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이커

노벨상 수상식 연설문 (1947년)

와단 2013. 2. 19. 20:54

노벨상 수상식 연설문 (1947년)

노벨위원회 의장인 Gunnar Jahn이 행한 연설

노르웨이 의회의 노벨위원회는 올해의 평화상을 퀘이커에게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퀘이커의 두 구호기구인 필라델피아 미국친우회 봉사위원회와 영국의 봉사위원회가 이들을 대표합니다.

조지 폭스가 친우회(퀘이커의 다른 명칭, 종교친우회라고도 함. 역자 주)를 세운지 30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는 영국이 내란의 시기였고 종교적, 정치적 분쟁이 만연한 시기였습니다. 그 결과 크롬웰이 이끄는 섭정정치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지금 평가할 때 의심의 여지없이 독재정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진 것은 정치, 종교적 운동이 성공적일 때 흔히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이였습니다. 크롬웰 정권은 자유에 대한 권리라는 최초의 관심을 잃어 버렸습니다. 크롬웰이 정권을 잡은 후 자기 자신들이 얻기 위해 싸웠던 그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허용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의 장로교들도 그랬고 그 이후 독립교회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성장한 후에도 관용과 화합의 정신이 성공적으로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조지 폭스와 많은 그의 지지자들은 크롬웰 정치기와 그 이후의 기간을 경험했었으나 그들은 사람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무력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고요히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인 무기들이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우세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은 그들의 내면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형식보다 삶 자체를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식, 이론, 교리는 그들에게 결코 중요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초기부터 고정된 조직이 없는 공동체로 이어져 왔습니다. 조직화된 기구가 없었던 것이 그들에게 내면의 힘을 주었고, 대부분의 조직화된 종교 공동체들보다 더 인간에 대한 자유로운 시각과 타인에 대한 더 큰 관용을 가지게 했습니다.

퀘이커운동은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직후 1656년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처음에는 미국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바로 정착했고 약 25년 동안에 튼튼히 기초를 세웠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필라델피아 시와 펜실베이나 주를 건설한 월리엄 펜 3세가 퀘이커 교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1700년경에 미국에 이미 6만 명의 퀘이커들이 있었고, 영국에서도 그 정도의 수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퀘이커들이 그들만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지난 3백 년 동안 퀘이커 내에서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초기 퀘이커들이 입었던 의상 같은 외부적인 관습들이 폐기되었습니다. 그리고 퀘이커 자신들도 17세기의 사회와는 많이 다른 사회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퀘이커 주변의 사람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인류의 마음 속에서 극복되어져야 할 그것은 그 때보다 더 힘이 약화된 것이 아닙니다.

종교친우회는 많은 회원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전 세계에 20만 명이 조금 넘고 대부분이 미국과 영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힘과 그들의 행동입니다.

