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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역대정권의 비교분석과

와단 2013. 12. 20. 07:14

해방 후 역대정권의 비교분석과

함석헌의 같이 살기 운동

 

  <씨알의 소리> 2002년 9/10월호  

 

김 성 수

 

 

 

1. 시작하는 말

 

한국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대통령 김대중의 두 아들은 지금 부정 부패 혐의로 불명예스럽게도 교도소에 앉아 있다. 김씨는 그 임기를 얼마 안 남겨두고 있고 그 자신이 외신기자회견에서 아들문제가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이라고 씁쓸하게 술회했다 하니, 듣는 이의 가슴도 아프다. 세계에 한국의 만델라로 불리며, 한국헌정사상처음으로 야당지도자의 신분으로 화려하게 정권을 잡은 김대중 대통령의 면모는 지금 그러나 그의 건강상태처럼 그저 초라하기만 하다.

김씨는 그의 파란만장한 야당정치인 생애를 통해서 박정희, 전두환으로부터 각각 사형선고를 받은바 있다. 한번은 몰래 납치되어서 죽음일보직전에 가까스로 구출되기도 했다. 이런 수난은 그의 가족 중 비록 김씨 혼자만이 직접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아들들 역시, 1970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 최소한 약 20년간은 빨갱이자식의 신분으로써 주위로부터 갖은 견디기 힘든 수모와 멸시를 받아왔다. 그 아들은 취직도 물론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반공이데올로기로 가득 찬 이 비좁은 한반도에서는 가까운 친지와 가족을 제외하곤, 언제, 어디서나 냉랭한 왕따를 받았다. 그래서 김씨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 아들들은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감동적인 순간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들을 20년간 냉대하던 시선은 어느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주변으로부터는 뜨거운 동경과 존경의 시선만 느꼈으리라.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실낙원에 살고있는 오늘의 김씨의 아들들의 비극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박지만 씨의 경우는 더욱 비참하고 슬픈 한국현대사의 비극이다).

이런 비극적인 한국역사를 염두에 두고 나는 아래 글에서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역대 정권의 허와 실을 비교, 진단, 분석 할 것이다. 박정희는 국가를 총동원해 잘살아보세를 외쳤지만, 같은 시대에 함석헌은 바르게살기, 같이 살기운동을 펼쳤다. 과연 박지만, 김현철, 그리고 위의 언급한 김대중씨의 아들들은 지금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함석헌이 주장한 바르게살기나 이웃과 같이 살기가 전제되지 않는 나 혼자만이 잘살기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그것은 오늘의 부시정권하의 미국처럼 국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과연 오늘의 김대중정권은,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이나, ‘민족중흥의 영웅이라던 박정희의 공화당정권보다, 혹은 하면 된다던 전두환 의 민정당 정권보다, 부패와 불의가 판치는 대한민국을 씨에게 남겨주고 있는가?

 

2. 부패 정권: “절대정권의 절대부패

 

이승만의 생애를 일컬어 조선일보는 거대한 생애’,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로 묘사했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방 후 오늘까지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느끼는 점은 이승만씨의 잘못이 참 많다는 생각이다. 그 인물과 그 지략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도 역사적 안목이 없었을까! 왜 시대정신, 시대의 고민을 잡지 못했을까! 그저 통탄스러울 뿐이다. 그는 오랜 생활의 망명 끝에 194510월 중순 오스트리안 아내 프란체스카와 함께 귀국했다. 그는 확실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직력을 장악하는데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귀국함으로 인해서 비로써 한국의 잡다한 사분 오열 된 우익집단은 그럭저럭 한 목소리를 내게된다.

물론 미국의 잘못도 크다. 미국은 분단된 남한에 철저한 극우 반공정권이 들어오는 한 친일정권도 독재정권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철저히 지지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승만은 이런 면에서 미국에게는 아주 유용하고 쓸모 있는 인물이었다. 이승만과 미국은 그래서 서로 공동의 필요에 의해서 적극적이고도 열광적으로 친일파 출신의 경찰과 일본군관학교 출신의 한국인들을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6.25전쟁을 직면해 두고 이승만과 미국은 김구, 여운형 등을 포함한 남한의 굵직한 정치 지도자들을 하나둘씩 제거했고, 강력한 친일파 극우정권을 창출했다. 이승만은 친일파 경찰을 자신이 정치적 세력기반을 남한사회에 강화시켜나가는데 절대 필요한 조건으로 인식했고, 친일파 집단은 자신들의 과거 죄과를 덮는데 이승만의 두툼한 보호막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이 동북아 방어지역에서 고의로 남한을 제외시킨 것에 고무되어 19506.25는 일어났다. 몇백만의 죄 없는 목숨을 앗아간 6.25가 끝나고 북한은 잔인하고 맹목적인 극좌독재국가가 되어갔고, 남한 역시 더욱 철저하고 맹목적인 극우독재국가가 되어갔다.

