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르완다 내전보고서

와단 2009. 7. 17. 13:02

르완다 내전보고서



서론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대륙 아프리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와 에이즈, 내전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하루 먹을 식량이 없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오랜 기간 동안 서구열강들의 식민지배 속에서 짓눌리고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아오며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겪었던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서구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잦은 내전으로 인해 또 다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부족 간의 갈등이 원인인 르완다, 부룬디의 내전을 비롯하여 종교 갈등에 의한 수단 내전, 자원(다이아몬드)의 채굴권을 둘서 싼 시에라리온 내전 등 많은 이유에서 현재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많은 아프리카 내전 중에서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맞먹는 르완다 내전의 대학살이다. 르완다 내전의 주요원인은 오랜 식민지를 겪으면서 반목되기 시작한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이 가장 큰 원인인데 다수 종족인 후투족에 의해 소수족인 투치족과 일부의 온건파 후투족이 1994년 4월부터 7월에 이르는 불과 100일 동안 100만 명이 살육되는 엄청난 인류 재앙의 대학살이 일어났다.

 

하루에 평균 만 명 정도의 생명이 사라진 현장이 바로 이 시대 우리 지구 땅에서 벌어진 것이다. 당시에 살아남은 르완다인 한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친지들이 일주일 사이에 모두 피를 쏟으며 무참히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 안에는 자신의 두 자식과 남편이 포함된 것은 당연했다. 어느 마을은 마을민 모두가 살육 당했으며 그 피의 흐름이 실개천을 이룰 정도라고 했다.

 

당시 죽은 100만 명 중에서 어린이들 만해도 30만이 희생되었고 10만의 어린이들이 고아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 사태는 인간으로서 스스로 인간임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 전 인류적 재앙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상대방에 대한 광기어린 적개심으로 인해 얼마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뇌어 볼 필요가 있으며 어째서 그들이 상대방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유 및 역사적 배경 등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인류 최대의 비극인 르완다 내전을 배경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본론
1)르완다에 대한 간략한 개관

르완다는 적도 바로 남쪽에 위치한 동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이고 수도는 키갈리(Kigali)이다. 또한 아프리카 국가 중에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중의 하나이고 가장 가난한 나라중의 하나이다. 소규모의 공업이 있고 영토에 비해 과중한 인구가 살고 있다. 적도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어 서늘하고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르완다의 지형은 활화산, 강, 계곡, 호수, 평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엔 루안다(Ruanda)라고 불렸으며 현재는 과거 루완다-우룬디(Ruanda-Urundi)라고 불리던 지역의 북부지역에 위치해 있다. 벨기에(Belgium)의 식민지로서 신탁통치를 받았다. 현재의 부룬디는 우룬디(Urundi)라고 불렸고 루완다-우룬디의 남부 지역이었다.

 

1962년 이 두 지역이 독립하여 각각 르완다와 부룬디가 되었다. 르완다는 후투(Hutu)라는 종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투치(Tutsi)라는 소수 종족이 나머지 대부분을 차지한다. 수백년 전에 소수의 투치족이 다수의 후투족을 정치,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1959년 후투족 반군들이 투치족에게 대항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쟁 후에 후투족이 정치, 경제권을 장악하였다.

 

이 두 종족 사이의 또 다른 참혹한 내전은 1994년에 일어났고 이때 투치족이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현재 르완다는 두 가지 커다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첫째는 1994년의 비극적인 대량학살과 내전으로부터 회복하고 화해를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가난을 극복하고 지속적인 개발을 이루는 것이다. 대분분의 모든 르완다의 가정은 1994년 학살에 영향을 받았다.

 

약 100만 명가량이 학살을 당했다고 추산되고 거의 인구의 절반이 난민이 되었다. 나라의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이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1996년 말을 기준으로 100만 가량의 복귀한 난민들 또한 이 나라의 문제이다. 르완다는 아직 내전 이전 수준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인구성장률과 인구밀도는 세계에서 가장 놓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거의 90%이상의 인구가 농사를 통해 생존해 가고 있고 또한 낮은 수준의 위생보건도 이 나라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다. 높은 비율의 말라리아 감염률과 에이즈 감염률을 보이고 있으며 거의 인구의 절반이 문맹이고 중등학교 진학률은 매우 낮다.


 

