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평전] 중
• 이런 예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 정치적인 부정과 불의 같은 문제점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면 그 교회교단의 문제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관심이 가열되어 있는 듯 하다. 그런 면에서 집단적 이기주의의 성향이 강한 자기중심적 시야만을 고집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깊은 자문이 필요한 것이 이 시대 한국의 기독교이고 기독교인이다.[59함석헌 평전]
• 그는 "마치 소년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차듯이 이날껏 나는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오는 사람입니다. 내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고 몰아진 삶입니다."라고 말한다. 함석헌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정열은 이러한 인도에 스스로를 기꺼이 열어 둔 결과가 아니었을까[62함석헌 평전]
• 노자의 글처럼 함석헌의 글은 논리적, 이론적, 학문적, 방법론적이라기보다 직관적, 통찰적이다. 그는 학자나 이론가가 아니었다. 아마 그는 사상가 혹은 행동하는 사상가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이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사상이 연구실 안에서나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의 생각은 삶의 실존적 현장,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그 자신이 피땀 흘려 뒹구는 가운데 영글었고 다져졌다.[65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예술에 대한 감각과 합리적 사고력은 아버지로부터, 평등사상과 열린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술회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는 그가 네 명의 누이들과 함께 성장했다는 사실이 여성특유의 '부드러운 섬세한 힘'에 친숙해지고 또 자연스럽게 그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72함석헌 평전]
• 함석헌의 사촌형 함석규는 목사였다. 그는 어린 함석헌을 많이 아끼고 사랑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알고, 둘을 가르치면 다섯을 이해하는 사촌동생을 대견스러워했다.[75함석헌 평전]
• 일례로 1912년 '105인 사건'을 통해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게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124년 민족 지도자 가운데 남강 이승훈1864~1930을 포함한 98명의 개신교인이었다는 사실은 개신교의 사회, 정치적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준다.[78함석헌 평전]
• 20세기 초 조선의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적 믿음의 대상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 계몽 운동의 표상이자 문화적 본보기, 민족 발전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의 교회는 실제로 낙관주의의 상징이었고 상심에 젖은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었다. 교회는 종교 지도자뿐 아니라 사회 개혁가, 교육가들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조선의 현대화를 위한 새로운 추진 세력이 되었다. 많은 씨알들은 오직 교회의 한글 성경 교육을 통해서 비로소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79함석헌 평전]
• 뒷날 함석헌이 "내게 맨 처음으로 정신적 스승이 된 이"라고 기억하는 함일형은 3.1 독립 운동 후 일본 경찰에 의해 수감되기에 이른다. 반일 민족주의자로서 함일형은 기독교를 독립 정신과 자유의식을 고무하는 원천으로 보았다. 그래서 마음에 서양식의 장로교 사립학교를 설립한다. 함석헌은 전통적인 유교식 학교인 서당 대신에 바로 함일형이 설립한 신식 기독교 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81함석헌 평전]
• "나는 이상하게도 첨부터 활발한 새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때문인데, 내가 났던 평안도에 기독교가 막 들어왔습니다. 본래 평안도는 한국의 '이방 갈릴리'여서 여러 백 년 두고 '상놈'이라 차별 대우를 받아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버림을 받고 천대받아온 곳인데 그중에서도 내가 났던 마을은 더 심했습니다. 그야말로 '스블론, 납달리' 같아서 '바닷가 감탕물 먹는 놈들'이라 해서 머리도 못 들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도리어 복이 됐습니다. 밑바닥이니만큼 그 심한 정치적 혼란의 망국 시기에 있어서도 거기는 탐낼 것이 없는 곳이니 평화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받았으니 만큼 새로워지는 데는 앞장을 섰습니다. 이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속에 일찍부터 '큰 빛'이 들어왔습니다.[84함석헌 평전]
• 그럼에도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어느새 청년 함석헌의 관심은 민족의 독립이 아니라 출세와 잘 먹고 잘 사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렇게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장밋빛 미래를 떠올리는 동안 하늘 저편에서는 시커먼 먹구름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3.1운동과 함께 거친 인생의 여정이 그의 앞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88함석헌 평전]
• 그런데 1919년의 3.1운동의 젊은 함석헌의 삶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뒷날 회고했듯이 만약 3.1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심부름을 하는 한편" 그보다 못한 "동포를 짜 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89함석헌 평전]
• 훗날 함석헌은 3.1운동 당시를 돌이켜 이렇게 말한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에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는 시가행진에 참가했는데, 내 60이 되어 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상쾌한 때는 없었다. 목이 다 타마르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 꽂아 가지고 행진해 오는 일본 군인과 마주 행진을 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히고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91함석헌 평전]