우리가 퀘이커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우리는 퀘이커들이 신앙을 통해 그들이 얻었던 힘과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그들의 믿음대로 살려고 했던 노력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형태의 폭력도 항상 반대했고, 대다수 퀘이커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퀘이커 전통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습니다. 1660년의 선언문은 진실로 사실입니다. << 우리는 어떠한 목적과 어떠한 구실로든 간에 모든 유형의 무기를 가지고 하는 외형적인 전쟁과 폭동 그리고 싸움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 세계를 향한 우리의 증언입니다.>> 퀘이커들은 단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남에게 불의한 일을 행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자신들에게 불의한 행동을 했을 때 보복하지 않고 참아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궁극적으로 얻어내어야 할 승리는 인류 자신의 마음속에서의 내면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으나 퀘이커들은 때때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보다 자신들의 내면의 정신적인 삶과 자기 자신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었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퀘이커내의 역사기록자가 말한 것처럼 그들의 행동에는 어떤 수동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침묵하는 이들 중에 하나로 간주되어지기를 더 바랬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누구도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되어서 단지 침묵하는 무리에 속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퀘이커들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퀘이커들과 다른 시민들이 서로를 알아가도록 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과 함께 지역사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더 적극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들의 삶을 통해 자신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단지 퀘이커들의 활동 중 몇 가지 단편적인 예를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1810년 퀘이커는 최초의 평화기구를 창설하는데 참여했고, 그 이후로 모든 적극적인 평화운동에 참여해 왔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Elizabeth Fry, John Woolman과 그 외의 다른 퀘이커들이 노예제도 반대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며, 또 사회 정의를 위한 다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자유주의 이상가인 John Bright가 40년간 전쟁의 원칙들에 반대하고, 평화의 원칙을 지지하는 투쟁과 그의 Crimean 전쟁에 대한 반대, 그리고 Palmerstion의 정책에 반대했던 그의 분투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19세기 동안 퀘이커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역의 일과 정책들에 참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많은 다른 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퀘이커를 유일하고 독특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만이 아닙니다. 노벨상 창설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처럼 퀘이커들은 국가들 간에 우애를 증진시키기 위해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지원했다는 측면입니다. 그들의 활동은 감옥에서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동안에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던 우리의 선원들로부터 퀘이커들의 도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1846-47년 사이에 있었던 아일랜드 대기근 동안의 퀘이커들의 지원을 알고 있습니다. 영국해군이 핀란드해안을 폭격한 Crimean 전쟁에서도 퀘이커들은 서둘러 전쟁의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왔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1870-71년 사이의 있었던 복수전에서도 그들의 지원 활동을 보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퀘이커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고 그것 때문에 많은 퀘이커들은 감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종종 일반 죄수들보다 더 가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가 가장 오랫동안 기억해야할 부분은 아닙니다. 1차 세계대전과 그리고 그 후 복구기간 동안을 자세히 관찰한 우리는 전쟁으로 인한 참담함을 회복시키기 위해 퀘이커들이 했던 일의 가치를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리라고 생각됩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그 해 부터 영국의 퀘이커들은 구호 활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영국 퀘이커들은 프랑스의 Marne 지역에서 구호 활동을 시작했고 할 수 있을 때마다 전쟁이 일어나는 바로 그곳으로 갔습니다. 1차 대전 내내 이들은 이런 구호 활동을 했고,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더 큰 임무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처럼 그 때도 전쟁 후에 굶주림과 질병이 뒤를 이었습니다. 1920-21년 러시아의 기근과 Nansen의 인도적 지원에 대한 호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몇 해 동안이나 지속된 비엔나 어린이들의 처참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그 구호활동에는 어디에나 퀘이커들이 있었습니다. Hoover의 요청이었던 병들고 영양실조에 걸린 독일 아이들에게 식량을 지원하는 사업을 주도적으로 했던 것은 친우회의 봉사위원회였습니다. 이 봉사위원회 조직은 폴란드와 세르비아에서 일했고, 프랑스에서까지 가서 활동했습니다. 이후에 스페인 내전 동안에는 내전의 양쪽 진영 모두에게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퀘이커들은 내란의 양쪽 진영 정부로부터 신뢰를 받았습니다. 양 진영의 사람들은 모두 퀘이커들이 단지 구호를 목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퀘이커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퀘이커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는 일반인들이 퀘이커들에게 건넨 상당한 금액의 기부액으로 나타납니다. 퀘이커들은 큰 재산이 없는 평범한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진 것만으로는 그렇게 큰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양차 세계 대전 사이에 퀘이커들의 사회지원활동은 더욱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처한 문제의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에 전시 때의 구호 활동과는 다른 형태였습니다. 전후 복구 사업이 더 강조되었습니다. 교육과 가르치는 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고, 전시에 있었던 식량과 의복 지원의 경우보다 사람들 간의 인적 교류의 기회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이런 활동들 중에 인상 깊은 예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석탄광부들을 대상으로 한 성공사례입니다. 퀘이커들은 이 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했고 실업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했고, 새로운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활동했던 한 퀘이커의 말로는 그들이 살고자 하는 희망조차 상실한 이들에게 자기존중과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여러 예들 중에 하나입니다.