1. 개요


동 분쟁은 소수파로서 지배층을 형성해 온 투치족과 다수파 피지배계층인 후투족간의 정권 쟁탈을 둘러싼 갈등이다. 양 부족은 외모 및 문화관습상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투치족은 15세기 나일강 유역에서 남하한 호전적인 유목민 출신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온순한 성향을 보유한 후투족을 지배하여 왔다. 양 부족은 외모 및 문화관습에 뚜렷한 차이점으로 갖고 있다.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거쳐 소수 투치족에 의한 다수 후투족의 지배는 고착화되었다. 1962년까지 르완다를 위임통치한 벨기에는 소수부족인 투치족(14%)을 우대하여 지속적으로 지배계급으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고, 다수부족인 후투족(85%)을 통치시켰다. 1962년 7월 독립후(초대 대통령 G. Kayibanda)에도 투치족은 후투족을 강압 통치해 오면서 1963년 12월 후투족에 의해 약 2만명의 투치족이 희생당한 학살사건을 계기로 양대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 되어왔다. 1973년에는 후투족(J. Habyarimana 소장)이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인수, '75년에 <국가발전혁명운동당, MRND>를 설립하여 일당독재 정부를 구축하였다. Habyarimana는 MRND 주도에 의해 '78, '83, '88년에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소수 투치족을 억압해 왔다. '90.6월 하비야리만다 대통령은 다당제 민주주의 실천의도를 선언하였으나, 10월부터 난민화된 투치족은 RPF(르완다 애국전선)을 조직하고, 주변국인 우간다, 탄자니아를 거점으로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에 따라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8월 UN과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중재로 약 2년에 걸친 내전 종식과 과도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양 부족간에 구성된 잠정정부가 성립되었다. 1993년 10월 UN은 동협정의 이행 감시를 위해 2,500명의 평화유지군(UNAMIR)를 파견하였다. 1994년 1월 과도정부의 구성과 관련 아루샤 협정상 총리직에 투치족을 임명하도록 약속하였으나, 후투족 출신의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같은 후투족인 트와기라뭉구를 총리에 선임하자 RPF측은 과도내각 참여를 거부하여 정국의 불안은 지속되었다.


르완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의 하비아리마나 당시 대통령이 암살 당함에 따라 이에 투치족이 개입한 것으로 간주한 대통령 경호원들을 중심으로 한 후투족들(Interahamwe극우 후투군 조직)이 4월 7일 투치족 출신의 총리와 3명의 각료 및 벨기에 평화유지군 11명을 살해하고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시작되었다. 후투족이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한 것에 대해 투치족 반군인 RPF가 후투족 중심의 정부를 공격함으로써 부족항쟁이 일거에 발생되었다. 정부군(후투족)과 반군(투치족)의 갈등이 민간인에 대한 보복 행위로 이어져 대량학살 및 탈출사태가 발생하였다. 1994년 4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의 교전으로 약 2만명이 살해되었다.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2만명의 투치족 반군인(RPF)는 4월 12일 수도 키갈리에 진입하였고, 정부군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남동부의 주요도시 및 국경지역의 투치족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여 약 20만명이 희생되었다. 1994년 4월 30일 UN은 PKO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짐에 따라 270명을 제외한 전 병력을 철수하였고, 투치족 난민 60만명이 정부군의 학살을 피해 부룬디, 우간다, 탄자니아로 탈출하였고, 양 부족간의 보복이 지속되면서 사망자가 약 50만명, 난민 300만명이 인접국에 피신하였다. 동년 5월 17일 UN은 사태의 악화에 따라 UNAMIR을 다시 270명에서 5,500명으로 증원하는 것을 결의하고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PKO의 재편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각국의 호응이 부진함에 따라 6월 22일 2500명을 파견하기로 한 프랑스의 독자 파병을 한시적으로 허용하였다.


내전을 통해 투치족 반군이 수도 키가리를 제압하고, 7월 18일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한 서남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하는 등 승리함에 따라 투치족 난민은 귀환을 개시하였다. 1994년 7월 23일 정권을 잡은 투치족 반군은 르완다 신 정부를 출범시키는 한편 후투족 온건파인 비지뭉구와 트와기라뭉구를 각각 대통령 및 총리에 임명하는 등 부족융화정책을 실시하였다. 투치족 신 정부는 카가메 중장이 부통령과 국방장관으로서 실권을 쥐고 정치적 안정의 유지를 꾀하는 한편, 이웃 자이르 등과 난민문제 협상, 후투족 구정부군의 무장해제 및 난민귀환 등을 협의하였다.


한편 구후투족 정부의 주요 인사 및 구정부군 3만명은 자이르의 고마지역에 피신하여, 1994년 10월에는 고마 난민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11월에는 일본 자위대 수송차량을 공격하였고, 자이르군과 난민간의 충돌로 90명이 사망하는 등 무력충돌을 선동하고 있어 난민촌 내 치안불안을 야기시키고 있다. 1994년 11월에 동 난민촌에는 신디쿠브와브 전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망명정부가 수립되어, 후투족 난민들은 구정부군 출신 게릴라에 편입시키는 등 병력을 보강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후투족 구정부군은 망명지인 자이르에서 다시 르완다로 월경하여 1995년 1월 11일 남서부지역인 냐마새크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재개하였다.


