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대한민국, 미국 책임 대부분 묻지 못한 상태로 민간인 학살사건 조사 종결.

와단 2010. 7. 13. 21:04

AP     2010-07-11    

Korea bloodbath probe ends; US escapes much blame

대한민국, 미국 책임 대부분 묻지 못한 상태로 민간인 학살사건 조사 종결.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인권 침해 사건들을 조사해온 한국 진실화해위원회는 최근 정치적 보수 성격으로 회귀한 가운데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피난민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각 사안별로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발생한 일들로 규정지었다.

한국의 감춰진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위원회의 조사기간이 끝난 지금,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계속된 전쟁 초기에 한국 정부 당국에 의해 처형된, 특히 일부는 미국 측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된 한국 정치범들의 유해 수만 구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한 집단학살 유해 매장 추정지도 다수가 남아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4년 동안 기존의 어떤 다른 조사보다 더욱 깊숙하게 한국의 피비린내나는 과거를 파헤쳐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올해 들어 위원회 위원 구성도 바뀌었고, 진실규명에 대한 열의에도 찬물이 끼얹어졌다.

1950년 학살의 피해자 유족들은 계속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다.

“과거의 모든 진실들이 밝혀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런 국가적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입니다.” 82세의 양원진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60년 전, 총살되어 집단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새 위원장은 조사를 마무리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지난 12월 신임 위원장으로 취임한 정치학 교수 이영조 위원장의 말이다.
“더 조사를 진행한다고 해서 새롭게 밝혀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5년 “과거와 화해하고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 정부 하에서 창설되었다. 위원회는 1945년 해방 이전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 한국 군사정권 시기에 벌어진 사건까지 광범위한 인권침해 사건들을 조사해왔다.

북한이 1945년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로 분단된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1950년 6월 25일 남한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한국전쟁 시기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진실규명이야말로 위원회에서 한 작업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들이었다.

오랫동안 쉬쉬해온 진실, 즉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 군․경이 남쪽의 동조자들이 북측을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1950년 중반, 수많은 정치범들을 비밀리에 학살해왔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확인한 국가 기관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최초였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학살된 사람들의 수가 2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전쟁의 또다른 학살, 즉 한국 피난민 무리에 북한군이 침투해있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 하에 1950년에서 1951년 사이 미군이 수많은 죄없는 한국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고 호소하는 신청 사건들도 위원회에 200건 이상 접수되었다.

실제로 지난 10여 년 사이 비밀해제되어 발굴된 미국 문서들은 이 기간 민간인들을 공격해도 좋다는 포괄적 명령(blanket orders; 매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러이러하게 해도 좋다는 식으로 포괄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미군 지휘부로부터 내려왔음을 보여준다. 2007년에서 2009년 사이 위원회는 여러 건의 미군 관련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했다. 이 중에는 피난민들로 꽉 차 있던 동굴에 네이팜탄을 비롯한 폭격을 퍼부어 360여 명이 사망한 사건(단양 곡계굴 사건) 및 들판에 모여있던 197명의 피난민들이 폭격으로 사망한 사건(경남 함안 남산벌판 사건)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진보 성향의 위원회는 자체적으로는 배보상을 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위원회 측에서 무차별적 공격에 의한 것으로 합의한 사건들에 관해 한국 정부 측에 미국 정부와 보상 관련 협상을 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2007년 12월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 정부는 지금껏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대선 캠페인 당시 한나라당은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한미 동맹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한 바 있다.

지난해 말, 15명으로 구성된 위원들의 임기가 대부분 종료되면서 이명박 정부는 좀더 친정부적인 인사들로 위원들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새롭게 구성된 위원들은 위원회 임기를 2년 연장하는 대신 6월 30일에 종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한편 신임 이영조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은 위원회 조사결과를 담아 2009년에 발행한 영문 보고서 배포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신임 위원들은 미국의 전시 불법 행위와 관련한 기준도 강화했다. 신분상의 불안 때문에 익명을 요구한 조사관들이 AP에 밝힌 바에 따르면, 위원회 측이 매 사건마다 미군이 민간인을 살해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문서 자료를 요구했다고 한다.