• 33인의 민족 지도자 중에서는 남강 이승훈을 포함하여 16명이 기독교인, 의암 손병희를 비롯한 15명은 천도교인, 그리고 만해 한용운을 포함해서 2명은 불교인이었다. 또 경찰에 구금된 한국인들 중에서 2.89%가 개신교인으로(장로교인 15.91%, 김리교인 4.83%)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92함석헌 평전]
• 3.1운동 이후 조선교회에 대해 실망과 의구심을 심하게 느낀 조선인은 함석헌만이 아니었다. 그들 중 눈여겨볼 만한 몇몇 민족지도자들은 무력한 조선 기독교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노선을 택했다. 1920년에 한국 최초의 좌익 정당이던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이동휘나 나중에 좌익계 근로인민당을 설립한 여윤형은 둘 다 한때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평양신학에서 공부했고 전도사 일까지 했었다. 그러나 1919년 이후 이들은 모두 보수적인 조선 교회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느낀다. 반면 교회는 좌익계 지식층의 비판을 포용하기보다 강한 반공, 반사회주의 노선을 통해 철저히 이들을 배척했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기독교와 조선의 장래를 걱정하는 가운데 복잡한 내적 갈등을 느낀다.[99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1921년 평안북도 정주로 가서 기독교계 사립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오산학교는 재정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아주 열악해서 그저 아사 상태를 간신히 모면할 정도에 불과했다. 의자나 책상도 변변히 없었고 몇 백 명에 이르는 학생들은 다 무너져가는 초가집 천장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악조건에도 오산학교는 매우 진취적이고 낙관주의적인 기풍을 띠고 있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 발걸음에 힘이 있었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누구하고나 잘 어울렸다. 학생과 선생 사이에도 격이 없었다. 늘 활기에 넘쳐 있었고, 동네 사람들하고도 잘 어울리며 웃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함석헌의 눈에도 왠지 근엄한 얼굴로 굳어 있던 평양고보와는 완전히 달랐다.[103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 문화 운동, 신앙 운동의 산불도가니였습니다. 그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 교육이었습니다."[104함석헌 평전]
•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왕성한 독서 이외에도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두 스승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그들은 남강 이승훈1864~1930과 다석 유영모1890~1981였다. 남강은 함석헌에게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다석은 노장공맹을 비롯하여 다양한 동양의 고전 철학을 가르쳐 주었다.[108함석헌 평전]
• 이러한 남강에 대한 존경심은 함석헌은 이렇게 표현했다. "남강은 과연 조선에서 등촉이었다. 나는 이때껏 저만큼 광휘 있게, 저만큼 뜨겁게, 저만큼 기운차게, 저만큼 참되게 산 이를 보지 못하였다." 함석헌은 오산학교 들어오기는 1921년 즉 부활된 지 바로 후였고, 졸업하기 바로 전에 선생이 출옥하였다. 고로 그때까지는 선생을 아는 데 이르지 못하였고, 그 후 일본에 수년 있는 동안에도 간간히 뵈었으나 역시 깊이 알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였더니 1928년 일본으로부터 돌아옴에 비로소 선생을 가까이 보게 되었고, 그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위대에 대한 내 이해는 점점 깊어가서 오늘날까지 왔다."
함석헌의 또 다른 스승은 다석 유영모였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온 지 몇 달 되었을 때, 교장 선생님이 새로 부임했는데 그가 다석 유영모였다. 그는 함석헌보다 11살이 많았다. 언제나 흰 모시 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었고 하루에 한 끼, 그것도 저녁에만 식사를 한다고 호가 다석(多夕)이라 했다. 함석헌의 눈에 그는 빈틈이 전혀 없는 군자처럼 보였다. 함석헌은 그가 바닥에 드러눕는다거나 허둥대며 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하품을 한다거나, 기지개를 켠다거나, 너털웃음을 웃는다거나,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다석은 어디에 앉을 때도 늘 꿇어앉았으며, 서둘지 않고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채 160cm가 안 되는 키에서 어디서 그런 위엄이 나오는지 함석헌은 몰랐다.[111함석헌 평전]
• ……. 함석헌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그 삶의 기본적 가치 혹은 생활신조로 요약하기에 이른다. "생각을 많이 한 후 나는 내 인생에 이 세 가지는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첫째는 나는 한국인으로서 내 민족의 전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둘째 나는 하느님을 믿으며 신앙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셋째 과학을 공부한 이래 특히 웰스의 『세계사 개론』을 주의 깊게 읽은 후 나는 그의 세계주의 사고와 인류를 위한 과학의 역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112함석헌 평전]
• "자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복종할 수 없다. 자유를 알기 전에 한 복종은 짐승의 길듦이지 인격의 순종이 아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그것은 자유인만이 할 수 있다. 노예가 자아를 가지지 못한 물건이 어떻게 누구를 사랑하고 도덕률을 가질 수 있겠는가? 국민은 벙어리이다. 입이 없다. 인간인 이상 입이 없을 수 없지만 유구무언, 입이 있고도 한마디 말을 못하구나!"[119함석헌 평전]
• 함석헌 스스로도 조국을 일제의 손아귀에서 구원할 방법으로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의 정치 이념을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친숙한 기독교적 종교 윤리를 고수해야 할지를 두고 정신의 분열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가령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테러리즘에 찬성할 수 없었고, 또 공산주의자들이 옹호하는 무신론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내적 갈등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나는 번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정말 우리 민족을 건질 수 있느냐고. 정치란 것이 이런 것일진대, 지식인 - 상류 사회란 것이 이런 것일 진재, 그 악당을 물리치는 것은 종교 도덕으론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라를 해방시키려면 혁명밖에는 길이 없고 혁명을 한다면 사회주의 혁명 이외에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이 썩어져 가는 것을 보면 혁명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신앙을 버리고 도덕이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은 전혀 무시해 버리는 사회주의에 들어갈 수는 차마 없었습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오래 고민했습니다."[124함석헌 평전]
