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스스로 하는 얼(自由精神)1)

와단 2021. 1. 13. 18:16

스스로 하는 얼(自由精神)1)

 

-삶은 꿈틀거림이다, 움직임이다. 자람이다. 올라감이다.

 

나는 올라간다. 올라만 가련다.

한배메 꼭대기 솟아 끊어지고

하늘 못 깊은 가슴 쪼개져 열린

그 언저리엘 설 때까지

 

이 멧기슭에 늦은 들국화가 아무리 짙은 향기로 웃기로선들

저 잿빼기에 늙은 소나무가 어떻게 소스라친 청으로 울기로선들

눈에 어찌 아니 덮인들 말이냐

얼음에 아무렴 아니 붙는단 말이냐?

 

나는 올라만 가련다. 올라가고 보련다.

흰 눈, 눈이 감기는 무한의 꽃으로 피고,

곧 얼음(고드름) 얼이 빠지는 영원의 향불로 타는

저 불켠산(不咸山)엘 올라가고 보련다.

 

내 없어진 불길, 불타 사라진 빛님

성 없어진 나라, 나라 다시 않는 누림

거길 가 살아야겠기에, 나무야, 꽃아,

나는 너를 꺾어 안고 올라가고야 말련다.

 

나는 올라간다. 오르거나 못 오르거나

그저 올라만 가련다. 오르다, 오르다 말련다.

한때 그 못가에 놀다가 가는 저 스완처럼 나는,

나도 거기서 날아가 버리고 말련다.

 

나는 별과 더불어 그 물에 멱감았기로서 거기 어찌 잠겨질 나라드냐?

더구나 그 밑을 다 보려 주기 전에 쉬이 얼어붙고 마는

땅에 박힌 못 구멍인 그 마음임에서일까 보냐?

 

나는 날아간다. 날아가 버리고 만다.

영원히는 못 가는 흰 옷 탐내는 그 거품 이빨에 맡겨버리고

슬픈 노래만 남아 부르다, 부르다.

사라지지 않는 울림으로만 사라지고 말련다.

 

안녕!

안녕?

 

나는 올라간다. 올라만 가련다

삶이 뭐냐? 꿈틀거림이다. 움직임이다. 자람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해서 올라감이라고 했다.

모든 물건이 다 움직이고 있다. 돌은 굴고, 물은 흐르고, 바람은 불고, 불은 붙고. 움직임이 만물의 근본 성격이다.

 

움직여서는 어디로 가나? 위로 올라간다. 위가 어딘가? 하늘이다. 하늘이 뭔가? 높은 것이요, 큰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무한한 것이다. 있음에 맞서는 것, 그 바탕이 되는 것, 그 근본이 되고 그 까닭이 되는 것이 하늘이다. 정신이다 뜻이다.

모든 물건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하늘로 올라가려한다. 정신에서 나왔고, 정신에서 나왔음으로 정신으로 돌아가려 한다. 뜻 있어서 됐으므로 뜻을 찾는다.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다. 제 스스로다. 스스로 하는 것이 정신(精神)이요, 뜻이다. 뜻에 나와서 뜻으로 가는 것이 움직임이요, 그렇게 되는 것이 자유(自由).

생물, 무생물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자유하려 한다. 뜻대로 하려고 한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말이다.

지구가 공전자전을 하는 것은 태양의 끄는 힘에서 벗어나 무한의 공간을 자유로 달리고 싶어 하는 운동 때문이요, 바위가 부서져 흙이 되고, 흙이 풀어져 원소가 되며, 모든 원소가 분해가 되고 방사가 되어 에너지로 되려는 것은 그 지음을 받은 근본 자유로 돌아가고 싶어서다.

 

있음이란 곧 정신이 시간공간 속에 갇힌 것이다. 운동이 맺힌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근본으로 해방되어 돌아가려 한다. 푸른 잎사귀붉은 꽃아름다운 향기는 하늘로 올라가는 땅의 기도 아닌가? 바람소리벌레 울음새 노래는 정신으로 해방되는 물질이 올리는 찬송이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거기 스스로 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들으면, 우리 마음이 시원하고 기쁜 것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더 완전히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라가자는 것이다.