6월 29일에서 30일 양일간의 마지막 전원위원회에서 서둘러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위원회는 앞서 밝혀진 사건들 외의 나머지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들은 군사적 필요성을 인정하여 미군의 중대 과실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이영조 위원장은 AP 기자에게 군사 작전 지역 인근에서는 “불가피하게 부수적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용어는 미군 측에서 민간인 피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완곡한 용어이다.

그는 또한 “대부분의 사건에 명백하게 의혹을 밝힐 만한 충분한 문서 자료가 확보되지 않았다”고도 이야기했다.
이영조 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몇몇 소수의 사건들의 경우 미국측의 “낮은 수준의 불법성”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배상 권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낮은 수준의 불법성이 확인된) 사례들 일부를 살펴보면

-1950년 8월 3일 여수에서 남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항구에 정박해있던 피난민을 태운 선박에 대한 미군의 공중 폭격.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수백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1950년 7월 11일에서 12일 사이에 발생한 이리역 폭격 사건. 이리역은 남하하는 북한군 전선보다 한참 후방인 남쪽 지역으로 약 300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다.

-1950년 9월 1일 포항시 동남쪽 인근 해변에 모여있던 피난민들에 미 해군 함정에서 함포 사격을 한 사건. 생존자들은 100에서 2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증언한다. 미 함정의 문서 자료(전쟁일지)에는 미 육군의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민간인들에게 발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사건들은 AP를 비롯한 저널리스트들과 역사가들이 발굴한 비밀해제된 전시 자료들에 비추어볼 때 명백하게 한국 민간인들에 대한 미군의 무차별적인 공격 패턴에 부합하는 사건들이다.

1999년, AP는 1950년 7월 한국의 작은 마을 노근리에서 발생한 미군의 피난민 학살 사건을 밝혀냈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약 400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이 보도가 나가면서 다른 대규모 미군 사건들의 목격자들도 용기를 얻고 증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측 자료들을 보면 고의성이 명백하게 입증된다. 1950년 주한미대사가 보낸 전문이라든가 북한군의 침투를 막기 위해 미군이 전선에 접근하는 피난민들에게 발포해도 좋다는 정책을 채택했다는 미 공군 고위 장교의 증언, 그리고 모든 민간인들에게 발포하라고 지시한 미군 지휘관들의 일련의 명령들이 바로 그러한 자료들이다. 미 제1기병사단 호바르트 R. 게이(Hobart R. Gay) 사단장은 심지어 피난민들이 “정당한 공격 목표”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근리 사건 조사 당시 미 국방부 조사팀과의 인터뷰나 저널리스트들과의 인터뷰에서 미 육군 및 공군 참전군인들 역시 무차별적인 학살을 증언했다. 도로를 줄지어 이동하던 피난민들에게 기총사격을 했던 조종사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복장인 “흰 옷을 입은 사람들”에 북한군이 침투해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미 전투기들은 우리가 피난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이건 전쟁범죄입니다. 이걸 그냥 덮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원우씨의 말이다. 그는 2살 때인 1950년 8월 14일, 미군이 설정한 전선 남쪽 후방인 경주 인근에서 미군의 피난민 폭격으로 부모와 누나를 잃었다. 그의 가족 외에도 70여 명이 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위원회가 미국 측의 배상을 권고한 진실규명 사건 중의 하나이다.

“미국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나몰라라 하는 건 유감입니다.” 80개 생존자 단체의 전국 연합체인 전국유족회 상임대표 오원록씨의 말이다.

한편 보다 엄청난 학살 파동, 즉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1950년 중반의 대규모 정치 학살에서 미국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파악하기는 훨씬 어렵다.