• 무교회 운동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제도적인 기성 교회에 속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인 고정 관념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치 무라는 교회가 건물이나 제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어떤 특정 교단이나 교회에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성서의 믿음대로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희망했다. 그는 체제 순응적이고 안전 위주인 일본의 기성 교회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려 시도했고, 다른 한편 기독교의 형제애에 바탕을 둔 공동체를 이루고자 노력했다.[126함석헌 평전]
• 우치무라의 가르침에 힘입어 종교적 신앙심이조국을 향한 사랑과 결코 유리된 것이 아니며, 참 신앙인은 한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스스로 그런 신앙인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굳힌다.[127함석헌 평전]
• 김교신은 창간사에 이렇게 적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 주고 싶으나 사람의 힘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어떤 이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어떤 이는 문학에 주며, 어떤 이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머리에 관을 씌울 것이나, 우리는 오직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뼈대를 세우고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131함석헌 평전]
• 이러한 일제의 야심에 걸맞게,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만들어지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은 동양 최고의 대학이라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위해 당시 일본 학계의 최고 두뇌들을 총동원한다. 이것은 식민지 조선을 철저히 굴복시키기 위한 최대 국가사업이었다.[137함석헌 평전]
• 어느 민족이든 자신의 역사를 찬양하고 미화하려는 충동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함석헌 스스로도 이 시기 이전에는 알게 모르게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찬미하는 '민족 사관'의 영향 아래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142함석헌 평전]
• 보다 못한 함석헌이 나섰다. 손에는 막대기와 망치가 들려 있었다. 그러고는 학생 둘에게 못줄을 잡혀 놓고 망치와 막대기로 박아 논바닥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어이가 없는 듯 지켜보았고, 어른들은 저게 무슨 짓이냐며 끌끌 혀를 찼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학생 몇이 논으로 들어가 거들기 시작했다. "저 선생인, 이렇게 해서 언제 다 벼를 심습니까?" "오늘 다 못하면 내일 하면 되고, 내일도 못하면 그 다음 날에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함석헌은 무슨 일이든 그렇게 했다. 일을 빨리 하는 것보다는 꾸준히,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함석헌이 구멍에다 조심스레 모를 넣었다. 그리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아껴가며 부었다. 그때 한 노인이 나무라듯 말했다. "아니, 이상한 사람 아닌가? 그래 가지고 어떻게 농사를 지어?"
함석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지켜보던 학생들도 하나둘씩 모판을 들고 논으로 들어왔다. 물도 없는 마른 논에서 모를 내는 학생들만 바쁘게 오갔다. 언제 다 하나 싶던 모내기가 며칠 만에 끝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지를 돕는 것인지, 다행히 열흘쯤 지나자 단비가 내렸다. 알맞게 물이 찬 논에 심은 모들이 파릇파릇 보였다. 논이 저만큼 귀한 걸 처음 알았다는 듯, 학생들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다른 논들처럼 모내기 때를 놓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157함석헌 평전]
• 톨스토이는 인도주의적 신앙에 대한 믿음을 방대한 저서를 통해 제정 러시아 사회에 보급시키고자 했다. 아울러 톨스토이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 이를테면 정부나 교회 조직의 권위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다. 함석헌이 교회나 국가 조직에 대해 품은 회의적 관점도 톨스토이의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아나키즘 사상에서 오는 면이 있을 것이다.[163함석헌 평전]
• 또한 함석헌은 감옥 안에서 『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무량수경(無量壽經)』,『금강경(金剛經)』등 다양한 불경을 읽었다.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함석헌이 감옥 안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싶어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옥 안에 읽을 책이 없어서 교도관에게 읽을 책을 요청했더니 그 교도관이 마침 불교 신자라 교행신증등 불교 서적을 들여보내 주었기에 함석헌은 뜻하지 않게 감옥 안에서 불경을 공부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는 기독교와 불교의 이치가 같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 그러나 그로부터 10여년 후인 1954년, 함석헌이 기독교의 속죄론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했던 발언으로 미루어 그의 사상에 불교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속죄론에 관한 함석헌의 글을 살펴보자. "속죄란 말의 신학상 용어는 영어로 하면 atonement인데 그 말이 이 뜻을 잘 표현합니다. atonement란 at-one-ment 즉 '하나 됨'이란 말입니다. .……. 다른 말로 하면 동일 인격의 자각입니다. 예수와 내가 딴 사람이 아니요, 인생과 우주가 서로 딴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1970년에 쓴 글을 보면 그가 말하는 속죄론에 스민 불교적 영향이 더욱 확실하다. "대속이 되려면 예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란 체험엘 들어가야 됩니다." 