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
함석헌-신의 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사람은 누구나 특정한 역사적 시간대에 태어난다. 그러면서 그는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를 동경한다. 인간에게 영원의 세계와 역사 현실의 세계는 둘 다 필요 불가결한 세계다.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건에 온몸으로 참여하는 일과 종교적 신앙심을 영적으로 성숙시켜 나가는 일을 결합한 존재, 그가 함석헌이 생각한 참된 종교인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에게 성속(聖俗)은 하나였고,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간디는 인도를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헌신했지만, 간디의 아들은 그 와중에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그런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 간디는 '민족의 영웅'으로 보이지 않았다.“당신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그것은 어머니 덕인줄이나 아시오”라는 것이 아버지 간디에 대한 아들의 비판이었다. 넬슨 만델라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에블린은 만델라가 자신이나 자녀들 아닌 어떤 것에 더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만델라를 영원히 떠났다.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신천옹(信天翁)이라 이름한 이유는 이 놈이 날기는 잘해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를 잡을 줄은 몰라서 갈매기란 놈이 잡아먹다가 이따금 흘리는 것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일본 사람은 그 새를 바보새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바보새란 이름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사는 꼴도 바보새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밥벌이할 줄은 몰라 여든이 다 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그 아니 바보새입니까?"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 그러나 사회가 억압과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모든 가장들이 자신의 안녕이나 성공, 가족의 이익을 앞세운다면 사회의 혼란과 억압을 바로잡아 그들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일은 언제까지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외딴 마을에 불이 났을 때 자신의 가족을 피신시키는 데만 열중한다면 결국 모든 가족이 피해를 입는 결과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과 마찬가지 이치다. 넬슨 만델라는 모든 인간에게 인생의 두 가지 의무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가족이나 부모에 대한 의무이고 또다른 하나는 조국이나 인류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다. 안정되었거나 사회 정의가 자리잡은 사회에서 각 개인은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이런 의무를 적절히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권이 묵살당하고 독재와 거짓이 판을 치는 나라나 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다. 부정부패나 불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조국이나 인류 공동체에 대해 올바른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개인은 권력에 의해 처벌받거나 소외되기 일쑤다. 그럼으로써 그는 불가피하게 가족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긴 삶을 강요받게 된다. 나치 정권 아래서 죽어 간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나 과학자 알버트 아인쉬타인의 경우가 적절한 예일 것이다. 넬슨 만델라가 그랬듯이, 함석헌은 처음부터 가족의 안녕을 등지고 공공의 안녕을 위해 일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의와 독재로 점철된 20세기 한반도에서 씨알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곧 자식과 남편,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귀중한 기회를 가차없이 빼앗기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그가 살았던 시대에 한정시켜 평가한다면, 예수 역시 실패자, 패배자라고 할 수 있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은 한 식민지 청년 지식인의 최후였을 뿐이다. 예수가 죽은 다음 제자들은 두려움에 질려 모두 도망갔고, 가장 가깝다던 반석 같은 제자 베드로는 스승 예수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때 예수는 얼마나 참담한 실패자였던 것이랴!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당대의 세속적 실패는 곧 영속적인 진리의 승리였다. 박정희는 "인간사에는 경제가 정치나 문화보다 우선한다"고 말했다. 말할 것 없이 인간은 우선 먹어야 사는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박정희의 잘못은 무슨 방법을 써서든 먹고사는 일만 해결해 주면 독재가 정당화된다고 생각한 데 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생존 경쟁에 뛰어들 자유만을 인정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가능성을 제 마음대로 제한하였다. 그 결과는 외형적인 경제 성장으로 나타났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마음과 정신은 병들었다. 돈과 지위, 권력, 그밖에 자기가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남을 짓밟을 수 있는 인간이 한국을 이끄는 인간형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이다. 박정희와 그를 따르고 숭배하는 이들은 한국 사회를 전쟁 후의 궁핍에서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가차없이 관철되는 또다른 전쟁터였다. 공자와 맹자는 모두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악하며 이 악한 세상에서 인간의 선한 본성은 수많은 유혹에 끌려 부패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면서 세상에 가득 찬 유혹을 경고한다. 장자는 세상에 선한 이는 드문 반면 악인은 도처에 넘쳐 흐른다고 탄식한다. 현대의 철학자 라인홀트 니버는 인간 각자는 도덕적인데 이러한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는 부도덕한 사회라고 지적한다.. 이런 조건에서 어쩌면 실현 불가능한 도덕적 사회를 꿈꾼 함석헌은 현실주의자라기보다 이상주의자였다.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상과 원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며,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어 간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현실 세계의 달콤한 유혹이나 외부의 혹독한 조건에 관계없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이상과 꿈, 그리고 원칙을 지킨다. 함석헌은 그런 소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상주의자, 그것이 내가 보는 함석헌이다. 함석헌의 이상주의는 어쩌면 밤하늘의 북극성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북극성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이기에 가까이 있는 언덕보다 더 결정적인 표준, 더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북극성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북극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인간에게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인류는 목적보다는 수단과 과정이 존중받는 사회, 권력자나 승리자가 아니라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영원히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노력마저 멈출 수는 없다. 그 노력들이 쌓이는 만큼 바람직한 삶의 영역은 한 뼘이라도 넓어지고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1945년의 해방 이후 한반도의 역사는 이승만, 박정희, 김일성의 시대였고 함석헌의 시대가 아니었다. 훗날의 역사가가 이 시대 역사의 한 장을 '함석헌의 시대'라고 명명할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가 인류에게 보여 준 것처럼 인간의 양심이나 도덕적 영향은 정치적 영향력보다 가치 있고 오래 지속한다. 인간 역사를 통해 오직 극소수의 인물만이 양심적인 방법으로 민족과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함석헌은 그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선한 이에게, 나는 선하게 대한다. 선하지 않은 이에게, 나는 역시 선하게 대한다." "하나님은 해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신다." 이 논문을 위해 필자와의 단독 인터뷰에 응해준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나다 순: 신분은 면담할 당시의 것이며 면담은 1992년, 1993년, 1998년에 행해짐): 계훈제(재야 인권운동가), 김경재(한신대 신학과 교수), 김동길(전 연세대 부총장, 국회의원), 김용준(고려대 화학과 교수), 노명식(한림대 사학과 교수), 송건호(한겨레신문사 대표), 안병무(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민중신학자), 이태영(한국 가정법률상담소 소장), 장기려(부산복음병원 명예원장), 함우용(농부, 함석헌의 차남)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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