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은 민 또는 민중에 대한 순수 우리말로 ‘맨사람’을 뜻한다.
“너는 씨알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
지난 긴 5천 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함석헌은 생애를 통해서 여덟 번이나 ‘감방 대학’을 경험했다.
일제시대, 소련 군정하의 북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까지 이어졌다.
3.1운동 참가로 검거된 사람들의 종교적 구성에 대한 일본 경찰의 통계에 따르면 3373명이 기독교인이었고 2283명이 천도교인 346명은 유교인, 229명은 불교인이었다.
33인의 민족지도자 중에서는 남강 이승훈을 포함하여 16명이 기독교인, 의암 손병희를 비롯한 15명은 천도교인, 그리고 만해 한용운을 포함해서 2명은 불교인이었다. 38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 운동, 문화 운동, 신앙 운동의 산 불도가니였습니다. 그 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 교육이었습니다.“
1694년에 처음 출판된 폭스의 <일지>는 퀘이커(Quaker)신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인 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모든 인간 안에는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 (inner Light), 내적 그리스도, 하느님의 씨앗, 하느님의 신성 등 여러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자질이 있고 이를 통해 직접 하느님의 영 혹은 영감과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44
각 개인에게 있는 ‘속의 빛’이 신앙의 근원이고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는 통로라면 모든 사람은 절대 진리를 자립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선악 또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45
1908년 남강은 민족애와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독교 학교인 오산학교를 창설했다.
“생각을 많이 한 후 나는 내 인생에 이 세 가지는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첫째는 나는 한국인으로서 내 민족의 전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둘째 나는 하느님을 믿으며 신앙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셋째 과학을 공부한 이래 특히 웰즈의 <세계사 개론>을 주의 깊게 읽은 후 나는 그의 세계주의 사고와 인류를 위한 과학의 역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48
1922년 무렵 일본에는 약 3000명 정도의 조선 유학생들이 있었다.
우치무라 간조(1861-1930)는 기도와 성서 공부를 통해서만 인간이 하느님에게 통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선언했다.
무교회 운동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제도적인 기성 교회에 속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인 고정관념을 부인하는 것이다.
함석헌은 우치무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고, 우치무라와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와 더불어 일본에 있는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되었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56
<성서조선>은 함석헌의 오랜 친구인 김교신이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1927년 7월에 창간한 잡지였다.
1922년에는 조선사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관을 공식적으로 유포하고 나섰다. 그 역사관의 핵심 논리란 의존성과 나태함을 역사적 속성으로 지닌 조선 민족에게는 자율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지도와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59
“내 자신이 자주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한, 어떻게 역사화 된 예수를 내 믿음의 목적으로 삼고 그저 주님, 주님하고만 부르겠습니까? 어떻게 자주적 인격을 가진 도덕적 인간의 속죄가 이런 식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속죄란 하느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예수와 인격적으로 일치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교리의 속박이나 기존 제도의 간섭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내적인 신앙심을 기르려고 했다. 그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어떤 종교적 규칙이나 특정 종교 지도자의 생각을 그저 따라가거나 의지하지 않고 사람마다 스스로 예수와 독창적인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된다고 믿었다. 73
“나는 역사적인 존재였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정신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역사의 예수 안에도 있었고, 나 자신 속에도 살아 있습니다” 74
“인간의 자유권은 지상의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고 다른 인간이 제정한 어떤 입법상의 권위 아래 놓여서도 안 되며, 오직 각자의 천부적 본연의 법에 따라야 한다. ... 모든 일에서 각 개인은 스스로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유스러워야 한다.”
<두 정부론> 존 로크 1690년
함석헌은 절대자와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간접적이고 대리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오히려 직접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75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 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 78
하느님은 영이기 때문에 최소의 형태를 가진 종교가 바람직합니다. 더 침묵할수록 더욱 영의 언어에 적절합니다.