이승만은 자신을 한반도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너무나 중요한 지도자로 여겼던 것 같다. 그는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남한을 조선왕조의 전제 군주처럼 통치했다. ‘제왕적 대통령의 썩은 뿌리를 우리는 소위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승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6.25 전쟁중인 1951년 그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자유당을 창설했다. 1952, 이승만은 자신이 헌법 절차에 의해서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기의 정책을 반대하는 14명의 국회의원들이 북한 공산주의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허위주장을 유포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는 즉시 그 14명의 국회의원들을 감금, 투옥시켰다. 한술 더 떠서 이승만은 그의 정책과 행동을 비판하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불법이라 선포했고, 뉴스위크타임즈의 배포를 금지시켰다. 오늘날 대통령이 방송사를 불법이라 선포하고, 신문 배포를 금지시킬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조선일보는 이승만을 일컬어 거대한 생애라고 칭송하고, 김대중씨는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거침없이 비방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1954년 이승만은 공포정치를 통해서 자신이 재임될 수 있는 확고한 개헌법안을 국회에 통과시켰다. 그러니 절대권력은 절대부패 한다는 말처럼 견제세력이 전혀 없는 이승만과 자유당의 부패는 더욱 확산 되어갔다.

자유당 간부와 고위 공무원의 부패가 극에 달하고 동시에 경찰의 권한 오용도 덩달아 극에 달해갔다. 이때는 자유당과 한국 기독교 교회와의 열애도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이 시기에 함석헌이 기독교인들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쓴 글이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1956)”이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958)”였다. 결국 개인이나 집단이나 남을 무시하고 자기만 아는 단체는, 자유당의 말로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의 시궁창으로 사라진다.

1960년대선 을 앞두고, 자유당지지와 후원을 받은 정치깡패들은 야당당사를 때려부수고 야당 지지자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한다. 그것도 부족해 19603월의 선거는, 투표함 바꿔치기, 피아노표, 몰표, 꼬챙이표등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한 확실한 부정선거였다. 그것도 부족해 마산상고 고등학생 김주열(1943-1960)군이 이승만 정권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고 이는 결국 씨의 눈을 뜨게 해주었고, 이 누더기 같은 역사에 4.19 혁명의 희미한 빛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했지만 인간의 정신은 무력으로 제거할 수 없다. 결국 자유우방이라는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하고 정권을 포기했지만 사실은 미국이 원했기에이씨는 물러간 것이다. 5년 후인 1965년 그는 하와이에서 거대한이 아닌 비참하고 초라한 생애를 마쳤다.

장면정부는 9개월도 유지하지 못한 정권 이였기에 이 글에서 다른 정권과 비교분석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두 가지 집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우리는 흔히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남한의 경제기적을 이룬 장본인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은 박정희가 내세운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나 한일국교정상화는 장면정부가 실시 하고자 했던 주요한 계획 중의 하나였다. 그러한 정책은 박정권의 독특하고 치밀한 경제-외교전략이 아니었고 그저 장면정부의 경제-외교계획안을 도둑질한 것이었다. 역사에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끝난 것이 장면정권이었다.

 

3. 군사독재: “칼로 선 자는 칼로 망한다

 

이승만에 뒤이은 박정희 정권의 후유증은 한국현대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친일세력 등용문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중병을 앓고 있는 정치적으로 선동된 지역감정, 그리고 군사독재의 유산인 획일적 사회풍토다. 한술 더 떠서 김종필은 19616월 중앙정보부를 창설함으로써 한국의 역사를 민주주의에서 퇴보시키고, 개인의 사생활이 철저히 무시된 통제국가, 경찰국가를 만드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이가 지금도 무슨 보수세력의 대변자나 되는 듯이 오늘의 정치무대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 나는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정신분열증에 걸린 노인네는 이제 다름 아닌 김종필 자신이라는 확신이 든다.