투치족의 승리로 인해 후투족 주민 250만명과 구정부군 3만명이 보복을 우려하여 인근 자이르 동부 및 르완다 남서부의 안전지대로 도피하였다. 후투족 난민들은 자이르,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등으로 분산되어, 1995년 1월 현재 자이르 125만명, 탄자니아 59만 1천명, 부룬디 27만 5천명, 우간다 4천명, 르완다 남서부 안전지대 3만명 등으로 분산되었다. 이들 난민들은 2만5천명 단위로 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어, 기아와 콜레라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자이르 고마 난민촌에서는 1994년 7월 1개월 동안 기아 및 질병으로 120만명 중 43,000명이 사망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UN은 세계보건기구(WHO), 아동기금(UNISEF) 등 11개 UN 산하기구를 통합 조정하는 공동구호대책을 마련, 1994년 7월부터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UN은 난민구호 등을 목적으로 1994년 5월 17일 UNAMIR의 인원을 270명에서 5500명으로 증강하기로 결의하였으나, 각국의 호응이 부진함에 따라 결국 당초의 계획에서 축소된 프랑스군 2,500명, 미군 800명 등 총 3,300명의 병력을 긴급 투입하여 난민의 대량희생을 방지하였다. 한편 유엔은 동 사태의 해결이 끝이 보이지 않고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판단하에 결국 1996년 4월 19일 철수를 개시하여, 2년 반에 걸친 활동은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UN 안보리는 1996년 3월 8일 최후까지 잔류의 UNAMIR 2,000명을 6주간 이내 철수를 결의하여 4월 19일 철수를 완료하였다.


투치족 신 정부는 1994년 7월부터 자이르, 탄자니아, 우간다 등 주변국에 자국 난민의 귀환 협력을 요청하는 한편 후투족에 대해서는 국가 재건에 동참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후투족은 투치족의 보복을 우려 귀국을 회피하고 있어 르완다 난민사태는 장기화되고 있다. 국제사회도 구호식량, 의약품 보급 및 야전병원 설립 등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소말리아 사태에서의 실패 경험 등 직접적인 개입을 회피하면서 당사자간의 자구 노력을 유도하고 아프리카 국가의 참여를 통한 장기적 해결방안을 추구하고 있다. 통상 난민사태의 해결은 종족간 갈등 해소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구호활동도 국민 814만명중 240여만명이 이르는 난민의 재정지원에 한계가 있어 난민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자이르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한 후투족의 구정부 인사들이 병력을 재편성하여 반격을 개시함에 따라 또다시 내전에 휘말릴 경우에는 소말리아 사태와 같은 혼미가 계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불안정한 국내정세에 따라 귀국을 거부한 240만명이 주변국가에서 난민으로 표류하면서 주변국의 분쟁에 휩싸이며 대량으로 학살을 당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르완다 남쪽에 위치한 부룬디에서 1996년 7월 25일 투치족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피난중인 르완다의 후투족 피난민이 7월 31일부터 대량 귀국을 시작하여 8월 10일까지 2만명이 귀국하였고, 8월 19일에 피난민 사살사건이 발생하여, 하루동안 8천명이 귀국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르완다 동쪽에 위치한 탄자니아에 피난중인 르완다 난민 47만 5천명은 1996년 12월 30일까지 귀환을 완료하였으나, 약 65,000명은 산중에 피난중이다.


또한 르완다의 서쪽에 위치한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에는 대규모의 르완다 난민이 도망하였으며, 특히 후투족 출신의 구르완다 정부군은 자이르 반군과 손을 잡고 자이르 내전에 개입하여 사태를 격화시켰다. 한편 자이르 정부는 1996년 2월 10일 자국내의 르완다 난민 캠프 40개(약100만명 수용)의 단계적인 폐쇄 및 송환을 결정하여, 8월 22일 자이르 수상이 르완다를 방문하여, 전원의 귀국(송환)을 합의하였다. 한편 1997년도 중 자이르의 내전 악화로 인해 자이르 거주 르완다 난민이 대거 본국으로 역류하였으나, 이동 도중에 르완다 난민 20만명이 행방불명되는 등 대규모의 인명피해가 지속되었다.


1994년 이후 후투족 강경파 무장세력은 우간다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자이르)에서 게릴라를 형성하여 정부군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을 지속중에 있다. 그러나 1998년 3월 클린턴 미 대통령이 국내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르완다를 공식 방문하여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는 한편 동 분쟁의 확산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특히 클린턴 대통령은 '엔테베 선언'을 통해 1994년 르완다에서 과격파 후투족이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 등 80만명을 무차별 학살하는 사건과 같은 비극을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또한 클린턴은 종족분쟁의 해결을 위한 중재업무를 담당하는 국제협력체의 창설을 제의하고, 민주화의 추진만이 비극을 예방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르완다와 인근 국가들에게 사법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3천만불을 지원할 것임을 밝힌 바 있다.


'97, '98년의 비교적 격렬한 충돌 이후 '99년 들어와서는 12월에 18개월만에 첫 충돌(후투족의 투치 난민켐프 공격으로 30명 이상 사망)이 한번 있었고, 전반적으로 진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2. 의미 및 영향


동 분쟁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아프리카 분쟁에 가장 비극적인 분쟁의 하나로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종족간 대립이 이웃 부룬디와 구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로 파급되어 확대된 분쟁이다.