<윌리엄 펜> 미국의 퀘이커
<산>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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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모든 삶은 신성하다 All life is sacramental. <퀘이커<
모든 종교 도덕은 어쩔 수 없이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물론 다시 말할 것 없다. 모든 것의 터는 날사랑에 있다. 그러나 내 속알 밝힘이 산골짜기나 골방 속에서 되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 속알 밝힘은 반드시 그 어두워진 역사적 사회적 사회 살림 속에서 해야만 할 것이다. 126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127
“내가 <퀘이커 300년>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정신입니다. 나는 이 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 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128
불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결국 그 불의에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편안한 신발을 신고 걸으면 발을 잊는다. 허리띠가 편안하게 잘 맞으면 허리를 잊는다. <장자>
함석헌은 자신이 감옥을 들락거리는 사이에 때로 아내가 광주리를 이고 행상으로 식구들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고 술회하고 있다. 황득순은 다섯 자녀의 어머니였고 재정적으로는 거의 무능력한 남편의 아내였다. 함석헌은 영적으로나 내면적으로는 풍성한 삶을 살았다고 짐작되지만 현실적인 경제 생활은 빈곤의 악순환에 시달렸을 것이다. 148
(간디의 아내) 카스투르바(Kasturba)는 그녀의 거의 모든 생애를 통해서 간디와 그 아들 사이에 원만하고 행복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카스투르바는 네 명의 아들들을 아버지 간디의 ‘엉뚱하고 들뜬 공상적인 계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영국의 언론인 <페트릭 프렌치> 149
함석헌이 남긴 것들 :
첫째로 한국의 씨알들이 권리와 존엄성을 잃고 제 목소리를 빼앗겼을 때 함석헌은 씨알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둘째로 종교적 다원주의 입장에서 함석헌은 서구의 기독교와 동아시아의 사상을 융합한 종교, 철학적 유산을 남겼다.
유다가 예수를 따라다닌 동기는 종교적이거나 금전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이고 사회 정치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다는 로마의 지배에서 조국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고 사회정의를 실현다는 목표를 위해 민중 봉기를 일으킬 잠재적 영향력이 있는 예수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165
예수는 기존의 정치 질서와 종교적 규율을 위협한다는 혐의로 정치권력의 손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166
남을 위해 더 행하는 사람은 더 소유한 사람과 같다. 남에게 더 주는 사람은 더 가진 사람과 같다. <노자>
순전히 경제 성장의 성과만 거론하자면, 1930년대의 세계공황을 극복하는 데 히틀러나 스탈린의 경제정책이 미국의 루즈벨트의 경제정책보다 훨씬 효율적이었고 생산적이었다. 169
“나는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진리는 어느 한 개인이나 한 집단에 의해서만 절대적으로 독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70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다. 특히 순복음 교회는 규모 순위에서 1,2위를 석권했다.
한국 기독교에 강력한 것은 기복주의적 경향이다. 전래의 샤머니즘이 그러했듯이 기복 신앙은 오직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복리만이 관심사이다. 그 안에 남의 행복, 너와 나의 공동의 행복은 설 자리가 없다. 175
인간의 정신은 획일적이거나 일률적인 데서보다는 다양성 안에서 최고의 가치를 발휘한다. 진보나 발전이란 결국 단순 간단화에서 복잡 복합화의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수준의 삶에서는 다양성이 풍부하게 넘쳐흐르고 반면지극히 낮은 수준의 삶에서는 규격화와 획일화가 판을 친다고 생각했다. 179
“진리란 다이야몬드의 표면처럼 수많은 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오직 그 중의 몇 면만을 흘끗 볼 뿐이다.” <간디>
기독교 교회를 포함한 모든 종교 조직과 제도는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의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현상적인 교회가 본질적인 하느님을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큰 것, 즉 도는 가두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장자의 말처럼 하느님을 교회나 성경에만 가두어 둘 수는 없다. 182
교회나 교리는 하느님과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 도구에 불과하다. 비본질적인 교회나 교리가 본질적인 하느님이나 진리보다 부각될 때 그것은 곧 우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186
교리는 달(진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것이라 손가락 자체가 달이 아니고 달과 같을 수도 없다.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성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하나님 말씀은 민중의 입을 통해 온다. 사람 없이는 하나님이 일하지 못합니다. 190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 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 하고, 학자도 못 되고, 기술자도 못 되고, 사상가도 못 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