 

한배에 꼭대기 솟아 끊어지고

하늘 못 깊은 가슴 쪼개져 열린

그 언저리엘 설 때까지

 

사람의 모든 활동의 구경(究竟) 목적은 자유 하는 정신에 이르자는 것이지만, 그 모든 운동이 자각된 목적을 가지고 종합된 조직 밑에 되어 가는 것을 나라라고 한다. 개인이 나[自我]를 가졌듯이,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의 덩어리로 나를 가진다. 그것이 나라다. 나라는 같은 말에서 나온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라는 땅위에서 아무리 커도 그것이 곧 완전한 정신일 수는 없다. 그래서 한배메 곧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심볼이지만 그 산이 아무리 높아도 꼭대기에 끝이 있듯이 우리나라도 절대 거룩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내가 나라를 위하지만 나라가 나의 구경의 이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이 늘 그 나라의 뿌리를 하늘에다 붙이려 애썼다. 하늘 명령을 받았노라하고 하늘의 대표자 혹은 아들이노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하늘못[天池]이 있다. 왜 천지라 했나? 거기 하늘이 내려와 비치기 때문이다. 바로 하늘 그것은 아니지만 하늘 모습이 내려와 비치어 있다. 거기서 하늘을 볼 수 있다. 사람의 나라가 다 되는 곳에 하늘나라 그림자를 볼 수 있다. 거기서 보는 거룩하고 신비한 뜻을 땅에 펴 보자는 것이 나라다. 그러므로 단군이 나라를 세울 때 그것을 곧 개천(開天) 하늘이 열린 것이라고 했다. 천지의 캄캄한 깊음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속에는 나라의 이상이 떠올랐다. 내가 올라간다면 적어도 그 언저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본래 선비의 나라였다. 단군을 선인(仙人)이라 했다. 책에 적혀있는 이야기는 물론 신화요, 전설이겠지만 그것은 요사이 소설을 쓰고 동화를 짓듯이 지어진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민족적 신앙이 결정되어서 된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그 옛날 우리 조상의 생각을 알 수 있다.

 

거기 비춰보면 그들은 땅위의 나라를 절대적인 것으로 알지 않았다. 단군이 나라를 세울 뜻을 둔 것을 하늘에서는 한층 떨어진 생각으로 말했고,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이상으로 하기는 하면서도 마지막엔 나라를 버리고 도로 선비로 돌아갔다고 했다. 선비란 곧 죽음이 없는 도를 닦는 사람이다. 곧 자유하는 정신에서 이르기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있어서 정치는 한 개 중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나도 그 지경을 더듬고 싶다는 말이다

 

이 멧기슭에 늦은 들국화가 아무리 짙은 향기로 웃기로선들

저 잿빼기에 늙은 소나무가 어떻게 소스라친 청으로 울기로선들

 

사람의 활동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둘로 요약할 수 있다. 권력을 가지려는 요구. 들국화로 사랑을 표시했고 소나무로는 권력을 표시했다. 하나는 웃고 하나는 운다. 사람과 권력은 서로 반대된다. 그러나 사람은 이 두 가지 요구를 가지고 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면서도 사랑을 아니 하고는 못 견디는 것이 사람이요. 그러면서도 또 자기중심으로 권력을 가지고 남을 휘두르고 남을 다 나를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보려는 것이 사람이다. 이 두 모순이 되면서도 하나를 이루고 그 어느 것도 없을 수 없는 강한 요구, 사람 사람마다의 이 강렬한 요구로부터 나오는 가지가지의 복잡한 활동이 얽힌 것이 인간사회란 것이요, 그 사회에 낌새를 주어서 너와 나의 살림을 고르게 해보자는 것이 제도요, 법이요, 정치다.

그러나 그것이 없을 수는 없지만 나는 거기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

 

눈에 어찌 아니 덮인단 말이냐?

얼음에 아무렴 아니 붙는단 말이냐?

 

다른 꽃이 다 시들어도 늦도록 서리와 싸우는 들국화는 확실히 고상한 것이지만 그것은 역시 함정이 있다. 눈이 오는 겨울이면 그 아름다운 빛과 향기도 덮여 버려지지 그냥 있지 못한다.

 

다른 나무가 다 잎이 떨어지고 추위에 항복해 버리는데 사철 푸른빛을 지켜 늙도록 버티는 소나무는 굳세다면 굳세고 장하다면 장하지만 그것도 함정이 있다. 얼어버리는 날이 온다.

 

[]과 눈[]은 같은 말이다. 눈에 덮인다는 것은 물론 흰 눈에 덮여버리는 것이지만 또 눈 제 스스로 덮어버린다는 뜻도 있다.

 

얼음과 얼도 같은 말로 썼다. 나뭇잎이 얼어붙는 것은 물론 얼음이지만 또 얼 곧 정신 그 자리 속에 얼어서 활동을 잃어버리는 결함이 들어있다.