1990년 이후 1994년까지 약 150만명이 학살되고 국민 814만명중 240여만명 난민이 되어 주변국을 배회하며 분산 수용되고 있다. 르완다 난민의 대량 유입에 의해 주변 부룬디와 자이르의 내전이 악화되면서 해당국가들은 르완다 난민의 축출을 실시하였고, 난민들도 피난국의 내전에 휩쓸려 수십만이 학살되는 등 세계 최악의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다. 난민의 피란 및 이동과정에서 대량 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어 1997년 자이르에서 귀환중이던 르완다 난민 20만명이 행방불명되는 등 최악의 상황에 있었다. 동 분쟁에 대해 국제사회는 대규모의 인명살상과 난민이 발생하자 동 분쟁에 대한 개입을 포기하고 철수한 바 있으며, 또한 동 분쟁은 대규모의 난민을 발생시켜 주변국가들의 안정에 위협 요인이 되었다.



3. 추후 전먕


1999 전망: 1997년 1월 투치족 난민 학살과 관련된 재판 개시되었으며, 이웃 콩고민주공화국(구자이레)의 분쟁이 일단락되어 동 분쟁은 일단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이 르완다를 공식 방문하는 등 미국을 비롯해 대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동 분쟁의 해결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대규모의 학살과 난민 발생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르완다군의 철수 문제를 놓고 1998년 8월부터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콩고군과 르완다군간의 전투가 발발함에 따라 동 분쟁의 추이에 따라 르완다 내분이 악화될 가능성도 존재한다('98년말 작성).



2000 전망: 소규모 산발적 충돌가능성은 있으나, 국제적 협조와 전범재판이 이루어지는 속에서 협상 가능성도 보이고, 정부측도 민주화와 화해정책 등을 추진하고 있어서 2000년 초에는 평화협정 체결, 그 후 민주선거에 의한 화합정부의 탄생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2000.3.1 작성).


 2000년 회고와 전망: 전반적인 동원해제 및 구 정부군의 편입 등 평화정착 조치가 취해지고 있으며, 선거에 의해 투치족 출신의 카가메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안정을 찾고 있다.. 그러나 카가메는 후투족 대통령 하뱌리마나의 죽음(1994/04/05)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투족에 의한 공격 보고는 없으나, 양 종족이 진정한 화해를 할 것인지는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2001년 회고와 전망: 1994년 후투족의 대학살에 관련된 사람들의 재판이 진행중인 가운데,  전임 비지문구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탄압 문제로 국내정치의 불안정 요인이 나타나고 있음. 또한 DR콩고지역에 거점을 둔 구르완다군 및 Interahamwe반군이 2년만에 본격적인 공격을 재개하여 아직 불안정 요인이 남아 있음.  DR콩고가 질서를 회복하기 이전에는 이러한 반군활동을 근절하기 힘들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르완다 정부는 DR콩고의 RCD반군과 연합하여, Interahamwe, Ex-Far(구르완다육군) 을 포함한 친후투반군조직들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벌이고 있음.


4. 주요일지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 르완다와 부룬디로 분리됨. 초대 대통령 G. Kayibanda(소수 투치족) 취임

1963년 후투족의 투치족 대학살(약 2만)을 계기로 알력 심화

1973.7.5, 후투족(J. Habyarimana 소장)이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인수

1975 J. Habyarimana <국가발전혁명운동당, MRND>를 설립, 일당독재 체제 구축

1978, 1983, 1988, Habyarimana가 일당독재하의 대통령 취임

1990.7, Habyarimana, 다당제 민주제 약속

1990.10, 투치족, 우간다 및 탄자니아 거점의 RPF결성후 정부군 공격, 내전 발발

1993년 8월 UN 및 OAU, 탄자니아 등의 중재로 아루샤 평화협정 체결->약 2년간에 걸친 내전종식 일단 합의. 투치, 후투족이 참여하는 잠정정부 설치

10월 UN 안보리 결의 의거, 2519명의 UNAMIR 파견


<1994>


1994년 1월 하비아리마나(후투족), 잠정정부 대통령에 취임. 그러나 평화협정에서 약속된 투치족 대신 후투족을 총리에 임명, 투치족 반발

4월 대통령기 추락으로 인접 부룬디의 은다다예(후투족)와 함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피살, 후투족 정부군과 투치족 반군간 내란 재발

4월 PRF 반군 2만명 수도 키갈리 입성(12일). 후투족 강경파 투치족 80만명 학살, 난민 200만명 발생

5월 UN, 난민보호위한 PKO증파 결의

6월 르완다 정부, 반군 대표와 휴전 합의

6월 교전 재개 (17일)

7.23, 투치족 반군이 전지역을 장악, 투치족 정권 수립, 대통령과 총리에 후투족을 옹립, 부족융화정책 추진. 그러나 국방장관 등 군요직은 투치족이 장악

8월 르완다 주둔 프랑스군(2500명) 철수 (22일)

8월 이후, 후투족 일부는 구 후투족 정부군을 중심으로 반군(Interahamwe)결성, 조직적 대항 개시. 한편 투치족 정부 수립은 그간 인근국가(탄자니아, 자이르 등)로 피난한 난민들(수십~수백만) 대거 귀환 개시 계기.


