 그 후 함은 남한에서 실향민으로 살며죽을 때 까지 사랑하는 어머니와 맏아들, 맏딸을 다시 만나보지 못한다. 20세기 한국현대사 분단의 비극을 개인 가족사를 통해서 처절하게 체험한 것이다. 이런 분단조국의 직접적 희생자 함은 그래서 조국의 평화통일의 꿈을 한순간도 접어 본적이 없다.

이산가족의 당사자인 함은 평화가 전체의식에서 출발되어야 한다고 보며, 그래서 우리는 남남이 아닌 하나라는 자각이 곧 평화의 뿌리라고 본다. 더욱이 남북분단을 한반도평화를 가로막는 원인이며 구체적으로 극복해야 할 당면과제로 보고 있다. 오늘 함이 살아 있다면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소위 ‘퍼주기’ 운동을 지원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이 시대에 달성해야 할 구체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이라고 확신한다.

극단의 시대였던 20세기와는 달리 세계가 좁아지고 있는 21세기는 전 세계적인 전망을 지닌 사상, 타문화를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생각이 하나로 뚫린 보편적인 통일된 사상이 필요한 시대다. 고향이 평안도였고 모친과 자녀를 남겨두고 불가피하게 월남 할 수밖에 없었던 고난에 찬 개인사 때문이었을 수 있지만, 함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해서 항상 마음에 새기고 염원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그의 모든 노력은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통일된 조국에서 자유와 정의를 맘껏 누리는 이상적인 씨알의 모습을 항상 그리워하고 추구하며 살았다고도 볼 수 있다.


1. 함석헌과 조봉암의 평화통일론 그리고 그 결과


함과 조봉암은 6.25전쟁 후 냉전 하 한반도에서 평화통일을 옹호한 1950년대 후반의 대표적 지성인들이었다. 조봉암은 진보적 정치인이었고 함은 종교사상가였다. 둘은 매카시즘이 날뛰는 비슷한 시기에, 그 당시로서는 금기였던 남북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1956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조봉암이 216만 표를 얻자 이승만은 자신의 장기집권체제에 큰 위협을 느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월 13일 진보당사건을 발표, 진보당 간부들을 구속하고 곧이어 정당등록을 취소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정적인 조봉암을 비난하며 “진보당은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국제연합 감시하의 남북한총선거를 주장하였고, 북한간첩들과 접선하여 공작금을 받았으며, 공산당 동조자들을 국회의원에 당선시켜 대한민국을 음해하려고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재판결과 이승만정권이 주장한 대부분의 사실이 허위, 조작되었음이 밝혀졌고 한동안 씨알들은 사법부가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연이어 1958년 7월 선고공판과 1959년 2월 대법원 판결에서 대부분 진보당 간부들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당수 조봉암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조봉암은 변호인단을 통하여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기각되었고,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 무고한 조봉암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것이 명백한 오늘에서조차 그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은 것은 이시대의 수치다.

하여간 ‘조봉암 죽이기’가 한창 진행 중인 1958년, 함은「사상계」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란 글을 발표한다. 이글에서 함은 우리나라의 역사적 숙제를 통일정신, 독립정신, 신앙정신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신라의 통일을 요절이라 보았고 외세의 힘을 빌려서 한 통일을 제대로 이룬 통일이 아니고 오히려 분할이라 지적하고 그때부터 한민족의 비극은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함은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며,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뿐이요,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니? …칼을 가지고는 나라는 못 잡을 것이다.”며 이승만의 북진통일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이 필화사건을 계기로 함은 지금도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20일간 수감되어 곤욕을 치렀다.