 

꽃도 나무도 다 상대적이듯이 우리가 이 사회에서 하는 사랑도 권력의 활동도 다 상대적이다. 눈이 눈을 가릴 것 없이 제 스스로 덮이어 버리고, 얼이 얼음을 기다릴 것 없이 제 스스로 굳어 버리는 약점을 속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참일 수 있느냐? 이 세상에 사랑이 있으나 참 사랑은 못되고 힘이 있으나 참 힘은 못된다. 그것으로 나는 자유 하는 지경에 갈 수는 없다. 세상 나라가 나의 마지막 나라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멧기슭이나 잿빼기 같은 이 사회의 어떤 자리에는 머물 수 없단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 버린 더 높은, 적어도 하늘 모습이 내려와 비치는 천지의 언저리 같은 높은 지경을 향해 올라가고야 만다.

 

그러나 천지가 아무리 거룩하고 신비로와도 역시 땅위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볼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올라만 가련다. 올라가고 보련다.

흰 눈, 눈이 감기는 무한의 꽃으로 피고

곧 얼음(고드름) 얼이 빠지는 영원의 향불로 타는

저 불켠산(不咸山)엘 올라가고 보련다.

 

이것저것을 꺼리고 생각할 수 없고 우선 올라가고 보련다. 올라가려면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꽃을 버리게 되지만 올라가면 꽃 아닌 꽃이 있다. 꽃을 꺾어버리는 눈 그 자체가 꽃이 된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꽃은 아니다. 그러므로 눈이 감겨버린다. 조그만 빛을 눈으로 보지 정말 참 빛은 눈으로 보지 못한다. 그 빛은 도리어 눈을 감게 하도록 강한 아름다움이다. 눈이 부시다는 것이다.

 

산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골짜기에 있던 아까운 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올라가면 향 아닌 향이 타고 있다. 산위에 올라가면 고드름밖에 없지만 그 고드름이 곧 향으로 된다. 그것은 한 때 피다가 얼음에 얼어버리는 그런 따위 약한 것이 아니요, 영원한 향이다. 그것은 맡으면 코에 향기롭다할 정도의 것이 아니라 아주 심하여 얼이 빠질 지경의 것이다.

 

이것은 다 물건을 보지만 거기 붙어 있지 않고 그 나타나는 뜻을 보는 세계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한배메나 백두산대로 있지 않고 불켠산(不咸山)이 되어 버린다. 불켠산은 백두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름은 같으면서 뜻은 다른 것을 나타낸다.

 

내 없어진 불길, 불타 사라진 빛님

성 없어진 나라, 나라 다시 않는 누림엘

 

나는 국경선 없는 날, 다스리지 않는 나라에 살고 싶다.

땅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사회에 사랑이 있으나 그 사랑은 참 사랑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사람사람 사이에 힘의 관계가 있으나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영원한 힘의 표시밖에 되지 못한다.

 

그 입장에 서서볼 때, 백두산 천지 가에 서나, 그 바위 그 못을 그대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원한 것의 그림자로 보고 서게 될 때, 거기는 불 아닌 불이 붙는 것을 본다. 백두산이 이미 죽은 화산이므로 눈앞의 불은 뵈지 않으나 그와 마찬가지로 뵈지 않는 정신의 불길을 본다. 그것은 연기 없는 불길이다. 맑은 불길이다. 땅위의 모든 불은 다 연기가 나는 불, 맑은 불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참 불은 연기 같은 섞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사랑의 불길을 맑지 못하게 만드는 내같은 것은 무엇인가? 나다. 자기란 것이다. 내 것, 내 사랑하는 생각은 불에 내처럼 없을 수 없는 것이나, 그것 때문에 사랑이 흐려진다. 나라는 것이 빠져야 참 사랑이다. 연기만 아니라 정말 강한 불은 불길조차도 없고 빛뿐이다. 참 사랑은 나라는 생각이 빠질 뿐 아니라 사랑조차도 아닌 사랑이다. 참 사랑은 사랑 아니 한다. 사랑하는 것은 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빛님이다. 비치는 것뿐인 참 빛, 또 빛님, 빛의 님, 광명의 님이다.

 

백두산은 단군이 나라를 하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 그 나라는 없다. 그와 같이 현실을 영원한 것에 대한 심볼로 보는 자리에 설 때 나라는 이미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성 없는 나라다. 모든 나라는 국경선이 있고 방비를 하는 나라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나라다. 참 나라는 성() 없는, 국경선 없는, 방비가 필요치 않는 나라다.

 

국경이 다시없을 뿐 아니라 나라라는 생각조차도 없는 나라다. 참 나라가 이미 망그러졌으므로 법으로 다스리고 무기로 지키는 나라가 생긴다. 이상에 가까운 나라일수록 적게 다스리고 약하게 방비한다. 법이 강하고 벌이 엄하며 외국 사람을 금하고 배척하는 나라일수록 약한 나라다.