박정권은 처음부터 합법성이 철저히 결여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그래서 그는 쿠데타 정권의 정당성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에게 감시. 고문, 협박으로 다스렸다. 박정희와 김종필등은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자 곧 국회를 해산시켰고, 일제하 이래로는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정치, 집회의 활동도 금지시켰다. 1961년 말에 이르러 3천명이 넘는 박정희의 정적이 체포되었던 것이다.

5.16은 한국 정치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박정권이 한국 정치-사회에 개성과 개인의 독창성이 무시된, 전체주의화, 획일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계엄령이 없이는 남한을 통치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현재의 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이 박정권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것은, 두 김씨는 박씨가 내세운 계엄령이나 국가원수 모독죄가 없이도 남한을 통치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무시하고 탄압한 박정권은 많은 면에서 일제 식민지 정권과 유사성이 많다. 박씨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씨의 정치적 참여나 국민투표는 시간낭비로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19633월에 접어들어 박씨는 그가 한 약속을 서슴없이 깨뜨리고, 군정은 4년간 더 연장될 것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박씨의 발언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반향을 일으킨다. 결국 한달 후인 48, 박씨는 불가피하게 군정연장 계획을 취소한다고 밝히고 자신은 참여하지 않고 연말에 대선 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데로 또 한번 씨과의 약속을 주저 없이 깨뜨리고 박씨는 대통령으로 출마하고 정권을 거머쥐게 된다.

이씨의 자유당과 박씨의 공화당은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이라는데 성격을 같이한다. 이씨나 박씨는, 김종필씨가 훗날 아이러니컬하게 김영삼 정권을 도마 위에 놓고 비방하기도 전에, “법치가 아닌 인치를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 박씨는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 같은 개념을 의심쩍어 했고, 국민의 대변자를 모아놓은 국회의 기능을 신통치 않게 여겼다. 1967년대선 을 치르고 박씨는 또 간신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신민당과 학생들은 이 선거를 부정선거로 이름했다. 결국 박씨는 31개의 대학과 136개의 고등학교에 한동안 휴교조치를 내림으로서 정권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일제가 식민지 기간을 통해서 한반도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민주주의보다는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웠던 것처럼, 박정희는 중단 없는 전진이나 경제성장을 최고의 자부심으로 삼았다. 일제가 한 때 주창했던, 민관군이 아닌 군관민, 부국강병, 서민의 탈 정치화, 반공 등의 가치이념이 박정권을 통해서 재 계승되고 재등장했다. 박씨는 자신의 임기가 4년인 것도 잊은 듯 중앙집권적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다. 1961년부터 1971년 사이 남한의 G. N. P.는 연평균 8.7%가 증가했고, 수출은 연간 36%가 증가했다. 더욱이 1972년부터 1978년 사이 남한 G. N. P. 연간 평균 성장률은 10%를 웃돌았다. 1961년부터 1978년 사이 남한국민 개인 당 수입도 240%가 증가했다.

그러나 남한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동시에 급속한 인플레를 동반했다. 1962년부터 1971년 사이의 도매가격은 연 평균 12%가 증가했고, 1972년부터 1979년 사이엔 연평균 18%가 증가했다. 성장과 함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화 되어갔다. 이시기에 소득분배를 살펴보면, 1965년 최하위 30% 근로자의 전체 소득 율은 19.3%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5년엔 16.9%, 1980년엔 16.1%로 점점 떨어졌다.(김영명, 한국 현대 정치사, p.296). 결국 국가 경제는 부강해지되, 서민을 위한 부의 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대적 빈곤층만 증가해갔다는 결론이다.

흔히 1960-70년대 남한의 급속한 경제성장 기적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박씨와 함께 정주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서 정주영과 함께 꼭 거론되어야 할 인물이 전태일이다. 1960-7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농촌이 파괴되고 도시노동자의 수가 급증하면서 빈부격차와 노사대립이 심화되어갔다. 사회적 불균형이 확대되는 가운데 박정권의 편파적 노사개입이 이루어졌다. 이에 노동운동은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 민주노조 결성,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저항을 벌였다. 1970년대에 발생한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동일방직사건, YH무역농성사건 등은 노동문제에 대한 씨의 사회적 인식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며 한없는 연민과 분노를 느낀다. 그가 구한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분명히 명시해 놓았지만 현실적으로는 폐지에 불과했다. 전태일은 작업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며 여러모로 최선을 다하지만, 기업주와 박정권의 강력한 유착관계로 그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절망한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는 산 제사를 드림으로써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세상에 알리고 숨을 거둔다.