<1995>


1995년 2월 르완다사태 관련 주변 20여 개국 정상회담 개최(부룬디)

3월 르완다, 우간다 피난 난민 귀국 개시

4월 르완다 정부군/르완다 애국군(RPA)이 투치족 난민촌(남서부 키베호) 습격, 무차별 총기 난사로 8000여명 사망, 650여명 부상

11월 르완다 정부군, 기부호 반정부기지 습격

11월 자이르와 국경지대서 전투

12월 UN 안보리, 르완다 PKO 파견 3개월 연장


<1996>


1996년 1월 르완다, NGO 38단체 국외 퇴거 명령 (5일)

1월 탄자니아군, 부룬디 국경폐쇄. 월경 르완다 난민(후투족) 17,000명 축출 (21일)

1월 캐나다, 르완다파견 UNAMIR의 규모 축소로 임무수행 불가능하다 판단 요원 100명을 2월 2일까지 철수한다고 발표 (22일)

2월 자이르, 국내 르완다 난민 캠프(약 40개, 르완다 후츠족 100만명 수용) 단계적 폐쇄 결정 (10일)

2월 자이르군, 르완다 난민 캠프 폐쇄 개시 (13일)

3월 UN사무총장, 르완다 지원단인 UNAMIR의 계속 주둔과 관련 르완다 정부의 거부로 3월 8일을 기한으로 완전 철수 표명 (1일)

4월 최후 잔류 UNAMIR 2000명 철수

6월 케냐, 재 나이로비 르완다 대사관 폐쇄

7월 부룬디 정부, 자국내 르완다 난민 캠프를 1주일 내 전부 폐쇄, 난민 85,000명 강제 송환 발표

8월 르완다, 부룬디 제재 결정 (9일)

8월 부룬디의 정세 악화로 르완다 난민 2만명 귀국 (9일)

8월 부룬디의 르완다 난민 캠프에서 난민 8000명 탈출 귀국 (19일)

8월 자이르 동부 고마 체류 르완다 난민 100만명 귀국 합의 (22일)

10월 르완다와 부룬디로부터 후투족 난민 총 25만명이 탈출 자이르 동부로 이동 (20일)

10월 부룬디 서북부에서 자이르에서 귀국한 난민 300명 학살 사건 발생 (22일)

10월 르완다-자이르 양국 국경에서 양국 군, 본격적인 전투 개시 (25일)

10월 UN UNHCR 르완다 난민 60만명 표류 발표 (25일)

10월 UN, 르완다와 자이르 분쟁의 수습을 위해 특사 파견 (30일)

10월 자이르, 르완다 부룬디 우간다 3국과 단교 (31일)

11월 UN 안보리, 르완다와 자이르간 즉각 휴전요구 의장성명채택(1일)

11월 르완다군, 자이르 동부 고마 장악 (2일)

11월 르완다 난민, 자이르 난민 캠프에서 40만명 탈출, 서쪽으로 이동 (3일)

11월 자이르의 후투족 난민 20여만명 르완다에 귀환 개시 (15일)

11월 르완다 난민 50만명 자이레에서 귀국 (18일)

12월 르완다로 향하는 귀국 난민, 다시 자이르의 내륙으로 이동 (4일)

12월 자이르 동부 와리카레헬에 르완다 난민 10만명 도착 (6일)

12월 UN, 르완다 난민 귀환계획 실패 발표 (12일)

12월 탄자니아에 피난중인 르완다 난민 약 60만명 귀국 개시 (14일)

12월 르완다 대학살 (1994년 50만명 이상의 투치족 학살당함) 재판 개시 (27일)

12월 탄자니아에서 르완다 난민 47만 5천명 귀환 대체로 완료 (30일)

12월 르완다 귀환 난민 약 100만명중 학살 용의로 5,460명 구속 (31일)


<1997>


1997년 1월 르완다, 키븐고 재판소에서 1994년 50만명 이상의 투치족이 대학살 당한 것과 관련 후투족 피고 2명에 대해 사형 판결

11월 르완다 서북부 기시에에서 후투족 반군이 교도소를 습격, 정부군과 교전 약 300명 사망

<1998>


3월 클린턴 미 대통령 르완다 공식방문.

5.7 아난 UN 사무총장이 주최한 만찬에 동국 대통령과 부통령 불참(아난씨는 국회연설에서 1994년 학살 사건으로 100만명이 사망한 것과 관련 면죄가 필요하다고 언급; 다수파인 후투족과 소수족인 투치(Tutsi)족간 대립.

* Hutu반군은 자신들을 르완다 자유군(Rwandan Liberation Army: RLA) 으로, 그리고 정치당파를 르완다를 해방시키기 위한 인민으로 규정.


6.3 OAU는 르완다 종족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 르완다에 대해 UN 사법재판소는 베닌, 아이보리 코스트, 말리, 토고에서 6명 이상의 혐의자를 체포.

