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내가 만난 함석헌 선생님

와단 2008. 6. 2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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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함석헌 선생님

                                                                 박 재순


첫 만남


내가 함석헌 선생님을 처음 본 것은 대학 신입생이던 1970년이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가 공릉동 공대 캠퍼스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생활하면서 서울 공대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공대 교회의 목사는 함 선생님의 글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데이비드 로스 목사였다. 그 해 봄에 서울 공대 교회에서 함석헌선생님 초청강연회를 열어서 나도 선생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머리와 수염은 백발인데 몸은 꼿꼿하고 목소리는 힘에 넘치고 눈에서는 불이 나오는 것 같았다. 함 선생님의 꼿꼿한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氣)는 하늘을 뚫는 듯 했다. 강연의 내용은 다 기억할 수 없으나, 젊은 사람들이 정력(精力)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강대국들이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데 우리가 그 뒤꽁무니를 쫓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힘주어 말씀하셨다. 오늘의 세계는 마치 끊어진 다리를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은데 우리가 뒤로 돌아서 가면 맨 앞장을 서게 되지 않겠느냐면서 문명비판적인 말씀을 하셨다.


당시 지방에서 올라와서 모든 것이 낯설었던 나로서는 함 선생님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두렵고 먼 당신’으로 느껴졌다. 그러다 대학 4학년 때 친구와 함께 함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함 선생님을 찾아뵐 용기를 낸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대학에서는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 끊임없이 반정부시위가 이어졌다. 군사정부의 억압을 피부로 느끼면서 학생들은 민주적 자유와 사회정의를 갈망하였다. 지금 성균관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이좌용이 철학과 동기생이었는데 나와 자주 어울려 다녔다. 당시 한국의 경제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상품이 한국을 지배하게 될 것을 걱정할 때였다. 이좌용과 그런 걱정을 함께 나누다가 외국상품 불매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다소 엉뚱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콜라, 커피를 먹지 않는 일부터 시작하기는 했으나 외국상품 불매운동을 일으킬 힘도 없고 방법도 몰랐다. 고민하다가 이런 일은 함석헌 선생님이 나서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함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 때가 1973년 봄이었는데 원효로 선생님 댁에 가니 선생님은 작은 앉은뱅이책상을 하나 옆에 놓고 앉아 계셨다. 차를 한 잔씩 달여 주시면서 우리의 좀 엉뚱한 이야기를 들으셨다. 선생님은 들으시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시지 않았고, 선생님의 얼굴이나 눈에서도 선생님의 생각이나 의도를 읽을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나서셔서 이런 불매운동을 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고 되풀이해서 말씀을 드리니까 “그런 일은 장 선생 하고 의논하시구레.” 하셨다. 장 선생은 물론 장준하 선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 이상 장 선생을 찾아갈 용기도 의욕도 없어서 그 일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 때 함 선생님은 “문명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문명비평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배움


그 해 가을부터 나는 함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명동 가톨릭 여학생 회관에서 매주 성경강의를 듣고, 주중에는 정동에서 장자 강의를 들었다. 나는 선생님의 강의가 너무 좋아서 몸과 마음이 젖어드는 느낌을 자주 가졌다. 마치 선생님이 나를 위해서 강의하시는 것 같이 느껴질 만큼 선생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쏙쏙 들어왔다. 선생님은 장자 강의를 하시면서 “성인들이 밝혀준 자유와 초월의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다.”고 하셨다. 그 세계의 문 앞에서 그 세계를 드려다 보듯이 실감나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도 그 세계가 느껴지고 그 세계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해 늦가을에 한신대학 교수들이 삭발을 하고 함 선생님도 삭발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졸업을 앞두고 이좌용이 나에게 “우리도 삭발이나 하자.”고 해서 함께 이발소에 가서 삭발을 하였다. 나는 함 선생님의 강의를 계속 듣다가 1974년 3월에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4~5개월 서대문 구치소에 있다가 8월에 나왔다. 구치소에서 나온 다음 명동의 성경강의에 참석했다. 강의를 마친 함 선생님이 로비에 앉으셔서 따라 앉았더니 “그 동안 어디 갔었소?”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사정을 말씀 드리고 구치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씩씩하게 잘 지낸다는 소식도 전해 드렸다.


