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에겐 꿈이있다. [은광]지 여름호 2003년 7월

와단 2010. 2. 9. 14:07

나에겐 꿈이있다. [은광]지 여름호

 

 

와단

2003/07/22

187

“나에겐 꿈이 있다”

1979년 신진공고 자동차 과 야간을 졸업함과 동시에 나는 한국철도 대에 입학했다. 철도 대는 국립으로 그 당시 학비가 고등학교보다도 저렴했다. 나는 학비가 저렴하고 취업이 보장된 철도 대에 입학하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철도 대 생활을 열심히 했다. 학교 공부 외에도 학과 과대표를 지내며 열렬히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고자 노력했다.

철도대를 한참 다니던 1979년 10.26직후, 우연히 은광교회에서 김동길 선생님의 설교를 들었다. 나는 그 당시 어수선한 시국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둔감한 청년에 불과했다. 이런 철없는 청년에게 김동길 선생님의 해학과 기지를 섞어서 하는 설교는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나는 이때 비로소 평생을 두고 미칠 대상을 찾았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나는 벅차 오르는 감격 때문에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그 후 나는 김동길 선생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그의 강연을 미친 듯이 따라 다녔다. 이렇게 김동길 선생님의 강연과 책을 접하던 중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함석헌’ 이란 친숙치 않은 이름을 들었다. 그 후 멀지 않아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이때 나는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주체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나는 잡을 자도, 밥을 먹어도, 길을 걸어도, 친구를 만나도 언제 어디서나 이 두 분을 생각했다. 두 분은 내게 이상적인 종교인, 사회인, 그리고 역사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80년대 초반의 어수선한 시국을 놓고 두 분은 종교인의 사회참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지 삶으로 보여 주셨다. 두 분의 말과 글을 접하며 나는 비로소 자아의식이 눈뜨기 시작했다.

1981년 나는 철도대를 졸업함과 동시에 철도청에 취업했고 몇 달 후에 공군에 입대했다. 김동길 선생님이 연희전문 영문과 출신인 것을 염두에 두고 선생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공군에 있는 동안 방송통신대 영어과 1학년에 입학했다. 그 후 정기 휴가 때 마다 인하대, 동국대등에서 영문학 출석수업 강의를 들었다. 공군에 있는 동안 또한 매주 일요일 이화여대교회에서 김동길, 김흥호 선생님이 인도하시는 성경, 역사, 주역, 동양철학 강좌와 연세대학교회에 참석했다.

1984년 내가 제대하던 해 김동길 선생님께서는 10년간의 해직교수 생활을 마치시고 연세대학에 복권 되셨다. 나는 철도청에 군 제대 후 복직했다. 경의선, 경원선, 경부선, 경춘선, 장항선 열차를 주야로 승무 하며 틈틈이 방송대 영어과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퇴근 후 매주, 월수금요일엔 연세대학교로 가서 김동길 선생님의 서양문화사, 미국사, 전체주의 제국주의 강의를 도강했다. 매주 화목일요일엔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장자, 퀘이커리즘, 성경의 강연을 들었다. 두 분의 말씀은 아주 재미있었고,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주었다.

1989년 2월4일 새벽에 함석헌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날 나는 아침공기를 가르고 바로 서울 대학병원으로 갔다. 새벽에 벌써 고인이 되어버린, 한국 현대사의 별, 함석헌 선생님께 예의를 표하고 내 마음은 엎치락 뒤치락 너무 뒤숭숭했다. 그 날 나는 8년간 일하던 철도청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렇게 뇌까렸다: “앞으로 10년 안에 함석헌 선생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겠다.”

1년 여의 노력 끝에 1990년 4월 나는 영국 퀘이커 연구소인 우드브룩 칼리지에서 1년간 장학금 제의를 받고 나이 30에 “맨발의 청춘”으로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가기 전날 김동길 선생님께서 따듯한 점심에 좋은 가죽지갑에 100달러 미화를 선물로 주시며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우드부룩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중, 그 해 9월 나는 김동길 선생님의 추천서와 더불어 영국 에섹스 대학교 역사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그때 우연히 만난 두 영국 여성이 내게 평생은인이 되기 시작했다. 한분 은 캠브리지 대학 출신인 잉글 로렌스 의사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역시 캠브리지 대학 불문학 교수인 안띠아 리 였다.

안띠아 교수님은 보기 드문 미인 이었고 불어는 물론 독어도 유창하셨다. 안띠아의 도움으로 나는 영국 호크릴 교육재단으로부터 4천만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여름 방학 중 미국방문을 할 때 잉글 박사님의 추천으로 영국 퀘이커회로부터 항공료와 여비 장학금을 받았다. 에섹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 대학원 역사학과에 입학 했으나 역시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그때 한국에 게신 김동길 선생님께서 내 석사 과정의 전 학비와 생활비를 지급해 주셨다.

1994년 나는 영국 쉐필드 대학교 박사과정에 합격 했지만 이번에도 또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나는 등록 일을 앞두고 2500여 군데가 되는 영국 장학 단체 중 250 군데에 장학금 응모를 했다. 그 중 10군데 정도에서 크고 작은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쉐필드 대학에서도 몇 백만원의 장학금을 받았고, 강의도 좀 맡아서 생활비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했다. 학업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귀로에 있었다. 이 때 잉글 박사님은 자신이 저축해 놓은 4 천 만원의 돈을 나의 학비와 생활비를 하라고 선뜻 지원해 주셨다.

안타깝게도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주시던 잉글 박사님은 1997년 3월 8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젊었을 때 유서를 보니 자신의 몸은 해부용으로 병원에 기증했고 전 재산은 의료연구기금으로 암 연구단체에 기증했다. 잉글 박사님 친구분 등 주위분 들로부터 1998년 9월 나의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 될 때 까지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돌이켜 보니 1990년 무작정 영국 유학을 와서 1998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여러 분이나 단체로부터 도움 받은 액수가 1억원이 훨씬 넘는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사랑의 빚을 후진들에게 갚아야 겠다고 다짐한다.

1998년 1월 나는 대학원 후배인 영국여성 엔 엘리지베스 양과 결혼했다. 엔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그리스 라틴 고전문학으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쉐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문학으로 다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 중 나와 결혼했다. 엔과 나 사이에는 1남1녀 가 있다. 나는 아이들의 중간이름을 하느님 품으로 먼저 가신 잉글 박사님의 이름을 따서 잉글 이라고 지었다.

나의 꿈은 ‘잉글장학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있고 돈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원해 주는 것이다. 나는 뜻이 있는 곳에는 분명히 길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꿈을 가지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 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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