7월 초 반군들은 34명의 민간인을 사살. 미국은 미국이 Habyarimana 전 르완다 대통령의 사망과 관계가 있다는 프랑스 장교의 주장을 부인.

7.14-27 르완다 육군은 290명의 반군을 사살하였다고 발표. 전 Hutu 당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Mathieu Ngiroumpatse는 말리에서 탄자니아로 도피. UN은 르완다 정부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7월 말 까지 UN인권감시단을 철수한다고 발표.

8.4 정부군과 Hutu 반군간 전투 지속, 119명의 시민과 98명의 반군이 사망. 반군지도자(Mugemana) 사망. 구호단체는 70명의 마을 주민들이 행방불명된 것에 대해 르완다 육군을 비난.

8.19 Tutsi족에 의한 정부군과 Hutu반군간 전투 지속, 100명이상의 반군과 36명의 민간인 사망. .

8.23 Hutu 반군에 의한 버스 테러로 7명 사망, 5명 부상. 반군들은 Pierre Buyoya 대통령의 축출기도.

9.4 르완다 국제범죄 법정(UN)은 1994년 발생한 대량 난민 학살 사건의 주모자인 칸반다 당시 수상에 종신형 선고, 동 법정은 1994년 설치 이후 최초의 판결

9.5 Hutu반군은Kivumu형무소를 습격, 3000명의 인종학살 혐의자 탈옥. 탄자니아 Arusha에 설치된 UN재판소는 대량학살범 Jean-Paul Akayesu와 Jean Kambanda에 종신형 선고.

* 2000년 4월 8일 선거 실시 공고.


9월 정부군(Tutsi)과 Hutu반군간에 소규모 충돌 지속, 100여명의 Hutu반군과 36명의 민간인이 사망.

9.5 Hutu반군은 Kivumu 감옥을 습격, 3000명의 인종학살 혐의자 석방. 탄자니아 Arusha의 UN 법정은 Jean-Paul Akayesu를 인종 학살범으로 기소, 전 Jean Kambanda에게 무기징역 선고.


<1999>


1999.1.14. 르완다 정부군과 부룬디 후투 반군 및 콩고민주공화국(DRC)의 카빌라 대통령을 지지하는 Mai Mai 비정규군, Bukavu를 점령하고 있는 DRC 반군에게 대규모 공세. 반군측은 이 공격에서 4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발표.

2.1 OAU는 1994년 인종대학살의 발생 배경에 대한 조사 개시할 것을 결정. 탄자니아에서 실시된 UN 사법재판소는 전 Interahamwe 군 지도자에 대해 15년형 선고. 탄자니아와 르완다는 재판 중지 결정 후 35명의 혐의자 석방.

2.12 르완다 법원은 종족학살과 관련 2명에 사형을, 5명에게는 무기징역을, 그리고 17명에 대해 최저 2년부터 최고 17년간의 징역형을 선고. 전 Hutu족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타국에서 체포됨. 르완다는 70명의 하사관을 전투 훈련을 위해 이스라엘에 파견, 5명은 우간다에서 비행훈련 완료.

3.6 영국의 한 회사가 1994년 인종 대학살 사건 전후로 이스라엘과 자이르를 경우 Hutu 군에 무기공급

3.12 군법 대변인인 카톨릭 성직자들이 레소토방위군의 사령관 축출하고 반정부활동을 선동했다고 발표.

* 아난 UN 사무총장(UNSG)은 1994년에 발생한 집단 인종학살에서 UN이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독자적으로 입증할 것을 요구.

3.23 르완다 법원은 3명의 인종학살 협의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4명에 대해서는 무죄를 확정. UN은 르완다 정부에 인종학살 혐의로 수감중인 125,000명에 대해 석방을 요구.

3.29-31 르완다 정부는 내란 이후 최초로 지방 선거 실시. 인권단체는 1994년 Hutus들은 적어도 50만명을 살해하였고, 당시 반군에서 현재 정부군에 참여하고 있는 일단의 Tutsi 군도 당시 반격 작전에서 잔악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폭로.

* 인권감시단은 1994년에 발생한 인종학살을 중단시키는데 미국이 실패한 것에 대해 미국이 철저하고 투명하게 조사해 줄 것을 요구(UN과 OAU등은 조사중, 프랑스는 자국 무죄 입증).

4.12 스위스는 유럽국가로는 최초로 르완다전 범죄자에 대한 재판 개시.

4.15 르완다 정부는 캐톨릭 Bishop Augustin Misago를 전범자로 체포.

* Fulgence Niyonteze 전 시장은 스위스법정에서 인종학살에 대한 유죄판결에 항의. UN은 전 스위스 PM Ingva Carlsson에 대해 1994년 종족 학살에 대한 UN의 역할에 대해 조사할 것을 약속.