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처럼 퀘이커 개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퀘이커들이 현역병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에 구호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병역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퀘이커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도 않았고 박해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2차 대전 때는 비록 전쟁의 희생자들을 구호했던 이들에 비해 소수이기는 했지만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던 퀘이커들도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이 직면한 첫 번째 과제는 피난민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국경선이 봉쇄되어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유럽의 상당부분이 빠르게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미국은 잠시 중립을 지켰습니다. 독일에 의해 점령된 대부분의 나라들은 퀘이커들에게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사실 폴란드에서는 난민을 지원할 수 있는 공식적인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지원받을 대상을 선정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만 난민 지원이 가능하다는 단서가 있었고, 퀘이커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영국에서, 그리고 유럽과 아사아의 여러 나라들의 전선 후방에서 그리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활동했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을 때 8만 명의 시민권을 가진 일본인을 포함해 총 11만 2천 명의 재미일본인들이 대서양 연안 쪽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퀘이커들은 이 일본인들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재미일본인들을 괴롭혔던 만연한 반일감정에까지도 반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금, 도움의 요구는 전보다 더 커졌습니다.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넓은 지역에서도 똑같은 도움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더욱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져갔습니다. 1945년 나치의 수용소로부터 풀려난 수감자들, 강제노동이나 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해방된 모든 이들, 돌아갈 나라가 없는 흩어져 있던 모든 이들, 각국의 노숙자들, 고아들, 굶주린 이들과 기아 상태의 이들! 문제는 단순히 음식과 옷을 공급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회복하고, 일자리를 주고, 자기 존중감, 그들의 신앙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퀘이커들은 모든 곳에서 적극적이었습니다. 나라들이 국경을 다시 열자마자,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자국민들과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적이었던 나라의 국민들에게도 그리고 프랑스, 독일, 인도, 일본에서 지원을 했었습니다. 퀘이커들이 당시에 했던 지원의 범위를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들의 지원액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년 미국의 봉사위원회 예산이 노르웨이 화폐단위인 크로너로 46백만 크로너였다는 사실이 이들의 활동의 규모를 암시하는 하나의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여러 퀘이커들 중 단지 미국 봉사위원회 하나가 사용했던 금액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퀘이커들은 개인적으로 타 구호기관의 구호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비엔나나 그리스와 같은 다른 많은 곳에서 UN 구호 및 재활 관리의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오늘날 퀘이커들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될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구호 활동들을 세부적으로 면밀히 조사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 일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깊은 통찰력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 일이 어떤 정신으로 행해지는가가 그들의 활동을 이해하는 식견을 제공합니다. 한 젊은 퀘이커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퀘이커로 만들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왔습니다. 증오의 정신으로 파괴했던 것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 복구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퀘이커가 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일반인들이 퀘이커 신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은 성급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호활동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의 영향력도 일의 종료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를 세상에 보여주려고 구호지에 온 것이 아닙니다. 아니오.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쟁의 상처를 감싸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 의미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선한 행동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전쟁을 벌임에도 불구하고, 피부색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서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나라들 간에 평화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가 여기에서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인류 자신의 내면에 평화의 기초를 건설해서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는 아직 이 길을 따라 긴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고통당하는 이들을 도우려는 위대한 자발성, 전쟁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관용 그리고 종종 가장 가난한 이들이 가장 크게 보여준 그 관대함을 볼 때 인간의 마음속에 우리가 기초로 삼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희망과 언젠가 우리가 모든 지역의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우리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퀘이커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은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돕고자 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국적이나 피부색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준 아낌없는 동정심의 표현이 영구적인 평화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그 이상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력에 대한 정신적 승리를 안겨준 신앙으로부터 나온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을 겪을 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었던 Arnulf Överland의 시에서 두 구절이 떠오르게 합니다. 저는 퀘이커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존경의 표시를 알지 못합니다.

무기를 들지 않은 이만이

영원한 힘에 의존할 수 있다.

정신만이 승리를 준다.

번역: 한승훈,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의역했습니다.

원문: http://www.nobelprize.org/nobel_prizes/peace/laureates/1947/pres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