1970년대 초반 나의 큰어머니는 역촌동 앨범공장에서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일 하셨다. 그때 큰어머니는 격무로 인해 건강이 많이 악화되셨는데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하루를 쉬면 공장주가 3일분 월급을 맘대로 공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당 노동행위에 대해 노동자가 전혀 저항할 길이 없는 것이 박씨가 내세운 소위 조국 근대화였고 선진조국이었다. 의 권리 신장과 아무상관 없는 경제성장은 기득권세력과 가진 자들을 위한 축제일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근로자의 근무조건 개선이나 사회복지 프로그램 같은 소위 좌익사상에 대해 박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반공은 마치 박정권의 존재이유처럼 보이기도 했다. 박정권을 비판하는 어떠한 행동도 자생적 공산주의자' 혹은?빨갱이?로 몰렸다. 건전한 비판은 발붙일 곳이 없었고 적과 동지의 흑백논리, 이분법적 개념만이 남한사회를 휩쓸었다.

2집권기를 맞아 박정희는 놀랍게도 이승만의 전철을 똑같이 밟아 온갖 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자적으로 삼선개헌을 실시한다. 그래서 열린 1971년대선 에서 박씨는 가까스로 김대중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김대중은 도시지역에선 51.4 % 44.9 %로 박정희를 제압했다. 이때 박씨는 국민에게 어떤 배신감을 느꼈었던 것 같다. “중단 없는 전진, 경제성장, 민족중흥의 영웅인 나를 이렇게 대접할 수가가 아마도 박씨가 씨들에게 느낀 분노와 배반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박씨는 71년대선 이 끝나고 곧 국가비상사태에 이어지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비록 박씨는 이 당시 중공이 대만을 대신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 앉은 것에 국내외적인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이 당시 뉴욕타임스 사설은 박씨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외부의 관망세력, 미 국무부와 주한 미대사관은, 박씨가 선포한 위협사태의 흔적을 전혀 감지할 수 없다. 박씨가 외부위협이라고 우려한 것은 분명히 군사적 도발이 아닌 그 반대의 데탕트(국제간의 화해무드)일 것이다.”(뉴욕타임스, 19711228일자)

외신의 지적에도 아랑곳없이, 박씨는 197110월 마침내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이름아래 유신을 선포한다. 유신체제는 박씨에게 거의 무한한 권력을 부여해 줬다. 그는 이제 비상계엄을 맘대로 선포할 수 있고, 국회를 해산하고 허수아비 입법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든다.

국회해산에 뒤이어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야당정치인은 졸지에 체포, 구금되었다. 박씨는 그것도 모자라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의 3분의 1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부여한다. 그때 조선일보의 대 기자들은 이런 박씨를 제왕적 대통령' 이라고 현재의 김대중정권을 뜨겁게 비방하듯이 비판해야 마땅한데 찍 소리도 안 했다. ? 답은 간단 명료하다. 용기가 없고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박씨는?비상사태?를 연속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언론자유, 학생데모, 지식인들의 비판에 족쇄를 채웠다. 급기야 8명의 대학생들에게 사형을 내려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박씨의 죄가 이렇듯 많은데 어떻게 감히 그를 기념하는 건물을, 그것도 소중한 씨의 혈세로 짓겠다는 망상을 한 순간이라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땐 이 나라가 너무나 보기 싫고, 지겹도록 밉다. 어쨌든 유신은 박씨의 독재체제를?합법적?으로 보장해 주었고, 그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때 박씨와?영원한 2인자?가 듀엣으로 내놓은 것이 소위?충효?논리다. 국가(박씨 자신)에게 아무 말 말고 무조건 충성하라는 통치이념 인 것이다.

곧이어 1973년엔 김대중씨가 박씨 소유의 중앙정보부원들로부터 일본서 납치 당한 후, 죽을 고비를 넘겨서 중정 지하실로 끌려오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긴다. 19741월에 들어서는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된다. 국가안보와 공공의 안녕 질서가 위태롭다고 하는 논리였다. 이제 누구든 박정권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자는 15년 징역을 받게 된다. 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 징역을 받은 이들이 장준하, 김동길 등이다.