7.10, 르완다와 DRC콩고 간 잼비아의 루사카에서 휴전협정(Lusaka Accord)체결. 국경을 넘나드는 각국의 반군 및 난민과 관련하여 무력사용 억제 등 합의

7.21, 르완다 정부(투치족 정권), 정권창립 5주년 기념식에서 자유 민주총선을 위한 헌법을 마련할 계획이며, 국방장관은 북서부 지역의 후투반군의 일망타진이 최우선 과업임을 발표

7.22, 르완단 정부, '99.1월 이후 짐바브웨가 구 후투족 정부군 중심의 반군에 군사훈련 및 기지제공하고 있다고 비판

11.29, 탄자니아 소재 국제사법재판소, '94년 학살사건 관련 핵심 연루자를 무혐의로 석방, 르완다 정부는 비난

12.5, 정부군과 후투반군간의 평화협상 문제 논의 중. 2000.2월 경 실제 협상 개시 전망

12.16, 유엔, '94년의 대학살 방지 실패와 관련 비밀보고서 공개, 동 보고서에서, 유엔관리들이 학살 가능성을 보고해 온 것은 사실이나, 당시 유엔인력은 외교관 중심이었고 군인이 아니였기 때문에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음을 인정

12.24, 르완다 정부(투치족 중심, 온건 후투족 참여), 후투족 게릴라들이 르완다 북서부의 투치난민 캠프를 공격, 30명 이상 사살 발표. 정부는 이 공격은 후투 극렬분자들에 의한 18개월만의 첫 공격이라고  설명.


<2000>


01/02, 르완다 정부, 1차 및 2차의 동원해제(군인 8,600명, 소년병 2,500 계 11,000명)에 이어 내년에는 3차로 11,400명을 해제할 것이라고 발표

2.29, 르완다 총리 Rwigema, 국회조사에서 횡령혐의로 확인, 사직

03/20  르완다 정부는 신 정부의 구성을 발표. 비지문구 대통령은 후투족이지만, 투치족이 이끄는 르완다 애국전선이  정부의 주요 직위를 차지할 것이며, 카가메 부통령이 르완다의 실질적인 권력자임. 후투족이 이끄는 MDR은 18개의 장관직 중에서 2개를 차지할 것이며, RFP가 적어도 10개를 차지할 것임.

03/23  르완다 비지문구가 사임. 현재 르완다의 실력자인 부통령 카가메(국방장관 겸임)가 임시 대통령의 직위를 맡을 것임. 카가메는 종족적으로 우간다에서 태어난 투치족임. 그는 무세베니의 국민저항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무세베니가 우간다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우간다 군사정보국의 책임자로 일하였음.

03/27  유엔 대변인은 르완다의 카가메가 후투족 대통령 하뱌리마나의 죽음(1994/04/05)에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보고서가 1995년부터 떠돌고 있다고 밝힘. 하뱌리마나 대통령의 죽음은 약 50만 내지 80만명의 투치족 학살의 촉진제가 되었다.

3/28  하뱌리마나 암살에 카가메가 관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유엔 보고서(메모)가 더 발견됨. 유엔 대변인은 이 메모가 비공식적인 것이라고 밝임. 이 메모는 르완다 전쟁범죄 조사팀의 일원이었던 호리건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유엔이 밝힘. 메모에 따르면, 엘리트 타격팀이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음.

04/01  카가메가 르완다 대통령에 입후보 할 것임을 밝힘. 상대후보는 RUF 동료인 무리간데이므로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음.

04/22  카가메가 대통령에 취임. 42세. 카가메는 후투족에 의한 1994년 르완다 투치족에 대한 학살 이후, 투치반군의 지도자로서 우간다로부터 침입함.  보도에 따르면 카가메는 르완다 기타마라에서 1957에서 출생하였으며, 34년간 우간다에서 망명생활을 하였음.

05/04  카가메 대통령은 前정부군 소속 1만5천명의 병사가 새 르완다 육군(및 콩고에 있는 르완다 부대)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고 발표. 

05/06  르완다 정부는 약 50만명(전국민의 6%)이 HIV 양성임을 발표.

08/08  르완드 정부는 DR콩코에 전개된 1만명의 병력중 1천명을 철수시켰다고 발표.

08/18  르완다는 10월과 11월에 지방선거를 실시할 예정.

08/31  케냐와 르완다는 케냐군이 르완다군의 훈련을 담당하는 협정을 체결.

10/25  케냐는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장교와 하사관으로 구성된 위원단을 르완다에 파견하는데 동의.

11/03  르완다는 많은 양의 집단학살 관련 재판에 직면해 있음. 서방소식통과 유엔 조사단들은 11만2천건의 학살사건과 관련된, 11만9천명을 수감하고 있음. 유엔 인권 고문들은 르완다 정부가 이러한 재판의 지체를 막기 위해, 가카카라는 전통적인 사법제도를 적용할 것을 고려 중에 있음. 가카카는 자치지역에 기반을 둔 제도로, 10명이 재판관의 역할을 함. 가카카는 재판제도는 다루지 않으나, 절도,고문사건은 다룰 수 있음. 가카카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경우, 항고할 수 있도록 하게 할 방침.


<2001>


01/18  카가메, 국회개원 연설에서 인플레이션 억제 등 그간의 업적을 소개.

