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독교인은 함석헌을 두고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종교 사상가"라고 말한다. 함석헌의 종교적 보편주의에 입각한 기독교관은 정통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기독교의 입장과 분명 충돌의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근본주의적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서 함석헌을 '비기독교인'으로 단정하는 경향마저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아마 "나는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진리는 어느 한 개인이나 한 집단에 의해서만 절대적으로 독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와 같은 함석헌의 발언이 이러한 단정의 증거가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함석헌을 비기독교인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그는 1988년 미수(米壽)를 맞아 생일상을 받은 자리에서 "내 주님이라면 예수님밖에 더 있나요..."라며 공개적으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한 바 있다. ...... 필자 또한 함석헌을 기독교인으로 본다. 필자는 기독교인을 삼위 일체론이나 속죄론, 육체 부활론 등의 교리를 타인에게 주장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정신을 이어 '지금 여기서'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 정의나 이타주의에 입각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또한 기존의 기독교 교회만이 예수의 정신을 인류에게 드러내 보이는 매개체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정신이 대자연이나 위대한 예술품, 혹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을 통해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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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대통령 이승만, 제2공화국 대통령 윤보선, 제2공화국 국무총리 장면, 제7공화국 대통령 김영삼, 제8공화국 대통령 김대중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남한의 정치가 군사 독재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기독교인의 손에 좌우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무수히 많은 교회와 더불어 번성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다. 특히 순복음 교회는 규모 순위에서 1, 2위를 석권했다. ...... 기독교는 이처럼 화려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에 걸맞는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심화를 이룩하지 못했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강력한 전통을 지닌 유교의 권위주의와 계급 조직적인 요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교에서 수신(修身)을 강조하는 것과 초기 서양 선교사들이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요소를 강조한 것에는 흥미로운 일치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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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한국 문화, 크게는 동아시아의 문화와 배치되는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우스꽝스러운 일은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축하하는 반면 한국 전통 명절인 추석은 등한히 한다는 점이다. 이는 유럽의 교회가 미국식 추수감사절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과 대조적이며, 한국의 기독교인이 얼마나 전통 문화에 대한 주체의식, 주체성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본질과는 무관한 미국식 기독교 문화를 기독교의 전부인 듯 모방하고 열렬히 받아들인 반면, 동아시아인으로서 기독교에 창조적인 공헌을 하는 일은 소흘히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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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에게 한국 기독교의 이러한 면모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 서구적 외양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결과였다. 무비판적인 것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기독교 신앙만이 진리라는 생각 위에 다른 종교들에 대한 배타성의 담을 쌓아 올렸다. 이렇듯 한국 기독교가 화려한 성장의 그늘에 감추어 가진 내면의 빈곤, 주체성의 결핍, 극단의 이기주의와 편협함을 바로잡고, 더 나아가 한국적이고 동아시아적인 기독교의 상을 창조하려는 의지가 함석헌에게서 동양 사상을 통해 기독교를 재해석하고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에 길을 내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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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인간이 종교적 교리의 장벽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예수의 정신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한편, 기독교 교리의 벽을 자유롭게 뛰어넘었다. 교리나 신조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와 다른 뜻을 지닐 수 있다. 단어나 교리는 진리의 본질이나 개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일 뿐이다. 그러나 진리의 본질적 개념을 파악한 사람에게 단어나 교리는 별 의미가 없다. 선불교에서 교리나 경전 대신 묵상과 영감을 중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이나 진리를 의식과 느낌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 교리나 단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진리를 교리나 단어로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한다 한들 부질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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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몇 천 년 전에 씌어진 책이다. 그러나 그 기간에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시각은 성장하고 변모해 왔다. 함석헌은 오늘날 세계와 종교를 보는 인간의 안목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와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고 보았다. 우주선과 인공위성이 나는 현대와 비교하면 바울 사도가 살았던 세계는 아주 작은 세계였다. 바울이 접촉한 세계는 지리적으로 고작해야 중동, 마케도니아, 그리스, 로마 제국, 이집트 정도였다. 바울은 중국, 인도, 북남미 대륙, 아프리카, 남북극, 폴리네시아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사상적으로 바울은 바빌론, 이집트, 헬라, 페르시아 철학을 접해 보았을지 모르나, 베단타 철학, 힌두교, 불교, 유교, 노장 사상을 알았을 리 만무하다. 이 점에서 현대의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한계를 넘어 보편적인 설득력을 갖추려는 노력이고, 다른 종교 및 사상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시도이다.
[출처] 함석헌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