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함석헌의 비폭력철학

와단 2009. 7. 4. 09:28
 

함석헌의 비폭력철학


김성수 (「함석헌 평전」저자)

 

노자 : “폭력을 쓰는 이는 화를 당해 괴롭게 죽을 것이다” ??도덕경?? 42장

예수 : “칼을 쓰는 사람은 다 칼로 망한다.” 「마태」 26:52


  함석헌이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존경한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의 비폭력저항 운동 때문이었던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의 사상에 제도를 거부하는 경향과 무정부주의 적인 면이 많았음에도 그가 무정부주의자가 되지 않은 것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폭력이나 테러도 불사하겠다는 과격파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혁명적이었지만 혁명은 안 했다" 라고 함석헌은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그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혁명적 생각을 혁명적 현실로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잘 짜여진 조직력과 명령체계다. 함석헌은 남에게 "이것을 하시오"라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상적 게릴라전"은 벌였지만 체 게바라나 호지민 처럼 "유혈 게릴라전" 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퀘이커 평화사상과 간디 비폭력사상에 매료되었지만 비폭력을 할 용기가 없다면 차라리 칼을 들라고 했다. 그 말은 비폭력이 그저 가만히 있는 비겁자의 길이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는" 그래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는" 길의 의미로 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비폭력을 실천하기 위해선 더 큰 용기가 필요하고 고도의 자기 조절, 억제 능력이 필요하다. 함석헌의 취미중의 하나가 난초 가꾸기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가 비폭력을 그대로 "사는" 난초에 매료되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일제의 한국민족 탄압정책은 점점 가혹해져 갔다. 이때 함석헌은 무력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는 국제관계의 ‘약육강식’ 논리를 정당화 해주며 세계를 국가주의로 몰아간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국가주의의 의미를 정의해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강한 군사력 위주의 전투적인 국가이다. 경제적 의미에서 이건 군사적 의미에서 이건 각 국가는 서로 긴장 대치 되어있다. 이 긴장 대치 상황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현대 국가는 끊임없이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체계를 추구하고 있다.1) 결정적으로, 강한 국가주의의 사회에서는 전체 민족과 국가가 철저한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이런 면에서, 국가주의의 근본은 이타주의라기보다는 강한 집단이기주의를 그 근본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집단이기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국가주의에 대해 함석헌은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국가주의는 또한 그 체제의 유지를 위해 폭력의 사용을 필수적 요소로 하기 대문에, 함석헌의 근본사상인 비폭력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국가주의를 반대했고 노장의 초월주의를 좋아했다. 그는 민족과 국가간의 평화는 하느님과 역사의 ‘절대명령’ 이라고 믿었다: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2)


  이러한 평화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함석헌은 노자의 평화사상에 매료되었고, 급기야는 노자를 최초의 평화주의자라고 선포했다: “노자는 전쟁의 무익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폭력이 국가의 정책으로 쓰여서는 안되고, 국가간에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노자의 평화적인 태도는 ??도덕경??을 통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한 예를 살펴보자:


  “큰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세계를 통일 할 수 있다. 큰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작은 나라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작은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큰 나라의 좋은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큰 나라와 작은 나라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큰 나라가 먼저 겸손해야 한다.3) 최고의 성취는 성취욕구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럼으로써 항상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 최저의 욕구는 성취욕구에 집착 해있는 것 그럼으로써 결코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것.”4)


  함석헌은 서구 기독교나 제국주의에 무조건 대항한 전사(戰士)도 아니었고, 동아시아적인 것 혹은 한국적인 것만을 주장한 광신적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 함석헌은 제국주의국가들과 식민지 국가들 사이의 가치관적 충돌을 사상적으로 해소시키고자 했다. 함석헌이 노장사상에 매료 된 것은 그가 살아야 했던 제국주의 시대 아래서 국가간의 무력주의 만이 횡행하던 세상에서, 동아시아의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사상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동양사상과 서구이념의 융합은 그의 삶의 큰 과제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함석헌은 또한 그가 속했던 역사적 시대의 정치적 통제와 사회적 불의 그리고 구조적인 악에 대항해, 인간의 자유와 평화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는 노자와 장자가 주장한 가치들이 보다 나은 인류전체의 질적인 삶을 위해, 물질주의나 폭력주의를 앞세운 제국주의의 이념이 옹호한 가치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간디는 정치적 문제를 종교적 방법을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함석헌은 이러한 간디의 방법을 또한 한국현실에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함석헌은 간디가 사회의 불의에 대해 비폭력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했기에 그런 간디를 존경했다. 이런 맥락에서 1963년 독일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함석헌은 곧 안병무에게 이런 글을 쓴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운동을 일으켜 민정(民政)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나야 정치가는 아니지만 여론을 일으키도록 하렵니다. 지방순회도 생각하고....1963년 7월 24일”5)