긴급조치를 이용해 박씨는 정치 토론을 불법화 시켰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논리를 알 길이 없는 듯 박씨는 어떠한 형태의 자신에 대한 도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함석헌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기도회나 평화행진을 벌임으로서 박씨의 독재적 정책에 저항했다. 마침내 1975, 박씨는 긴급조치9호를 선포했고, 이제는 박씨나 긴급조치에 대해 비판하는 것조차도 범법행위로 간주되었다. 한 인간이 비판받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하늘아래 완전한 인간이 없건만....

1978-1979년에 이르러 박씨는 나 한번 더하게 해줘하고 4선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하는 씨의 저항은 높아만 갔다. 사람이 권력에 미치게 되면 이렇게 치사되나 보다. 이제 경제성장논리에 분배를 외면 당한 씨의 분노는 박씨가 어떤 방법을 쓰건 통제가 어려워져 갔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박씨는 결국 1979년 김대중씨를 빨갱이로 조작,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국내외의 압력으로 박씨는 김씨에 대한형을 집행할 수 없게된다. 더욱이 197910월 박씨는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씨의 국회의원직을 맘대로 박탈하고 국회에서 추방한다. 이쯤대면 갈 때까지 간 것 아닌가? 부산과 마산에서 이에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나고 박씨는 다시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때 박씨의 오른팔이라던 차지철은 각하 탱크로 50만을 깔아 죽이더라도 정권을 유지하셔야 합니다라는 직언을 했다니 그리고 그런 차씨를 오른팔로 두고 나라의 비상사태를 논의하다니....할말이 없다. 결국 19791026, 박씨는 술자리에서 차씨는 화장실에서, 총을 맞고 즉사한다. 어째 한 정권의 말로가 이렇게 추잡하고 너절하게 끝나는지. 이렇게 박씨는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파쇼정권, 끝났는가?

 

그때 그 사람바람과 함께사라진 후 씨서울의 봄을 기대했다. 최규하는 19803, 687명의 정치범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때 또 다시 역사를 몇십 년 후퇴시킨 인물들이 한국현대사에 등장하는데 그 일당은 지금도 건재한 전두환, 허문도, 김용갑 등이다.

19791212일 전두환은 벌써 하극상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는 계엄사령관등 주요 장군들을 박씨 암살의 공모와 부패혐의로 체포한다. 누구든지 자신 보다 나이가 많거나 상급자인 장군들은 군에서 쫓겨났다. 최규하는 꼭두각시였고 총칼을 손에든 전두환은 이때부터 남한 권력의 숨은 실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19805월에 이르러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전국적인 데모로 한창이던 때에 그는 남한의 정권을 송두리째 찬탈했다.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시켰고, 어떠한 종류의 정치집회도 금지시켰다. 정치인 및 재야 인사는 졸지에 교도소에 갇히거나 연금 되었고 남한의 모든 대학은 폐교되었다. 전두환은 가장 큰 죄악은 첫째가 무차별 광주시민을 학살한 19805.18이고 둘째가 삼청교육대이다. 1980813일에 전국 군부대에 창설한 삼청교육대에서는 무차별 폭력아래 혹독한 고통을 당하다가 그 현장에서 54명이 목숨을 잃었고, 397명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2,768명은 평생 불구자가 되었고 4명은 실종되었다. 나는 이러한 전두환의 명예와 품위를 폄하 하지 않기 위해(김용갑의 표현)” 왜 내가 내는 귀중한 세금과 씨의 혈세가 지금도 쓰여져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전씨에 대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철저한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은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적도 없다. 그는 천하보다도 귀하고 우주보다도 소중하다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총칼로 앗아갔다. 그런 이에게 국민의 정부가 막대한 연금과 경호원을 국가의 비용으로 지불하는 것은 씨의 민주정신을 말살하는 것이고 국가예산을 낭비하는 것이다. 국민화합, 지역간 화합을 위해서라고? 전씨에게 그런 예우를 해줘서 오늘날 얼마나 지역간 화합이 이루어 졌는가? 지금 영호남 지역감정, TK, PK간 지역감정이 사라졌는가? 나는 그 점에선 김대중 대통령이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정의가 강물처럼흐를 때 국민화합, 지역간 화합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런 확신이 있는 지도자가 그립다.

1980년 봄 전씨는 김동길, 안병무, 김용준, 이문영을 포함한 86명의 대학교수, 8,000명의 공무원, 송건호, 천관우를 포함한 711명의 언론인, 200명의 행정관리를 해직시켰다. 그리고 허문도의 공헌으로 <의 소리>, <현존>을 포함한 172개의 잡지가 폐간되었고, 617개의 출판사를 닫아버렸다.