동시대 평화통일론에 관련된 이 두 사건을 놓고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왜 조봉암은 사형 당했고 함은 무사했을까? 조봉암과 다르게 함은 정치인이 아니었고 조직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정치적 조직력이 전혀 없었던 함의 이런 무조직 능력이 바로 어떤 권력 하에서도 함의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있었던 요소가 아니었을까? 정치조직이 없는 함을 이승만 정권은 당연히 위협으로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정적이 못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함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권력으로부터의 ‘업신여김’이 권위주의시대에 함의 다양한 활동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비결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결국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평화통일을 옹호하는 한지성인의 생사를 갈라놓는 결정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비정치인에 대한 이승만 혹은 권력집단의 ‘차별’ 덕에 역으로 함은 그 글과 말을 통해서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 시켜 나 갈 수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사이를 보더라도, 좌우익을 막론하고, 김구(1876~1949), 여운형(1886~1947), 장덕수(1895~1947), 송진우(1889~1945) 등 주요한 좌우정치지도자들이 권력집단에 의해 수시로 제거되는데, 함은 이때도 정치인이 아니었고 가지고 있는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권력집단의 살생부에서 빠질 수 있었다. 결국 함이 정치사회문제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사회비평가나 종교사상가가 아닌 정당인이나 정치지도자로 한국현대사에 등장했더라면 그의 목숨을 89세까지 부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70년대 박정희에 의한 김대중 납치사건도 기억한다- 이런 면에서 함은 “약으로 강을 제하는” 노장사상의 원리를 매카시즘이 창궐한 냉전시대 한반도에 적용한 가장 현실적인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을까.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던 고인이 된 정치지도자와 살아있는 사회비평가 혹은 종교사상가 그 두 그룹 중 현실정치사회에 영향을 더 미치는 집단은 누구일까? 정치인 김대중의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이 가능했던 뿌리에는 1989년 김일성과 ‘통일3단계방안원칙’에 합의한 문익환의 공로를 무시 할 수 없다.41) 평화통일에 대한 함의 사상이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고 간 통일운동가 문익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문익환이 함에 관해 손수 짓고 낭송한 아래 시에서 더욱 명료하게 나타난다.


“자주와 통일을 온 몸으로 외치신 당신이

민족주의는 못마땅하셨죠

국가주의는 더욱 질색이었고요

그것은 평화의 적이었으니까요

당신이 자유만큼 사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평화였죠

주의가 싫어 무교회주의마저 떠나신 당신이지만

비폭력 평화는 당신의 신조였죠“42)


정치인이 아니었던 함이 20세기 한반도에 평화통일을 위해 미친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서 혹자는 아주 회의적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함이 비록 지금은 사라진 표현인 “재야의 지도자”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함이 살아서 활동했던 당시 그는 정치인의 범주에 끼지도 못했고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차라리 처절한 ‘실패자’였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의 길을 위해 그가 어떤 의미로든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막대한 영향력을 한국사회에 미쳤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이다.


2. 평화통일의 길


함이 종교사상적으로 사회악이라고 한 것은 몰론 불의한 정치권력의 탄압과 씨알에 대한 부정한 경제적 착취였다. 그래서 정치적 조직이 없는 비정치인 함이 왜 ‘정치적’ 사안 에 대해 관여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렇게 말한다. “왜 정치에 관계된 말을 하나? 강도가 들어왔는데, 그럼 ‘도둑놈이야’ 하고 내쫓을 생각도 안 해야겠습니까? 이런 때, 정치가 온갖 사회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때에 입을 닫고 중립을 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 한패 입니다. 도둑이 왔어도 ‘도둑이야’ 소리 안하는 놈은 도둑의 한패 아닙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정치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감히 못 바라도, 적어도 손에 무기 쥔 정치무리가 판을 치는 날이 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43)

정치라는 구렁이가 씨알의 몸과 숨통을 질식할 정도로 눌러 감고 있던 시절, 비정치인 함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으로 인해 씨알은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정부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 촌색시 같은 함의 지나친 겸손이 정치적으로 그의 영향력을 축소시켰을 수도 있고, 어느 정당과도 철저히 손잡기를 꺼려한 그의 행동은 곧 그가 민족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을 포기한 것 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양심적 종교인 이자 사상가인 예수가 인류에게 보여준 현실적 영향력은 세속의 권력자인 총독 빌라도가 보여준 정치적 영향력보다, 시대를 넘어서 현실에 훨씬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다.