불경에서도 부처와 중생의 하나 됨, 중생 안에 항상 내재한 불성을 강조한다. "모든 중생은 태초부터 불성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마치 태양이 구름을 제치고 나타나는 것처럼, 혹은 마치 거울을 문질렀을 때 그것이 본래의 밝음과 깨끗함을 회복하는 것처럼……."[166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또한 『도덕경』『장자』를 읽으면서도 도가의 평화주의 사상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감방 대학'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기독교와 불교, 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그 근본에서 하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정상에 오른 등반가는 그 정상에 오르는 길이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훤히 알 수 있다. 함석헌의 종교에 대한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인식은 훗날 그가 서구의 기독교와 동양철학을 ㅅ사상적으로 융합하는데 근본적 원리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166함석헌 평전]
• "우치무라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아주 극진했던 반면, 나는 내 자신 속에 우치무라를 우상화하고자 하는 태도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는 의도적으로 우치무라의 모방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나의 독창적인 생각을 세우리라 결심했습니다."[167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 자신이 자주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한, 어떻게 역사화된 예수를 내 믿음의 목적으로 삶고 그저 주님, 주님 하고만 부르겠습니까? 어떻게 자주적 인격을 가진 도덕적 인간의 속죄가 이런 식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앞서 지적했듯이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의 하느님 사이의 하나 됨at-one-ment이었고, 이 하나 됨은 각자가 예수와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즉 속죄란 하느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예수와 인격적으로 일치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169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한 끝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역사적인 존재였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정신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역사의 예수 안에도 있었고 나 자신 속에도 살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함석헌은 예수를 믿었다기보다는 예수의 정신을 믿었다.[171함석헌 평전]
• 로크가 제창한 '동의에 의한 통치Govern by Consent'는 통치자가 설령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Divine Right을 가지고 있더라도 피치자의 동의 없이는 피치자를 통치할 수 없다는 개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피치자가 원한다면 통치자는 피치자의 필요에 따라 대체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서도 누구든 타인의 인격을 대신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없다. 모세가 하느님 앞에 홀로 섰던 것처럼 각 개인도 절대자 앞에 홀로 설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신 앞에 홀로 설 수 있는 자유인, 이것이 현대 종교인의 본모습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함석헌이 로크가 주창한 '인간의 천부적 자유권'의 개념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대속론에 반대하는 함석헌의 종교적 입장은 로크의 정치사상과도 적지 않은 유사성이 있다.[173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치무라의 동양 철학에 대한 입장에 점점 더 동의할 수 없었고, 결국 자신의 종교관이 무교회 운동과 더 이상 같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기독교 중심주의 종교관이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시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탈기독교적인 함석헌의 입장은 1952년 그의 시 「흰 손」과 1953년 「대선언」을 통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175함석헌 평전]
• ……. 함석헌에게 평화는 하느님과 역사의 '절대적 명령'이었다.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 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177함석헌 평전]
• 노자의 평화주의는 『도덕경(道德經)』 전편을 통해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보자. "큰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작은 나라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작은 나라는 겸손함으로써 큰 나라의 좋은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큰 나라와 작은 나라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큰 나라가 먼저 겸손해야 한다. 최고의 성취는 성취 욕구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럼으로써 항상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 최저의 성취는 성취 욕구에 집착해 있는 것. 그럼으로써 결코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것."[178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이렇듯 연약함, 겸손함, 부드러움, 마음의 평정, 정념(情念)의 순화 같은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노장 사상의 유연함과 초월성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노장 사상이야말로 감추어져 있는 인류를 사상적인 보물 창고라고 생각했다.[179함석헌 평전]
• 그래서 그는 곧잘 이렇게 표현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만 볼 것이 아니라, 노자, 공자, 불경도 봐야 합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진리를 통해서 전체 진리의 세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함석헌에게 노장 사상 그리고 종교적 관용성은 아주 중요했다.[182함석헌 평전]