 

나는 국경선 없는 나라, 다스리지 않는 나라에 살고 싶다. 거기는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는 나라다. 그것은 또 나라라기보다는 누리곧 우주다. 하나인 세계다.

 

그러나 나라에 엄한 법을 만들고 어마어마한 국경선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 나다. 자아란 것이다. 그러므로 참 자유의 나라가 되려면 나의 주장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 없는 나라라고 했다. 성은 아무개, 아무개 하는 이름을 가리킨 것이다. () 없어진 나, 그것은 참 나다. 참 나는 다시 라는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라 다시 않는 누리, ‘이자 곧 우주요, 우주이자 곧 나인 깨달음의 자리다.

 

거길 가 살아야겠기에 나무야, 꽃아,

나는 너를 꺾어 안고 올라가고야 말련다.

 

그 절대의 정신의 나라에 가서 살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산다는 것은 곧 생명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께 돌아감이다. 우리 정신이 돌아감이다. 정신은 말씀이다. 무슨 뜻을 말하는 것이 정신이다. 삶은 곧 마주 말함이다. 대화다. 그러므로 삶의 목적은 살음, 곧 아룀에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울며 웃으며 사랑이야 힘이야 하며, 너다 나다하며 떠드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가서 여기서 보고 들은 것, 깨달은 것, 얻은 것을 살라 보고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나무야, 꽃아, 사랑아, 힘아, 친구야, 원수야, 부득이 너를 꺾어 안고 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랑과 힘에 내가 영원히 매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참 정신의 자유 하는 지경에 가려면 부득이 그것을 꺾는 수밖에 없다. 꺾는 것은 살리면서도 죽임이요, 버리면서도 가짐이다. 이 땅에 있는 꽃은 영원한 꽃이 아니므로 내가 늘 그것을 지킬 수는 없다. 꽃을 영원히 살리려면 그 아름다운 순간에 꺾는 수밖에 없다. 꺾음으로써 꽃은 겉으로 물질적으론 죽고, 속으로 정신적으론 산다. 내가 가지고만 있어 가지고는 참 가지지 못한다. 능히 버려서만 그것을 참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꺾어 안기 위해서는 꺾어 버려야 한다. 집착 아니 하는 것이 사랑이요, 강제 아니 하는 것이 힘이다.

 

올라가려면, 자유하려면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래도 오히려 또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자유 그것에 얽매이는 일이다. 정신을 찾지만, 자유 자유하고 자유를 잊지 못하는 한 참 자유는 없다. 아마 모든 폭군 중에 자유보다 더한 폭군은 없을 것이다. 다른데 미친 것은 다 깨어나는 날이 올 수 있어도 믿음에 미친 것은 깰 수가 없고, 다른데 종이 된 것은 다 면할 수 있어도 진리의 종이 되면 면할 날이 없다. 사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욕심으로 대하면 사탄이다. 그래서

 

나는 올라가련다. 오르거나 못 오르거나

그저 올라만 가련다. 오르다, 오르다 말련다.

 

라고 했다. 결과 생각하지 않는다. 올라가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올라갈 뿐이다. 사랑도 믿음도 대상이 없다. 목적이 붙은 사랑이나 믿음은 참 것이 아니다. 말할 수 없이 작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활동의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물건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저 믿을 뿐이다. 무엇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니요, 누구를 믿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 믿는다.

 

그러므로 불켠산 꼭대기, 내가 없고 현상 속에 뜻을 읽는 그 자리에서도 거기 늘 붙어서는 못쓴다. 그것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자유다. 그래서 오르다, 오르다 만다는 것이다

 

 

한 때 그 못에 놀다가 가는 저 스완처럼 나는

나도 거기서 날아가 버리고 말련다.

 

정신주의, 상징주의, 신비주의에 머물러 있어서는 못쓴다. 어디까지 노는 심정이어야 한다. 장자의 말에 마음이 하늘에 노닌다는 말이 있다. 이 논다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모르고는 자유는 없다. 그것을 표시하는 것이 스완이다.

 

놂에 대립하는 것은 일이다. 사람들은 일이 귀하고 중요한 줄 알지만 일만 알고 놀 줄 모르면 종이다. 생명의 근본 모습은 놂이다. 생명운동이 제대로 되는 것이 놂이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는 놂을 알뿐이지 일을 모른다. 그에게는 놂의 곧 일이요, 일이 곧 놂이다. 그러므로 그는 늘 웃고 즐거워한다. 일은 생명의 일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놂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잘못된 것을 풀려고 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일이다. 큰일 났다는 것은 그것이다. 일의 목적은 다시 놂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문명인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서 일을 빨리 해치우고 놀려한다. 그러나 원체 근본에 자유가 없는 인간의 마음인지라 서로 놀려하면 할수록 얽혀 일이 일어난다. 그 복잡하게 일어나는 일을 풀어 각 사람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근본이 매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말뚝에 매인 강아지가 돌아가면 갈수록 더 비꼬여 매이듯이 더욱 더 부자유해질 뿐이다. 그것이 이 문명의 꼴이다.