01/20  르완다는 콩고정부가 Pweto의 Katanga 지역에 대해 로켓공격을 했다고 비난.

01/30  카가메, 방미

02/23  후투계 야당 MDR(Mouvement democratique republicain)이 당수 Celestin Kabanda를 탄핵

03/20  250명의 DR콩코파견 르완다군이 Kataga지역 Manono기지에서 철수

04/16  부룬디의 부요야와 부룬디 내전의 평화적 해결 방안을 논의.

05/21  르완다 육군은 DR콩고 지역의 반군들이 Ruhengeri지역의 Nyamutera에서 침투작전을 전개(Karisimbi 화산지역을 침투로로 사용) 했다고 발표. 약 72명이 침투, 35명을 사살, 22명을 생포. 이것은 1999년 후반 이후 약 2년만의 후투반군의 공격임. 반군은 콩고의 Misisi, Tutshuru 지역에 기지를 두고 있음. 72명은 후투반군 Interahamwe의 선봉대로 알려졌으며, 이들은 대규모 침투를 위한 기지, 식량확보를 위해 투입된 것으로 보임. 르완다군은 추격작전을 전개 중.

05/13  정부는 전임 대통령 비지문구의 정당 창설 움직임이 사회불안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비난.

06/01  비지문구 가택 연금에서 해제.

06/05  미국에 근거지를 둔 르완다 반정부조직 ARENA {Rwandan Alliance for the Renaissance of the Nation) 는 비지문구 전임 대통령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도록 촉구

06/07  르완다 북서지역에서 반군과의 교전 발생. 반군은 DR콩고에 근거지를 둔 후투족 Interahamwe 민병대와 ex-FAR (구 르완다 육군)으로 보이며, 약300-400명 규모. 동 전투에서 150명 사망, 32명을 생포한 것으로 알려짐.(IRIN)

06/15  Interahamwe 반군은 자신들이 우간다로 지원을 받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

06/17  르완다 육군은 Ruhengeri,지역에서 후투반군 80명을 사살했다고 발표.

06/18  우간다 정부군(UPDF : The Uganda People's Defence Forces)와 르완다 정부군(RPA: the Rwandan Patriotic Army)은 DR콩고에 기지를 둔, Interahamwe 민병대 소탕을 위해 공동작전을 재개하기로 합의.

06/20  르완다 육군은 5월 중순이후 Interahamwe 후투반군 1,036명을 사살하고 431명을 생포했다고 발표. 이 전투에서 민병대 Limpopo Brigade의 지휘관 Evarist Bazirambwabo도 사망했다고 발표

07/06  부룬디 정부는 적어도 100명 정도의 후투반군이  르완다로부터 부룬디로 침투하였다고 발표.

07/06  07/04에 DR콩고의 카빌라와 무세베니가 콩고내전 종식을 위해 회담한 이후,  카가메는 무세베니와 만나, 양국관계 개선에 합의. 카가메는 우간다 육군을 이탈한 반정부인사들이 르완다 내에 머무르는 것은 허용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불허한다는 방침을 밝힘. 르완다내의 우간다 반정부인사들은 反무세베니전선을 형성할 것을 계획하고 있음.

07/13  르완다군은 Ruhengeri지역에서 후투반군의 정보장교를 비롯하여 3명의 장교를 생포.

07/13  비지문구는 카가메에게 자신이 정당을 창설할 수 있도록 금지조치를 해제할 것을 요청.

07/15  르완다군은 북서지역 Mukingo市에서 Interahamwe 지휘관 Bemera을 생포했다고 발표.

07/20  르완다 정부는 콩고에 있는 반군들에게 귀환하도록 촉구.

08/26  약500명의 르완다 후투반군이 DR콩고로부터 부룬디로 이동했다고 함.

10/03  르완다가 지원하는 콩고반군 RCD가 르완다 및 부룬디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Fizi市를 공격 09/25-09/30간 전투가 지속됨. Fizi市는 탕가니카호 북서지역의 전략도시로, 09/07 부룬디 정부군이 철수하면서 RCD가 점령. Fizi市는 르완다, 부룬디 반군이 탕가니카호를 통해(콩고정부가 제공하는 고속정을 이용하여) 자국에 침투하는 요충지. RCD-Goma의 지도자 오누숨바는 DR콩고 정부군이 르완다, 부룬디 반군의 군수지원과 작전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 르완다의 Kabarebe장군은 Fizi를 점령한 부대는 탕가니카호의 남서항구 Muliro에서 왔으며, Fizi 인근에는 르완다로 침공하는 후투반군 약 4만명의 일부가 있다고 추정. 9월중순부터 르완다 정부군과 RCD-Goma반군은  콩고동부의 탕가니카호의 Ubwari반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계획해 왔음. 목적은 부룬디의 FDD(친후투), FNL(친후투), DR콩고의 Mai-Mai(DR콩고 친정부민병대), 르완다의 Ex-Far(구 르완다육군), Interahamwe(후투민병)을 소탕하기 위한 것임.

르완다 내전보고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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