• 기독교의 하느님과 노장의 도의 개념을 그는 이렇게 비교한다. "모든 있음은 있음 아닌 데서 나온다. 하느님은 이름이 없다. 모세가 당신이 누구십니까 했을 때 온 대답이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했다. 천지 만물은 자기주장을 아니하는 이, 자기를 무한히 내주는 이, 스스로 희생하는 이가 있어서만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 했다.[183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공자의 교조적인 철학보다는 노장의 초월적인 사상에 매료되었다. 노장 사상의 본질은 현실 초월적인 경향과 정치권력의 간섭으로부터 각 개인의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 반면에 유학에 있어서는, "공부하는 것과 동시에 정부의 관리직을 차지하는 것은 유교의 군자가 반드시 취해야 할 두 가지 덕목"이었다. 함석헌은 노장 사상과의 관계에서 유교의 교조적인 면과 예수와의 관계에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이며 교조주의자인 바리새인과의 관계를 이렇게 비교했다. "예수가 바리새적인 길(율법적인 길)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았던 것 같이 노자, 장자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춘추전국시대가 건져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185함석헌 평전]
• 미국의 퀘이커 윌리엄 펜William Penn 또한 그 점에 대해 "하느님은 영(靈)이기 때문에 최소의 형태를 가진 종교가 바람직합니다. 더 침묵할수록 더욱 영의 언어에 적절합니다."라고 말했다.[186함석헌 평전]
• 함석헌의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씨알들이었다. 공개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동시에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했다. 말이든 글이든 함석헌의 발언에는 종교적 이해관계에 얽힌 당파심이 없었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그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노자, 공자, 불경도 보아도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231함석헌 평전]
• 함석헌의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 중에도 전시 수도인 부산에서 이어진다. 1951년 8월 6일부터 11일에는 광주에서 '고난의 극복'과 '예수의 생애'라는 주제로 공개 강연을 열었는데, 그는 이런 자리를 통해 전쟁에 상처를 받고 신음하는 씨알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이러한 함석헌의 노력은 전후 한국 YMCA 재건 운동에 밑받침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34함석헌 평전]
• 이승만은 정동감리교회의 장로로서 그 나름대로는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다. 부통령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의 고위 간부들도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국회의장도 권사였다. 게다가 장관과 국회의원의 기독교인 비율이 제일 높았다. 당시 국회의원, 고위 관료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각각 21%, 38%였다는 수치를 보면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35함석헌 평전]
• 이를 테면 자유당 간부들이 기독교인들을 우선적으로 선별해서 미군 구호품을 분배해 주는 것 따위가 그랬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237함석헌 평전]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238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간디가 한때 이슈람 공동체Ashram Community를 만들어 생활했던 것을 두고 그런 공동체 살림을 부러워했다. 그러던 중 씨알 정만수가 천안의 땅 10만평을 그에게 기증했고, 함석헌은 1957년 3월 마침내 신학생 홍명순과 함께 씨알농장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거기에 설립하게 된다. 함석헌은 간디가 톨스토이 농장을 설립하여 후진들을 가르치는 한편 인쇄기를 손수 돌려 『인디언 오피니언』을 발행하면서 인도의 독립을 위해 힘쓰던 것을 상기했다. 자신도 씨알농장을 늘 꿈꾸어 오던 대로 종교, 교육, 농사를 묶어 물질만능의 세태를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한다.
"믿음과 교육과 농사를 하나로 껴 붙이어 돈 아니고 사는 세상을 만들어 봤으면 하는 꿈은 언제나 놓지 못하고 가지고 온다. 일제 강점기엔 그걸로 싸우려 해 봤고, 오늘은 또 그걸로 오늘의 대적과 싸우련다. 오산을 그만둔 것도 그 때문, 송산을 간 것도 그 때문, 인생 대학 이후 용천서 농사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247함석헌 평전]
• 그런데 점차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씨알농장을 찾은 청년 학생들은 농사일보다는 함석헌 개인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온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사회, 정치, 종교 문제에 대한 함석헌의 생각과 의견을 알고 싶어 했다. 이들은 대부분은 실제 농사에는 초심자였고 야외에서 흙 만지기보다는 앉아서 함석헌의 사상을 듣는 데 더 열중했다. 결과적으로 농사를 통해서는 씨알농장의 생활을 지탱할 만큼 수확을 거둘 수가 없게 되었다.[249함석헌 평전]
• 그래서 함석헌이 대폭 수정한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에 비해 기독교의 보편성을 강화해 나간 함석헌의 사상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그래서 비록 함석헌의 사관이 기독교 역사관에서 출발했지만 궁극에는 어느 한 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편-총체적 사유의 지평선에 다다른 그의 정신 여정을 [261함석헌 평전]
• 지구 공동체로서 타문화와 이웃처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좁아지는 세계 속에서 이제 나 혼자만이 잘살 수 없고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내 문화와 가치관만 강요할 수 없다. 이타주의, 포용주의가 어쩔 수 없이 이 시대의 갈등과 문명 충돌을 풀 수 있는 최대의 열쇠다. 그래서 함석헌은 일찍이 '같이살기운동'을 펼치며, "공동 훈련 안 하면 씨알 노릇 못한다."고 역설하는 한때는 씨알 공동체를 세우기도 한다. 노자가 "도가 어디 있는가? 전체에 있다."한 것처럼 함석헌은 "모든 것은 전체의 재단에 바쳐서만 보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기에 노자의 '도' 또한 함석헌의 같이살기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이렇게 함석헌은 몇몇 집단이나 사람만을 위한 특별한 가치보다, 수많은 씨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도 느꼈기에, 다른 종교와 이념을 가진 사람들도 기꺼이 포용하고 그들과 가까이 대화했다.