유족들은 미국 측이 이 문제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당시 미 사령관이 한국군의 총체적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미 장교들이 현장에 있으면서 이 끔찍한 사건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1950년 여름 북한군이 침략한 지 몇 주 만에 남한 당국은 이른바 좌익 혐의 재소자들을 끌어내어 일렬로 세워놓고 머리에 총을 쏘아 처형한 후 아무렇게나 대충 파놓은 구덩이에 시신을 매장하거나 폐광이나 바다에 던져넣었다고 한다. 재판 절차를 거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난해 11월, 유가족들의 신청을 접수해 조사한 위원회측은 4934명의 희생자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역사학자이자 전 상임위원으로 이 조사를 지휘했던 김동춘 교수는 최소 6만명에서 최대 11만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1950년 가을 북한군이 쫓겨올라가고 부역혐의자들이 일제 검거되었을 때 즉결처형된 사람들의 규모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는 이 수치가 “보수적으로 추산한” 규모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사를 연구하는 박명림 교수는 형무소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1950년 중반에 학살된 사람들의 규모만 해도 20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위원회 측은 또한 한국 정부 당국이 학살한 수보다는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북한 점령군이나 지방 좌익들이 한국 경찰이나 관료 등 우익 인사들을 처형한 사실도 밝혀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위원회는 유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13곳에 대한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한국 정부 당국에 의해 처형된 희생자들의 유해 2천 구 가량을 발굴했다. 그러나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유해 매장 추정지가 140여 곳이나 된다.

김종현 대전민간인희생자대책회의 회장은 “대전 지역에만 아직도 수천 구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습니다. 유족들의 입장에선 너무도 애끓는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대전에서는 1950년 7월 최대 7천 명이 학살되었으며 계곡을 따라 1마일 가량 길다랗게 이어진 구덩이에 한데 매장되었다.

유족들은 그래서 조사와 발굴 작업이 반드시 계속 이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오원록 전국유족회 상임대표는 “진실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배보상을 위한 재단을 정부에서 설립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위원회는 후속 연구와 조사를 지원할 기구를 설립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지금껏 아무런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국회에서 배보상 관련법을 제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청인들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직 승소하지는 못한 상태이다.

미국 정부에서는 노근리 사건에 관해서만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2001년 “숫자 미상”의 희생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였지만 유족들의 사과 및 배보상 요구는 거부했다.

2008년 주한미대사관 대변인 아론 타버(Aaron Tarver)는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모니터링하고 있지는 않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근에도 그는 “인권침해 사건들을 조사하고 과거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노력을 환영한다”는 형식적 언급만 했을 뿐, 위원회의 조사활동에 별다른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은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스스로 조사할 가능성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후임 이영조 위원장은 “미국이 어느 정도 화해 제스처나 행동을 보여준다면 좋겠다”고 제안한다.

유족들은 단 한 번도 반세기 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벌어진 비극과 화해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부분의 유족들은 아버지 혹은 부모를 잃고 가난에 시달리며 성장했으며 “좌익” 가족이라는 이유로 1980년대 후반까지 군부 독재정권 하에서 교육이나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다.

양원진씨의 말이다. “고향을 떠나서 살았습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숨죽여 숨어지내야만 했습니다.”


부역혐의로 몇 달 차이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처형되었을 때, 정해열씨는 10대 소녀였다. “부모님의 시신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종이컵을 불안하게 만지작거리면서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일흔일곱살입니다. 이 나이 먹도록 평생을 울면서 살아왔습니다. 꿈에 부모님이 나타나면 흐느끼면서 잠에서 깨곤 합니다. 너무도 그립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꼭 말하고 싶은 건, 이건 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By CHARLES J. HANLEY and HYUNG-JIN KIM / 번역 강은지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JR 상  (0) 2010.07.19
[사회]과거사 된 진실화해위, 못다한 아쉬움 | 위클리경향  (0) 2010.07.16
매튜 아놀드  도버 해협     (0) 2010.07.11
春望(춘망) - 杜甫(두보)의 시  (0) 2010.07.11
현영  (0) 2010.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