19808월 전씨는 스스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는 곧이어 19809월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하면 된다던 전씨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이일은 수행하지 못하고 만다. 대신, 허문도의 언론기본법을 동원해 언론대학살을 실시했다. 이번 한나라 당에서 신보도 지침을 만들어 언론사에 보낸 것은 1980보도지침의 악몽을 우리에게 되살린다.

지금 한나라 당 유력한 대통령 후보자 이회창은 1981년부터 대법원 판사에 올라 민주인사를 탄압하는 전두환 파쇼정권의 시녀 노릇을 했다. 사상연구회 회장 박재순 박사는 1980년대 초 당시 이회창 판사에 의해 2년 반 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 생활을 했다. 1982년에는 또한 현<당대비평> 편집주간인 문부식씨가 역시 이회창 법관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많은 민주인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공로인지 이회창은 1986년 전두환으로부터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나는 그런 이회창이 왜 대쪽같은인물로 남한사회에 인식, 평가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 할 수 있다. 그것은 대중을 상대로 한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의 조작, 세뇌의 결과다. 이런 면에서 남한 보수언론의 주필은 성공했다. 역시 세속도시에선 빛의 아들들보다 어둠의 아들들이 더욱 영악하고 꾀가 많은 듯이 보인다.

전두환정권하에서 남한경제는 급속히 성장했다. 특히 조선업, 기계류 생산업, 소비자를 위한 전자제품 업종에선 세계의 주목을 받는 국가로 등장했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수입은 55%가 늘었는데 연평균 증가율은 7.5% 이었다. 그러나 박정권 아래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배가 결여된 경제성장은 재벌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고, 그런 만큼 대부분의 근로자와 서민은 빈곤의 악순환을 겪고있었다. 따라서 경제성장과 더불어 씨의 분노와 불만도 동시에 증가했다. 결국 도시의 중산층뿐 아니라 사업가, 가정주부, 사무직 근로자까지도 정치-경제적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군사정권타도를 부르짖었다.

1981년 레이건 정권과 1982년 일본의 나카소네 정권은 전두환이 그 권력을 강화해 가는데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줬다. 전두환은 레이건이 집권 후 처음으로 초대한 외국 지도자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레이건은 광주에서 씨을 학살한 전두환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특별한 동맹과 우정은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강건하오.” 계속해서 1984년 전두환은 한반도의 지도자로선 최초로 일본을 국빈자격으로 방문한다.

1984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대학생 몇십만 명이 참여하는 연간 300여건의 데모가 일어난다. 보통 시민뿐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소위 사무직 근로자)도 계속되는 정치적 압박과 전씨 일가의 부패에 대항해 일어났다.

전두환은 남한을 자신의 구멍가게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그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새우같이 작은 기업도 고래같이 큰 기업을 삼킬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원하면 하늘을 나는 새뿐 아니라 대기업도 공중분해 시킬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했다. 국제상사의 부도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전두환은 확실히 법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존재였다. 금전적 부패는 전두환 뿐 아니라 그의 아내 이순자, 처남, 동생, 장인등 모든 일가족이 나라를 두루말이 휴지 말 듯이 훌훌 말아먹었다. 이 당시 이순자는 아이들을 대표하는 새싹회 회장, 전경환은 젊은이를 대표하는 새마을 본부 회장. 그리고 전두환 장인 이규동은 대한 노인회 회장직을 맡았다. 결국 전씨 일가는 삼대에 걸쳐 나라전체를 주먹밥 주무르듯이 주물렀다. 이제 민주주의와 자유를 갈망하는 참다못한 씨의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치개혁을 외치는 씨의 소리는 점점 거세져 갔다.

시청 앞에서 대중집회를 계획했던 270명의 야당 정치인은 연금 되었고, 야당당사는 장세동이 지시하는 소위 용팔이파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다. 이런 와중인 1987114, 서울대학생 박종철군은 경찰의 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해 413일 전두환은 이어서 씨이 기대하는 대통령 직선제는 없다고 선언했다. 이때부터 근로자는 파업을 일으켰고 전두환을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어났다.