함석헌은 말한다. "사회 구원 없이 개인 구원 없다. 다 같이 가는 데가 어디일까? 의인, 죄인, 문명인, 야만인을 다 같이 구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유신론자, 무신론자가 다 같이 믿으며 살고 있는 종교는 무엇일까?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라고 또, "성당, 법당 안에서만 경건하고 눈물 나고, 나오면 곧 말라 버리는 그런 믿음, 우주 하나를 찢어 열 개 스무 개로 만드는 종교, 몇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불쌍한 사람을 영원히 가두어 두려고 지옥을 마련하는 종교, 그런 따위 귀족주의 종교는 이 앞으로는 사라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부분보다는 전체를 바탕으로 한 통합적 사고와 포괄적 전망,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편협하거나 독선적이기보다는 다름을 아우르는 관대함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강조하고 있다.[263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다양한 종교를 보편적 시각에서 포용하려는 노력으로 기독교의 아가페(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나 로고스(하느님의 말씀)를 노자의 도(道), 공자의 인(仁), 석가의 무한(無限) 개념과 동일시했다. "하느님의 영(靈)을 공자의 인(仁), 노자의 도(道), 힌두교의 브라만(범(梵)-우주의 근본 원리) 등 탈 인격적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발언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함석헌은 또 말한다. "너도 나도 기독교도 이교도도 다 같이 더듬어 가는 이 길이지, 찾아가는 아버지지 나만 아들이란 게 어디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어릴 때 어린 소견에 열심히 하라고 내가 너만을 아들이라 했습니다만, 장성한 담에는 나만이 아들이 아닌 줄을 알아야 아들 노릇을 할 것입니다." 함석헌은 신을 인격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고대인들의 영향이 오늘날에도 잔존하지만 미래에는 그런 경향이 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264함석헌 평전]
• 노자 "힘을 하나로 집중해서 유연한의 덕목을 성취한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을까?" 도덕경(道德經) 10장
예수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8: 3
노자 "선한 이들을 나는 선하게 대해 준다. 선하지 않은 이들은 어떻게 하냐고, 역시 선하게 대해 주지." 도덕경(道德經) 49장
예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마태복은 5: 44
노자 "크고 강한 것은 낮은 데 처하게 될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높은 데로 올리울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76장
예수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누가복음 18: 14
노자 "현명한 이는 자신을 뒤에 놓지만, 앞에 처하게 됨을 발견한다." 도덕경(道德經) 7장
예수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9: 35
노자 "부유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교만하면 불행을 자초한다." 도덕경(道德經) 9장
예수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렵다." 누가복음 18: 24
노자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는 이는 탁월한 이다." 도덕경(道德經) 22장
예수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곧잘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누가복음 16: 15
노자 "폭력을 쓰는 이는 화를 당해 괴롭게 죽을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42장
예수 "칼을 쓰는 사람은 다 칼로 망한다." 마태복음 26: 52
노자 "하늘이 구하고자 하는 이는 사랑으로 보호받는다." 도덕경(道德經) 67장
예수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들은 행복하다. 하나님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마태복음 5: 7)
노자 "내 말은 아주 이해하기 쉽고, 실행하기도 쉽다." 도덕경(道德經) 70장
예수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 30 [267함석헌 평전]
• 그러나 기독교 중심주의로부터 이탈하여 노장 사상이나 동양철학을 통해서 기독교의 본질과 하나님의 개념을 재조명하려는 함석헌의 시도는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때로는 심한 경멸과 비방을 감수해야 했다.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인에게는 응당 기독교가 중심이어야 하고 인간의 영혼은 오직 기독교의 하느님에 의해서만 구원받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함석헌은 타락한 인간, "십자가를 버린 이단자, 기도하지 않는 이단자, 너무 동양적인 이단자"라는 낙인이 찍혀 마땅한 존재였다.