 

거기서 벗어나서 정말 자유로우려면 천지 위에 떠도는 스완처럼 버릴 줄 아는 정신이 필요하다. 하얀 스완이 백두산 꼭대기 천지 위에 둥실 떠논다면 그에서 더 신비로운 그림이 없건만 그놈이 거기 늘 있지는 않는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며 노는 것이기 때문에 놂에도 매이지 않는다. 날아가 버린다.

 

내가 별과 더불어 그물에 멱감았기로서

거기 어찌 잠겨 질 나라드냐?

더구나 그 밑을 채 다 보여주기 전에 쉬이 얼어붙고 마는

땅에 박히듯 구명인 그 마음임에서일까 보냐?

 

, 스스로 하는 영원의 얼

현상을 초월해 서는 것은 신비로운 것이요, 과연 자유의 지경이지만, 마치 천지가 아무리 맑고 신비스러워도 밑이 있고, 얼어버리는 것 같이, 절대는 아니다. 그러므로 거기 잠겨져 버려서는 아니 된다. 신비적인 경험은 한 때 목욕처럼 할 것이지 결코 거기 빠져있을 것은 아니다. 빠져버리면 신비도 신비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날아간다. 날아 나 버리고 만다.

영원히 못가는 흰 옷 탐내는 그 거품 이빨에 맡겨버리고

 

맑은 생각을 가지지만, 그 생각은 요컨대 스완의 흰 것 같아 한정이 있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 못된다. 우리의 모든 사상, 모든 덕행, 모든 믿음은 다 그렇다. 그러므로 그것에 붙잡혀서는 아니 된다. 스완도 죽는 날이 온다. 그럴 때는 고결한 몸을 아낌없이 물거품에 띄워버리고 오직 남은 힘을 다해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참으로 슬프게 아름답다.

 

세상은 세상이기에 뵈는 것에 달라붙는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고결한 사상을 품고 자유하는 태도를 가진다 해도 결국 비평하고 비판하고 도덕의 자[尺度]로 헤아리는 태도로 대해 줄 것이다. 그럴 때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러는 대로 맡겨버리고 스완의 노래나 부르라는 말이다.

 

그것은 슬플 수밖에 없다. 누구를 원망하는 슬픔이 아니다. 상대적인 운명의 근본 바탕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기대도 애착도 없고 다만 부르고 부를 뿐이다.

 

슬픈 노래로만 남아 부르다, 부르다

 

내가 남아 있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노래가 있을 뿐이다. 나는 없어지고 슬픈 노래로만 남는다. 왜 슬픈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때문이다.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이상의 이상 된 점, 정신의 정신된 점이 있다. 그것을 알면서 그대로 당하는데, 그대로 당하는데 자유가 있다. 하나님은 찾아도 못 만나는 이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2) 하는 데가 삶이요, 참이요,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이면서도 기쁨이요, 죽으면서도 삶이요, 버림을 당하면서도 구원됨이다.

 

사라지지 않는 울림으로만 사라지고 말련다.

 

사라지는데, 없어지는데,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데, 죽어지고 마는 것인데, 사실은 그것으로 사라진다. 영원해 진다. 그것은 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울림으로 되는 것이다. 노래도 다 사라진 다음에 남는 울림. 여운(余韻)이다. 거기야 말로 자유가 있지 않나?

 

안녕!

 

그래서 능히 뒤에 남는 인생, 나를 미워하는 대적 실패되는 나라를 보고 안녕!’하고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들에게 복이 있을까? 나로 하여금 스완의 노래를 부르고 가게 하는 그 인생 그 나라에 복이 있을 수 있을까? 복을 빌지만 빌면서도 그대로는 그렇지 못할 줄을 알기 때문에 그냥 있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다시금 새 뜻을 넣어서

 

안녕?

 

하게 된다.

물음이요 깨우침이다. 슬픈 사랑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3)하던 것은 그런 심정에서 아니었을까?

내 나라는 여기 있지 않다.”했던 그이야말로 정말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 스스로 하는 영원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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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3, 새 세대로의 진로(학원사)

 

2) 마태복음 27;46

 

3) 누가복음 2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