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의문사위에 참여하게된 동기는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입니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하는 김성수(44·사진) 박사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가난한 철도공무원으로 비교적 평범하게 살았던 김 박 사는 함석헌 선생을 만나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 김 박사는 함 선생을 만난 이후 늦깎이 영국 유학생, 역사학자, 그리고 지금의 의문사위 전문위원으로 끊임없이 변신했다. 그가 말하는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란 80~90년대 격동의 시절 다른 사람들은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감옥을 가거나 목숨을 바쳤지만 정작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는 자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남은 인생에서 내가 할 일은 역사연구와 통일운동”이라고 말한다. 의문사 위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같은 의미다. 김 박사가 함석헌 선생을 만난 것은 80년대 후반. 그는 함 선생의 강연을 딱 한번 듣고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선생의 ‘종교적 관용주의’는 충격이었다. 이후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그는 언제 어디 서나 함석헌 선생을 생각했다.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신 89년 그는 철도청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영국으로 늦깎이 유학생활을 떠났다. 유학생활 10년째 되던 해인 98년 영국 세필 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주제는‘함석헌 선생의 인생과 사상’이었 다. 귀국해서는‘함석헌 평전’도 출간했다. 그는“함석헌 선생은 종교사상가였고 구도자였으며 때로는 인권운동가였다”면서 “그의 생애와 사상을 영어로 쓰인 글을 통해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에 체류할 때 퀘이커(17세기 중반 영국 랭커셔 지방에서 국교인 성공회 에 대한 개혁운동으로 출발한 개신교의 한 분파)로 개종했다. 함석헌 선생으로부 터 물려받은 퀘이커리즘은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길을 그에게 제시해 줬다. 종교관이 변한 이유에 대해 그는 “현실에 참여하지 않는 신앙과 실천하지 않는 사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앞으로 인물연구를 통해 시대를 조망하는 역사연구를 계속할 생각이다. 김 박사는 “한국 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도 분단과 냉전이데올로기에 의 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김 구 박헌영 조봉암 등의 삶과 사상을 통해 한국 근 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보고 싶다”고 말했다. /홍범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