몇백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두환 사퇴를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대학교수와 변호사들은 전두환 독재정책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연일 발표했다. 이때 전두환은 1980년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군대를 동원해서 씨의 불만을 진압할 구상을 한다. 그러나 1980년 이후부터 남한사회에 팽배한 반미감정의 확산과 국제 사회의 여론을 두려워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전두환의 계엄군동원계획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1987629,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양심수석방, 언론검열 완화 등을 발표한다. 결국 전두환은 무력진압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국인들에게 1987년은 분명히 정치적 분수령을 그은 해였다. 그해 1216일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된다. 두김씨의 분열을 힘입고 노태우는 35.9%의 지지율을 확보하며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때 두김씨가 씨과 더불어 같이 살기를 생각했더라면, 그래서 야당의 힘을 하나로 모았더라면, 남한의 민주화는 오늘날 더욱 급속히 진전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두김씨는 역사에 큰 빚을 졌다.

노태우는 비록 전두환과 더불어 남한사회에 파쇼정권을 소개한 장본인이지만. 그의 집권은 직선제 대통령제라는 여과기를 거쳤기에 최소한 그의 정권에 합법성이라는 무게를 더해주었다. 이제 역사가는 어쩔 수 없이 박정희, 전두환과는 다르게 노태우를 독재자로 표현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는 문민정부국민의 정부도 아니었다. 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의 과도기적 정권으로 노태우정권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5. 되돌아보며그리고 함석헌의 같이 살기 운동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마음속에도 악이 도사리고 있고, 아무리 잔인한 악인의 가슴속에도 선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있다. 노태우, 김영삼을 거쳐 현재의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답답하고 더디지만 남한의 민주화는 서서히 이루어져 가고 있다. 남한의 민주화 뿐 아니라 남북관계의 개선도 결국 남한에 (비록 작고 보잘 것은 없지만) 민주주의의 나무가 꾸준히 자라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김영삼은 물론이고 김대중도 수구 보수세력의 힘을 입고 정권을 창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회의 곳곳에, 특별히 정계, 학계, 언론계에 과거 군사독재의 병든 뿌리가 깊이 박혀있다. 싫건 좋건 우리는 모두 다 함께 살아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만수산 드렁칡이 이렇게 저렇게 얽혀지듯이, 진보와 보수, 정의와 불의, 좌와 우가 얽혀서 백년까지 함께 누려야 할지도 모르는 운명이 오늘 한반도를 살아가는 씨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론 내 친구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을 사랑하고 내 가족을 평생의 불구자로 만든 이들을 용서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이대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상대가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내가 용서를 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보다는 무력한 약자나 용기 없는 겁쟁이의 자기합리화인 경우가 많다.

19951124일 김영삼은 ‘5.18 특별법제정 방침을 발표했다. 그후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는 광경에 박수를 치는 씨들은 그것을 진두 지휘했던 당시 서울 지검장 최환 이란 인물이 어떤 친구인지 모르는 이가 많다. 최환은 19805광주민주화운동직후 전두환에 의해 만들어진 국보위 비상대책위원회 내무분과위원이었다.

‘5.18 특별법제정을 천명한 김영삼이 그 법의 제정 기초위원장을 맡긴이는 1980년대 5공 헌법의 선진성을 역설했던 민정계의원 현경대였다. 그뿐인가. 1995년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5공 수사에 일조 했던 최병국은 1982년 부산지검 공안검사로 문부식씨가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으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을 때, “전두환 정권은 군사 파쇼다라고 말하는 문씨에게, “너는 왜 파쇼를 싫어하니? 나는 파쇼가 좋은데하고 신앙고백을 하던 자다. 이들은 다 옛 상전을 물어뜯는 철저한 기회주의자들이고 영리한 사냥개들이다.(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삼인, 2002, p.18.) 이것이 감영삼 정권의 한계이고 한국인의 비극이다. 최환, 현경대, 최병국은 아직까지도 용서를 빌지 않았다. 용서가 뭔가. 그들은 아직도 당당하게잘먹고 잘살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같이 살기 운동을 펼쳐야 하는가?