함석헌은 자신에게 주어진 비판과 몰이해,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해서 이렇게 항변한다. "나는 십자가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십자가는 멀리서 단순히 우러러 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남 앞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기도는 텅 빈 형식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 앞으로 보란 듯이 하는 기도는 가능한 피하자는 말이다……. 나는 소위 동양적인 것을 거부하는 교회에 대항해 싸울 각오가 돼 있다. 유교와 불교에 대한 거의 모든 반대는 그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보다는 앝은 교단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269함석헌 평전]
• 퀘이커들은 성경을 존재하게 한 절대자의 성령이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 속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절대자가 몇 세기 전에 보여준 성경의 기록보다는 '지금 여기서' 절대자가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을 경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291함석헌 평전]
•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신비주의적 요소와 상식적, 과학적 측면을 다 같이 중시한 함석헌에게 퀘이커는 '이성적 신앙'의 좋은 예였다. 함석헌은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인에게 있어서 상식의 중요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상식적인 것이 좋은 것은 그것이 참(진리)이기 때문이다. 떳떳한 것〔常〕이 늘 있는 것〔恒〕이요, 그러기 때문에 올바른 것〔正〕이요, 또 그러기 때문에 참〔眞〕이다." 한국 기독교의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신앙 태도에 비판적이었던 함석헌이 퀘이커의 합리적 과학 정신과 '이성적 신앙'에 매료된 것은 '과학적 종교인'으로서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이다. 함석헌은 미래의 종교가 광신적이기보다는 과학적, 합리적이어야 하고, 감정적이기보다는 현실 감각을 지니면서 영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런 함석헌에게서 합리적 이성을 결핍한 종교는 맹목적 광신과 다를 바 없었다.[298함석헌 평전]
• 달리 말하면 한국 퀘이커들의 초점은 퀘이커리즘 자체였기보다는 함석헌이었다. 모임에서 함석헌의 역할은 전형적인 동아시아의 '스승'의 그것이었다. 함석헌과 다른 한국 퀘이커들과의 관계는 공자와 그 제자들과의 관계를 연상시켰다. 그들에게 함석헌은 어려운 존재이자 특별한 존경심의 대상이었지 동등한 만남의 상대가 아니었다. 요컨대 한국 퀘이커 모임에는 진정한 평등사상이 부족했다. 함석헌이 세상을 떠난 뒤 한국 퀘이커 모임이 한 때 침체의 길로 접어든 것은 그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311함석헌 평전]
• '씨알'은 '민중'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이 잡지를 빌려 함석헌은 소외되고 억눌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다. 채 100쪽이 되지 않았지만, 어두운 시대를 밝혀 줄 등불이 되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가로쓰기를 했고, 말하듯 글을 썼다. 『씨알의 소리』첫 호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신문이 씨알에게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씨알이 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고 한다. 그래서 『씨알의 소리』는 민중이 알아야 할 것이라면 무엇이든 숨기지 않고 보여주려 한다."[325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법정에 서서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나 자신의 뜻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가지고 밀려 나온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진실히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와 같은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내가 이렇게 참여하면 박해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내가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한 이렇게 법정에 서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337함석헌 평전]
• 역사를 움직이는 세력은 문자 그대로 걸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보(進步)' 세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다. 아니 모든 생물은 자기 몸을 보준, 유지하고자 하는 자기 보존의 보수성을 지니고 있고, 이 보수성은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의 원초적 본능일 것이다. 자기가 없는 상황에서 즉 자기를 보전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금수강산, 삼라만상, 온 우주의 존재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도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선언한 바 있다.[345함석헌 평전]
• 자신의 보편적 종교관을 함석헌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자기 종교를 절대화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종교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내 속에 있는 종교적인 것이 참 종교입니다. 그것이 나타나서 교리도 되고 교회도 되는 것인 만큼 그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데, 사람들은 대개 집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제도화된 것을 종교로 알고 절대화하려는 논리를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363함석헌 평전]
• 기독교인으로서 함석헌의 공헌은 이러한 한국 교회의 주된 흐름 속에서 상실되어 가던 기독교 본연의 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상력과 현실 비판의 정신을 복원시켰다는 점이다. 그의 삶 자체가 그것의 증거이다. 아울러 함석헌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장준하, 안병무, 김동길, 한완상, 이태영, 문익환, 문동환, 김찬국, 이문영 등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무력한 야당을 대신해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한 것도 함석헌의 이러한 공헌을 입증한다.[369함석헌 평전]
• 안병무는 함석헌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말했다. "함 선생님으로 인해서 나는 기독교를 탈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사상적으로 얼마나 좁은 틀 속에서 살고 있었으나 깨우쳐 주셨지요. 함 선생님의 씨알 사상은 내가 민중과 민중신학을 발견하는 과정에 어떤 눈을 뜨게 해 줬어요. 함 선생님은 통찰력이 뛰어난 분입니다. 지금도 함 선생님의 영향이 내게 끊임없이 작용해요."[372함석헌 평전]
• 그의 다원적이고 보편적 시각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프리카 흑인이 죽은 제 부모의 살을 뜯어먹으며 찾는 하느님은 또, '이것이 내 살이요 내 피다'하고 주는 것을 먹는다고 성찬을 행하며 기독교도가 섬기는 하나님이지 딴 하나님이 있을 리 없다……. 이사야를 일으킨 성령이 또 맹자를 일으키고 희랍의 성인을 일으켰겠지 누가 했을까? 동양도 사람으로 길렀겠지. 그랬기에 기독교 진리를 들을 수 있지. 유대인만이 홀로 하나님을 알았고 그 외 모든 이방은 몰랐다면 설혹 기독교가 유일의 종교라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다원적 종교관은 타종교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관용을 보았고, 복잡하고 광범위한 인간사에 대해서는 폭넓은 인도주의적 관심을 갖게 했다.[382함석헌 평전]