  1970년 함석헌이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을 때나,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위해 활동 할 때,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함석헌은 그를 따르는 씨알들에게 항상 비폭력원칙을 주창했다. 함석헌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을 “사회악과 싸워서 세상을 건질 생각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6) 함석헌은 그의 조국이 사회-정치악에 의해서 전복 당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사회-정치악을 소멸시키려고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기독교관 혹은 종교관을 한국의 극우보수층 기독교인은 “너무 정치적” 이거나 “너무 정치  간섭주의” 신앙관으로 보았다. 반면에, 과격한 재야 측과 소위 운동권에서는 함석헌의 민주화 운동을 위한 비폭력원칙을 “너무 종교적” 이거나 “너무 수동적”인 저항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종류의 폭력사용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올바른 목표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법이었다, 비록 올바른 방법을 통해서 자신이 실패를 하더라도 함석헌에게 실패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의 철학적 뿌리는 힌두교에서 왔다. 반면에 함석헌의 비폭력철학의 근원은 노자의 평화사상, 퀘이커의 평화주의에서 비롯되었다.


  1974년 11월, 함석헌은 윤보선, 김대중과 공동으로 민주회복 국민협의회(민협)를 설립하고 공동의장이 되었다.7) 유신 헌법 선포 후에 야당인 신민당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민협은 사실상 재야에서 집권당인 공화당의 독주에 대항해 야당의 역할을 철저히 수행했다.8) 민협은 또한 도와 시를 포함한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1975년 3월에 이르러 민협은 전국적으로 50 여 개의 지방본부를 두고 있었다.9) 이 민협에선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요지는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모든 법적, 제도적인 조직기구에 대항해 민주시민은 저항해야할 것을 선포했다. 이 헌장은 민주적 저항운동으로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첫째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세력간의 총단결을 주요 골자로 삼았다.10) 이와 같이 함석헌이 평소 믿던 비폭력철학이 준정치단체에의 행동방침에도 적용된 예가 위와 같은 민협의 경우라 할 수 있다.

  1980년대를 통해서, 그의 노익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남한에 자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전국 공개강연, 공중 집회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85년 인천사태 이후 재야는 크게 급진파와 온건파 양극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석헌은 점차로 과격파 반체제 그룹으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어떤 과격파 반체제 그룹에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로서 폭력과 테러를 바탕으로 한 사회혁명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함석헌은 군사정권에 반대해 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활동했지만, 그는 동시에 어떤 종류의 폭력행사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과격파 반체제 그룹과 함석헌과의 갈등은 불가피 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1988년 서울 평화 올림픽 위원장의 자리를 수락하고 평화대회에 참석한 함석헌의 행위는 그와 절친한 안병무로 부터도 "거짓 평화주의자인 노태우 정권에 이용당하는 행동"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평화는 "절대명령" 이었고, 그에게 노태우 정권보다 큰 가치는 대한민국 민족이었고, 대한민국 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세계평화였다. 1980년 모스코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이 절름발이 올림픽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함석헌이 왜 그렇게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평화를 중요시했나 짐작할 만하다.

  함석헌이 소망했던 미래는 도덕적인 사회, 도덕적인 국가관계였다. 그것은 개인간의 이타주의뿐 아니라 단체, 종교집단, 국가간의 이타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제국주의가 판치던 시대에 살았고,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시대 아래서 씨알들은 그들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삶은 억압당했다. 물질주의와 강한 군사력만이 중요시되는 제국주의시대를 살면서 함석헌은 인류문명의 존폐문제를 염려했다. 또한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도 함석헌은 엄중하게 경고를 보냈다:


  “사치스런 삶을 위해서 막대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인류에게 전쟁을 초래 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추구가 모든 것의 동기가 되고, 이윤추구를 위해 기업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보다는 더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값비싼 물건을 생산한다. 많은 경우에, 정치 및 경제적 힘의 추구는 인류에게 전쟁을 초래했다.”11)


  위와 같은 함석헌의 진술은, 왜 그가 자본주의 가치체제에 대해 회의를 품었는지 그 이유를 반영해준다. 그렇다고 함석헌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좌익과 우익 사이 그 어딘가에 있었다. 함석헌은 또한 국가의 정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전쟁과 폭력을 권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국가간의 평화적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질문을 제시했다: “만일 이 국가주의가 그대로 가려면 충돌할 테고 충돌하면 전쟁 날 테고 전쟁한다면 핵무기 밑에서 생명의 종자가 없어질 것이니깐 이걸 건지려면 어떻게 할까?”12) 그는 인류의 새로운 희망은 국가관을 새롭게 가짐으로 써야 가능하다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관의 확립은 과거 인류의 고전철학을 재해석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순수하고 때묻지 않았기 때문이다.13) 타인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고 개인구원이 아닌 전체 구원을 생각한 함석헌은 급기야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의 구원 없이 인류의 구원이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함석헌의 비폭력철학의 뿌리는 모든 생명전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각 사람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씨앗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함석헌이 추구하는 이상형의 사회는 결국 강자와 약자가 서로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사회였다. 그가 초월적인 노장의 평화 사상에 매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활화산을 연상시키지만, 조용히 앉아 화초를 가꾸는 그의 평온한 자태는 우리에게 "수줍은 촌색시"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런 면에서 그는 강약, 냉온이 극명하게 결합된 파라독스의 인물이었다.