평화를 무엇보다도 중시한 사상가 함은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위한 방안으로 아래 세 가지 길을 제시한다.44)

첫째는 씨알의 자기교육, 즉 타율에 의한 것이 아닌 자율에 의한 ‘스스로 함’을 역설한다. 함이 ‘조직기피증’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회원으로 몸담고 있던 전문목회자가 없는 퀘이커교에게도 이 스스로 함 (Do-It-Yourself)은 아주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다. 그리고 젊은 시절 함이 몸담았던 무교회주의 또한 이 ‘스스로 함’의 원칙을 강조한다. 현 정부가 ‘참여정부’를 강조하는 것도, 또 오늘날 UCC (User Created Content)가 창궐한 것도 또한 이 스스로 함의 원칙이 생활정치와 생활과학기술분야에 널리 퍼진 결과라고 평가한다.

함은 그래서 남북의 평화통일도 남북한 지도자들의 몫이 아니라 남북에 있는 씨알들의 책임이자 몫이고 이러한 씨알들에 의한 새 변혁의 대운동이 즉 참 혁명이라고 본다. 함은 지난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나 부패정치, 경제파탄, 외세압박, 인권부재, 언론탄압 등의 원인이 다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할 씨알들을 권력자들이 죽였기 때문인 것으로 결론짓는다.45) 그래서 함은 남북통일은 호전적인 정권이 할 것이 아니라 남북의 씨알이 직접 해야 하고 또 씨알만이 통일을 구상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한 둘째조건으로 함은 국가관의 혁신을 말하는데 그것은 곧 국가관이 잘못되면 통일이 바로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함은 새 국가관을 세우는 문제가 곧 한국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전체를 위해서 그렇다고 본다. 특별히 요즘과 같이 국익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 되고 있는 국가지상주의, 국가주의 전성시대에 함은 국가도 국익이나 국가이기주의를 앞세우기 보다는, 개인이 이타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처럼, 타국의 이익을 자국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국가 간 이타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 이런 함에게 한반도의 통일방안이 문제 아니라 통일을 통해 새로 세우고자 하는 한반도의 국가가 어떤 국가냐, 즉 평화스런 국가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함이 생각하는 통일이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 세계 평화주의로 가는 길이었다.

셋째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 함은 정신주의를 강조한다. 정신이란 것이 만일 없다면 함은 삶, 죽음, 분열, 통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본다. 정신주의란 곧 물질물량주의나 이윤의 가치를 앞세우는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유물론에 입각하여 사유재산을 국가가 강제로 철폐하는 공산주의도 아니다.46) 함이 그린 정신주의는 아마 제 3의 길로서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는 사회복지에 입각한 북유럽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같은 제도가 아닐까 판단된다.

이렇게 남북의 평화통일문제를 푸는 방법으로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결국면을 넘어서 남북이 평화를 국시로 삼아 화합할 때 비로소 함이 주창한 것처럼 남북은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함을 “민중적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표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47) 1963년 함이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안병무가 직접 운전하던 ‘씨알의 수레(폴크스바겐Volkswagen을 말함)”를 타고 한달 간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나의 생애에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회상한 것도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적절하게 잘 이루어진 이상적인 북유럽사회에 대한 함의 소망이 반영 된 회상이 아닐까.

함은 민족과 씨알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하나, 즉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함은 전체를 자각된 인격들의 통일된 인격으로 보며 이제라도 민족이 다시 통일이 되려면 이념이란 가면을 쓴 집단주의, 이기주의를 물리치고 먼저 남북의 씨알 속에 강한 전체의식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함에게는 전체(whole)만이 거룩(holy)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전체가 하나로 있으면 그것이 깨끗하고 거룩하지만 전체에서 떨어지면 더러운 것48)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거룩한 전체의식을 회복하게 되는 것은 나누어진 남북의 평화통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함은 분열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나 인격통일이 못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듯 통일된 나라를 못 이루면 제대로 된 민족이 아니라고 본다. 아울러 모든 민족 모든 문화가 전체에서 나왔고 전체를 목표로 나아가며 그래서 제국주의나 패권주의가 아닌 평화주의에 입각한 세계통일이 역사발전의 등허리 뼈라고 본다.