• 한국의 현대화나 근대화는 교회 성장, 교회 교육 기관의 확장에 따라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가 서구 문명을 한반도에 소개한 가장 중추적 통로였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있게 된 저변에는 기독교의 역할이 크다. 자유나 평등 같은 개념도 기독교를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가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렸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봉건적인 조선 왕조에서 이것은 혁명적인 사건에 비견할 만하다.[388함석헌 평전]
• 기독교는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파악하며 유일신의 개념이 강한 까닭에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인격 개념과 인권 의식이 큰 발달을 볼 수 있었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종교나 사상, 특히 노자의 도(道)라는 개념은 형상에 어떤 인위적 규정을 짓는 것을 거부한다. 노자로 인해 비로소 종교적 인격 개념에 대한 거부의 움직임이 최초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노장사상은 기독교에 비해 신 혹은 절대자의 개념이 직관적이고 탈 인격적이다. 동아시아의 퀘이커 교도로서 함석헌도 하느님이나 절대자를 인격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격을 훨씬 넘어서는 탈 인격적인 개념으로도 보았다. 기독교적 사고 구조에 익숙한 서구인들에게 탈 인격적인 절대자의 개념이 기독교 안에 존재하기란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란 인격적인 개념으로 뿐 아니라 초월적이고도 내재적인 존재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394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절대적 존재와 상대적인 종교와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느님의 품에는 나만이 아닙니다. 나만이 전부를 다 안 것이 아닙니다. 절대의 자리에서 하면 길은 유일의 길입니다. 하지만 상대의 자리에서 하면 무한한 길입니다. '종교'란 것은 상대계의 일이지 절대가 아닙니다. 소위 종교란 것이 없이 사람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집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종교라도 거기 하느님을 가두어 둘 만큼 클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에게 나가는 길이 무한히 있을 것입니다. 무한을 어떤 길로만 간다는 그런 모순이 어디 있어요?"[399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그의 구원관을 이렇게 말했다. "나만 들어가면 된다는 신앙은 낡은 신앙입니다. 나는 그것은 싫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욕심이요 교만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귀족주의는 하늘나라에는 못 들어갑니다. 이 세계가 온통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도 무신론자도 그 나라에는 다 들어가야 합니다. 이리 말하는 나나, 반대하는 복음주의자나, 무신론자나, 광신자나 다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반드시 들어갈 수 있어야 믿는 신앙, 신자는 특별히 뺀 자라는 데 어깨가 으쓱해서 믿는 신앙, 그런 현금주의는 신앙이 아닙니다."[403함석헌 평전]
• 한 종교가 다른 종교의 언어와 표현으로도 해석과 설명이 가능해 질 때 비로소 그 종교는 보편적인 종교,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문화적 토양이 다른 나라들 사이의 외래 종교 토착화 작업은 이러한 종교적 재해석 작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404함석헌 평전]
• 예수와 바리새인은 모두 똑같은 경전인 토라를 읽었다. 그러나 "다 같이 모세와 예언자에게서 받은 성경이지만 바리새교인의 성경과 예수의 성경과는 같은 성경이 아니었던 덧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함석헌의 지적처럼, 경전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정반대였다. 예수는 성경을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니 위해 읽은 반면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규정과 교리를 씨알들에게 강요하기위해 읽었던 것이다.[406함석헌 평전]
•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유다의 자살에 관한 글을 읽으며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보다 잃어버린 하나가 더 중하다고 했습니다. 하나가 없음으로 전체가 깨지지 때문에 한 사람의 실패를 결코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닙니다. 전체의 실패입니다. 유다가 마음을 열어야 세계구원은 옵니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는 순간도 유다를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예수는 유다를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410함석헌 평전]
• 그는 하느님과 씨알이 같다고 생각했고, 씨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의 종교는 두 겨냥을 가진 종교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로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은 내게 좋은 자만이 아니고 저 인생 온통이다.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하나님 말씀은 민중의 입을 통해 온다. 사람 없이는 하나님이 일하지 못합니다."[411함석헌 평전]
• 비록 함석헌이 살던 시대는 끊임없이 흑백논리가 강요되던 시대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 인간의 역사는 곧 하느님의 역사이다. 그는 역사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로 파악했고,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의 기록을 역사라고 보았다. 인간의 초월적인 면을 강조하면 하느님의 아들이요, 내재적인 면을 강조하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의 계시는 구저 공중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구체적인 인격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게는 현존하는 인간이 곧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대변자였다. 인류가 진화해 왔듯이 하늘나라와 하느님에 대한 개념도 계속해서 진화되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생에 결론은 없다. 인생은 그저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418함석헌 평전]
• 함석헌은 그의 세속적 무능을 두고 스스로를 바보새에 비유한다.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신천옹(信天翁)이라 이름한 이유는 이놈이 날기는 잘해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를 잡을 줄은 몰라서 갈매기란 놈이 잡아먹다가 이따금 흘린 것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일본 사람은 그 새를 바보새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바보새란 이름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사는 꼴도 바보새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밥벌이는 할 줄은 몰라 여든이 다 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그 아니 바보새입니까?"[421함석헌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