  조직과 폭력과의 친밀한 관계를 염두에 두어서인지 그의 사상적 행적은 "조직 기피증" 증세 마저 보였다. 그래서인지 최소의 조직을 가진 무교회주의나 퀘이커리즘에 심취하기도 한다. 불살생을 강조하는 힌두이즘에 그가 심취된 것도 이런 면에서 이해할 만하다. 분명히, 오늘날 인간은 조직이나 제도 없이 살아가기가 아주 어렵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경직된 조직이나 제도는 곧 생기에 찬 삶에 못을 박는 것이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서 언제나 조직된 정치권력은 그와 씨알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제도적인 경직된 종교는 그와 씨알의 자유 분방한 정신 활동에 속박과 억제를 가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조직이나 제도는 작을수록 이상적이라 여겼다.14)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첨예한 조직가라기 보다는 자유 분방한 사상가였다.15) 함석헌은 종교의 조직화된 힘과 제도화된 권위를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서, 조직화된 힘이나 권력은 잠재적인 폭력의 근원이었다. 그는 일제시대를 통해서 뿐 아니라, 북한 소련군정 하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조직화된 힘과 권력이 얼마나 폭력을 남용하는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더구나, 이러한 조직적인 권력의 폭력은 소위 ‘자유 대한’ 에서 조차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등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한국인이 체험한 숨막히고 경직된 정치와 역사적 환경 속에서, 함석헌은 평화적이고 초월적인 노장사상이 그의 건강한 영적 생활을 위해 어떠한 공헌을 해 왔는지를 밝혔다:


  “이 몇 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干道. ??도덕경?? 8장) 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漠之野)에 심어 놓고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장자??, 「逍遙遊」), 이 약육강식과 물량 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16)


  함석헌의 비폭력은 무조건적인 혹은 절대적인 비폭력이 아니었다. 그는 때로 "자기방어"를 위한 완력사용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철저하게 절대자의 힘을 믿었지만 동시에 또한 철저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사람 없이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즉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의 구별을 짓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땅에서 메이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 이라는 예수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한다.

  비록 우리는 오늘도 폭력이 판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함석헌이 추구한 이상적인 세계, 폭력 없는 세계는 인간이 영원히 추구할 가치가 아닐까? 힘이 강하고 우세한 자가 선택을 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힘이 약하고 열등한 자 역시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외모나 두뇌를 선택해서 태어난 인생이 어디 있는가? 그런 면에서 모든 인생,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하고 귀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함석헌은 자신이 인도에 태어났으면 힌두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고려시대 한반도에 태어났으면 불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개신교가 막 소개되는 시기에 평안도에 태어났기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된 것뿐이라고 술회했다. 그 말은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그의 신앙고백이다. 그는 기독교인이면서도 탈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바라보고자 시도했다. 그는 종교간의 질시와 미움 그리고 시기심을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여기서 본질로서의 종교와 현상으로서의 종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본질로서의 종교는 변함이 없고 영원하다. 그러나 현상으로서의 종교는 끊임없이 변해야 하고 항상 재해석 되어야한다. 역사를 통해 현상적인 종교는 기득권을 가진 세력에 의해 변화가 거부 되어왔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폭력이 자행되어 왔다. 물론 함석헌이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해야 된다고 본 종교는 현상으로서의 종교다. 이런 면에서 그는 종교개혁가였다. 그러나 역사의 다른 종교개혁가들처럼 그의 삶은 평탄할 수 없었다.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는 흑백논리가 강요되던 20세기였다. 그는 좌익이냐 우익이냐, 적이냐 동지냐, 기독교인이냐, 비기독교인이냐,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등등의 끊임없는 흑백논리를 강요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21세기는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사람, 다양한 문명과 어울려 살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원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시대다. 나와 입장, 믿음, 문화가 다른 개인 혹은 집단과 싫든 좋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시대가 21세기다. 내가 귀한 만큼 남이 귀하고 내 종교, 내 민족, 내 신념, 내 의견이 소중한 만큼 남의 종교, 남의 민족, 남의 신념, 남의 의견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살았던 함이 추구한 길은 흑백논리를 뛰어넘고 초월한 21세기에 필요한 다원적인 세계였다. 그의 "글쎄요"는 그가 흑도 백도 아닌 모호한 "회색분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세계, 미래의 세계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강을 약으로 제하고 악을 선으로 다스리는 길 그것이 곧 함이 보여 준 비폭력의 길이었다. 그런 그를 나는 불의와 부조리로 점철된 시대를 통쾌하게 관통한 "부드러운 직선"으로 표현하고 싶다.

  한때 무력으로 유럽의 석권을 꿈꾸었던 나폴레옹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폭력으로 하는 일은 결코 위대한 일이 못 된다"는 말을 남겼다. 함석헌은 결코 무력으로서 세계점령을 꿈꾸어 본적이 없지만 "폭력의 허망함"을 일찍이 꿰뚫어 보았다. 인간 속에 내재한 하느님의 모습을 "본" 그였기에 이런 "하느님" 에게 고문이나 폭력이 자행되는 것은 그로서는 결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거부"가 그로 하여금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 시달리는 씨알을 위해 맨몸으로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서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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