그래서 함은 평화가 아닌 폭력이나 전쟁에 의한 통일은 반대한다. 그는 삼국통일이 민족에게 비전이나 꿈을 보여줌이 없이 폭력만으로 이뤄진 일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폭력에 의한 강압적인 통일의 유물로 생긴 남북과 동서간의 지역감정은 지금도 한반도에서 정치와 시민의식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조만간 다시 남북과 동서의 분단을 넘어 평화통일을 이뤄야 할 지금, 우리는 함이 보여준 사회정의를 바탕으로 한 다른 이념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을 넓게 받아들이는 합의의 문화와 포용심이 절실하다.

함이 생각한 남북통일은 어느 한 체제에 의해 다른 체제를 삼켜버리는 흡수통일이 아니었고 우리민족만을 위한 비전을 제시해 주는 어느 민족주의적 통일이 아니었다. 함이 꿈꾼 남북의 평화통일은 차라리 온 인류를 향한 새로운 혁명에 가까웠다. 제1차남북적십자회담의 준비가 진행되던 1971년 함은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자신의 남북통일에 대한 비전을 이렇게 제시한다.


“민족통일은 곧 혁명입니다. 이것은 민족혁명만도 아니요, 그보다도 더 크고 더 깊고 더 새로운 혁명입니다 … 지금 있는 정치기구들은 다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지난 시대의 물건입니다 … 통일은 결코 한 정치 주권 밑에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 한 정권 밑에 강제로 묶는 것을 통일로 아는 그런 따위 역사의 유물은 죽은 시대와 함께 장사하십시오. 우리가 맡은 것은 내적통일, 정치에 상관없이 인정으로 이성으로 뜻으로 하나가 되는 새 나라입니다. 몸만 아니라 사상이 서로 달라도 같이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 정신의 높은 봉에 설 때 마음은 저절로 커져서 옛날의 원수를 무조건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 없이는 앞에 오는 통일 못합니다. 지옥이 한구석에 있는 곳이 하늘나라일 수 없습니다.”49)


종교적으로 함이 자신이 속한 종교인 기독교를 넘어서 자신의 종교를 객관화 하려고 노력한 것처럼50) 정치적으로도 함은 남북이 체제경쟁이나 좌우익 이념논쟁을 넘어서 사상이 서로 달라도 같이 살 수 있는 나라와 정치기구에 상관없이 인정으로 이성으로 뜻으로 하나가 되는 새 나라를 남북통일 방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정신의 높은 봉에 서서 옛날의 원수를 무조건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나라다. 1971년 함이 이념과 정치를 넘어서 보여준 포용주의에 입각한 평화통일의 길에 비추어 보면, 요즘 한 대선후보자가 이번대선을 일컬어 “친북좌파와 보수우파의 대결”이라고 규정한 것을 보면 역사가 냉전이념을 바탕으로 한 대결의 시대로 후퇴해 가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낀다.




IV. 마치는 말 : 인류는 유기체


“앞으로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유기적인 사회, 전체 사회가 돼서 미워도 고와도 한데 살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렇지 못하면 전체가 멸망하게 돼 있다.” -함석헌


함에게 선이란 개체와 전체와의 완전한 통일이다, 즉 그것은 선에는 너나가 없는 유기체라는 말이다. 함이 지적했듯이, 아메바나 짚신벌레 같은 하등생물은 설사 몸통이 잘라지고 분리되더라도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은 몸통이 잘라지면 더 이상 그 생명자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51) 마찬가지로 함은 고등동물인 인간은 기계체(機械體)가 아닌 유기체(有機體)로서 싫건 좋건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함은 "전체의 생각만이 참 생각 곧 진리요, 전체의 행동만이 참 행동 곧 선이요, 전체의 감정만이 참 감정 곧 정의다."52) 라고 믿은 것이다. 북한의 씨알이 굶어죽고 수재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남한의 씨알만이 자본주의의 단맛을 즐기기는 어렵고, 제3세계가 기아와 내전에 시달리는데 제1세계만이 평화와 풍요를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미국의 일방주의는 결국 9.11을 초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이유와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과 그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인류는 어쩔 수 없이 더불어 살고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함은 “파상풍균이 들어간 것은 발가락이지만 죽는 것은 발가락만이 아니요, 전체”53) 임을 역설한다. 이처럼 함은 현대국가를 유기체적인 국가로 보았고, 그러므로 어느 한 개인이나 국가, 심지어 성인조차도 전체로부터 동떨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현대인이 “우리는 하나”라는 보편적 세계관으로 통일되지 않는 한 세계의 통일과 평화는 결코 올 수 없다. 