김대중정권 역시 이런 모순과 부조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99518일 광주 망월동 신묘역에서 열린 5.18 광주민주화운동 19주년 기념식에는 대통령 김대중을 대신하여 국무총리 김종필이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념식장 앞 귀빈석에 앉아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유력 인사중에는 3, 5공 출신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촌극이 가능할 수 있을까? 중앙정보부를 만들어서 수많은 민주인사들에게 고문을 가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장본인이고, 전두환 파쇼 정권의 뿌리가 되는 그이가 어떤 낯으로 누구 앞에서 무슨 추도사를 읽는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광주의 가해자인 그들이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그날 기념식의 귀빈으로 앉아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광주시민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차라리 모독하는 행위였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아들은 대통령 아들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이회창씨가 이 땅의 대통령이 되어서 한반도에 남북전쟁이 일어나면 그이는 그 아들을 어떻게 할까? 내 생각에는 안전한미국으로 빼돌려서 편안하게 인생을 즐기게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떠버릴 수 없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필라델피아 이야기>등으로 유명한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스튜어트는 2차 대전중 공군에 지원했다. 그러나 몸무게 미달로 병역을 거부당하자 그는 주머니에 돌을 넣고 몸무게를 늘려서 군에 입대했다.(이때 군대에 가기 위해 군의관에게 뇌물을 주었다). 그렇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목숨을 걸고 포격기 조종사로서 여러 번 독일 하늘을 비행했다. 그의 아들은 또한 그가 힘만 쓰면충분히 빠질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했다(여기서 베트남에 미국 참전의 정당성에 관한 논란은 일단 제쳐두자).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이씨는 어떤가? 단순한 영화배우도 아니고 한나라의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이 병풍이 웬 말인가? 한번은 그가 조국의 국방이 걱정된다고 직업군인들에게 일침을 놓았다가, “그렇게 나라의 국방을 생각하는 사람이 왜 자신의 아들은 군대에 안 보냈는가?” 라는 빈축을 현역군인으로부터 들었다. 이런 사람이 지금 21세기 초두에 가장 유력한 이 땅의 대통령 후보란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리고 이 민족이 한심한 생각마저 든다. 왜 그렇게 정치, 역사, 사회의식이 없는 민족일까?

함석헌이 오래 전에 주창한 것처럼, 우리는 악인이나 선인이나, 싫은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동등하게 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예수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살기 운동을 벌여야한다. “각 사람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하느님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잘 알듯이, 노예의 복종은 짐승의 길듦이지 인격의 순종이 아니다. 순종과 용서, 포용은 자유인의 덕목이지 노예들의 덕목이 아니다. 사랑을 내세우기 이전에 정의를 생각해 봐야하고, 자유인의 겸손과 노예의 비굴함을 뚜렷이 구분해야한다.

어떤 이들은 노무현씨는 대통령의 자질이 안 갖추어져 있다고 그런 다. 그러면 전두환, 박정희는 자질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대통령이 되었나? 이 땅에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이들이 누구인가? I. M. F.의 뿌리가 어디서 왔나? 이 땅이 오늘 이렇게 인간성, 도덕성이 상실된 근원은 그들이 내세운 경제제일주의 물질만능주의의 가치관이 쓸고 간 흉터가 아닌가? 나는 이 땅의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민감한 도덕성, 예민한 양심, 불붙는 정의감이지 화려한 학력이나 빛나는 인맥, 뛰어난 경제복구 능력이 아니라고 믿는다. 뛰어난 경제복구 능력은 스탈린이나 히틀러에게 배우면 된다. 그리고 그 뛰어난 경제능력의 가치를 도덕성보다 앞세운 스탈린과 히틀러 정권의 비참하고 한심한 종말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지 않는가?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뛰는 감격을 지닌 사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할 줄 아는 사람, 한산섬 달 밝은 밤을 거닐며 조국을 위해 깊은 시름을 해 본 사람을 이 땅에 지도자로 주소서!

결국 인간사의 결론은 종교적 일 수밖에 없다. 섹스, 마약, 권력, 명예, 다른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거나 만족하게 할 수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궁극적으로 종교적 동물이다. 역대정권의 발자취를 뒤돌아보는 것도 결국은 과거를 통해서 현재의 선 자리를 올바로 진단하고 우리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바를 모색하는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은 명쾌하다. ‘강남공화국’, ‘독재공화국이 아니고?민주공화국?의 길이 우리 앞에 있다. “나 만 잘살기가 아닌 남과 북, 영남과 호남이 모두 다 같이 살기로의 길을 향해 이제라도 일어나야 한다. 그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대가 있다. 너희 중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와 님은 함께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하신다. 이념과 사상, 지역감정을 넘어서 같이 사는 길, 더불어 사는 길만이 우리 앞에 있다.(함석헌 평전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