함은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평생 힘썼으면서도 민족과 국가를 넘어선 세계주의자, 보편주의자로서 세계통일과 인류평화의 꿈을 그렸다. 그는 동서 문명이 통일되어 제3의 새로운 문명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구리와 아연이 합쳐져서 전혀 새로운 제품 황동을 만드는 것처럼, 함은 동서의 장점을 융합해 인류를 위해 보다 한 단계 높은 이념과 이상을 추구했다. 동서의 장점을 합침으로서, 함은 이 융합된 사상과 가치가 인류의 장차올 문명을 위한 어떤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함은 동서양이 다른 것은 서로가 보완, 보충해줌으로서 보다 높은 영적 단계에 인류가 도달하기 위해서라고 믿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두 다리나, 남과여, 혹은 음양의 원리처럼, 서로가 떨어졌고 반대되는 것 이지만, 서로가 협력해서 밀어줌으로서 몸체, 즉 인류전체를 함께 앞으로 밀고 나가는 근원적이고도 역동적인 힘이 된다고 함은 믿었던 것이다.54) 함은 이렇게 오늘세계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인류가 살기 위해서는 새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동서 문명의 통일이 바로 새로운 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함은 한반도에 국한된 남북통일뿐 아니라 전 인류의 평화통일과 화합을 꿈꾼다. 이렇게 함이 평생을 통하여 추구한 남북과 동서의 평화통일 속에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다 들어 있다. 여기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번영과 복지, 이 모든 가치들이 남북과 동서의 평화통일 속에서 결합된다. 함은 역사와 문화의 근본이 하나 됨 즉 통일에 있고, 모든 통일의 근본은 정치보다는 종교 신앙에 있으므로 어떤 문화도 종교로 흥망성쇠가 되었으며, 그러므로 역사적 변동의 원인은 국익을 위주로 하는 정치가 아닌 이타주의를 그 근본으로 하는 포용적 종교에 있다고 본다.55)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았지만, 함은 인간을 “종교적 동물”로 보았다. “종교는 함석헌의 시작과 끝, 함석헌의 전부다”56) 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함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엑스타시(ecstasy 황홀경)를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고, 그 어떤 엑스타시도, 성(性)과 마약을 통한 엑스타시 조차도 종교적 엑스타시만큼 인간이란 존재에게 기쁨과 만족을 채워줄 수 없다고 느꼈다. 이렇게 인간에게 기쁨과 만족을 채워주는 종교의 근본은 결국 사랑(agape), 자비(大慈大悲), 인(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함은 민주주의나 남북의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근본방법으로 마치 친근한 부부관계처럼 무엇보다도 “용서와 사랑”의 가치를 강조한다.57)  

원효, 수운 그리고 함석헌이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남겨준 정신유산은 어느 한 가지 사상이나 철학에 편향되거나 집착하지 않고 사람과 사물을 종합적으로 조명하며 포괄적 이해를 도모한 것이라 생각한다. 편식이 몸의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편향적 사상이나 편견적인 생각은 인간의 건강하고 총체적인 정신발전을 저해한다. 함의 삶과 사상은 민족정신과 세계정신, 동양과 서양,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 세속도시 즉 종교의 세속화58)와 신의 도시 즉 정치의 영화(Spiritualization of Politics)59) 등의 가치를 크게 하나로 통일하는 총체적 종합을 추구하려는데 있었고 이러한 종합적 가치는 곧 한반도의 평화통일뿐 아니라 세계평화를 이루는 필수적 씨앗인 것이다.

함석헌사상에서찾는평화와통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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