1974년 가을부터 서울대 철학과 후배들과 한신대 학생들 20 여 명을 조직하여 함 선생님께 배우기로 했다. 매주 토요일에 신촌의 퀘이커 모임 집에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함께 읽으며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영어로 읽으며 강의를 들었는데 70대 중반의 노인인 선생님의 영어해석이 빠르고 정확한 것을 알고 놀랐다. 어느 날 선생님과 둘이 마주 보고 앉았는데 선생님께서 내게 “나는 생각이 나서 말은 하는데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말을 하지 못해.” 하셨다. 갑작스럽게 하는 말씀이고 또 감히 내가 무어라고 드릴 말씀이 없어서 가만히 있으니까 선생님은 다시 “나는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말을 하지 못해.” 하셨다. 여전히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데 선생님은 “예를 들면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조목조목 말하지 못해.” 하셨다. 나는 함 선생님의 말씀과 글에서 큰 감동과 영감을 받고 있었고 선생님의 글이 두루 뚫리고 통하는 종합적인 사상을 지녔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글이 비조직적이고 비체계적이라서 문제가 있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했지만 내가 철학을 공부하고 조직신학을 전공한다니까 선생님께서 내게 선생님의 글을 연구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라고 당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그 당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선생님의 이러한 말씀이 나를 떠밀어 선생님의 사상을 연구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 때 이규성, 이정호, 이병창, 오이환 등이 참석하였고, 함 선생님의 외손자로 동국대학교에 다니던 최응일이 참여하였다. 1975년 봄 학기까지 공부를 하였는데 시국이 너무 불안정하고 선생님도 바쁘셨고, 여름에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도 사는 것이 복잡하여서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는 모임을 계속하지 못했다. 후에 들으니 선생님은 “그 공부 모임을 계속했어야 하는데···” 하시며 아쉬워 하셨다고 한다.


스승을 사모하는 영원한 젊은 학생


그 무렵에 10명 정도의 젊은 사람들과 함께 함 선생님을 모시고 천안 모산에 있는 구화고등공민학교 교정에서 며칠 간 수련회를 가졌다. 구화고등공민학교는 함 선생님이 맡아서 운영하셨던 시골학교였다. 이 수련회에는 최민화, 오이환, 주한광, 정호진 등이 참석한 것으로 기억된다. 수련회 일정과 초대의 글을 담은 아주 작은 책자를 만들었는데 선생님이 내가 쓴 글을 보시고 나에게 “잘 썼는데.” 하셨다. 2박 3일인지 3박4일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참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이 일일일식을 하시는 것을 배려하지 않고 우리가 먹는 대로 준비해서 먹었다. 카레 밥을 해서 먹었는데 맛도 없고 식사가 영 부실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한 그릇을 드시더니 “나는 좀 더 먹어야겠는데.” 하시고는 더 드셨다. 선생님은 같이 지내는 동안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공부하고 명상을 하시거나 아니면 밖을 돌아다니셨다.

선생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구화고등공민학교 주위의 시골 길을 걸으셨다. 논·밭이 있는 시골 길 참 좋다. 시골 길에는 시골 아이들이 몰려다닌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과 사귀는 게 가장 쉬운 일”이라면서 아이들과 어울린다. 아이들을 향해서 당시 유행하던 운동권 노래 “우리들은 뿌리파다, 좋다, 좋아.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아.”를 부르셨다. 노래를 부르실 때는 활짝 얻는 얼굴로 다리를 건들건들 하시고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시며 아이들에게 다가가셨다. 그러면 정말 어린 아이들은 웃으면서 선생님과 어울리고 선생님을 졸졸 따라 다니게 된다.

선생님은 땅 파는 일도 잘 하셨다. 우리는 오후에 운동장 한쪽에 텃밭을 일구기로 하고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70대 중반의 함 선생님도 삽으로 땅을 파셨는데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두 이랑을 계속 파시는 것을 보고 선생님의 의지와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오산학교에서 역사 선생님이셔서 그런지 그 지역의 문화유산을 둘러보시기를 좋아하셨다. 천안 지역에 청백리로 유명한 세종 임금 때의 정승 맹사성의 집이 있었다. 선생님은 여러 차례 맹사성의 집을 방문하셨던 것 같은데 우리를 이끌고 맹사성의 집을 찾아가셨다. 맹사성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분으로 고불(古佛)이라 불리고 소를 타고 다녔다는 말로 미루어 학문과 인격이 높고 소박하여 높은 존경을 받은 인물로 추정되었다.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서 버스를 타고 또 십 여리를 걸어서 맹사성의 고택을 둘러보게 되었다. 선생님은 그 고택에 사는 맹사성의 후손과는 잘 아시는 것처럼 익숙하게 인사를 하셨다. 나는 맹사성이 소를 타고 다녔다 해서 작은 초가를 연상했는데 가서 보니, 터도 넓고 큰 집도 몇 채 있고, 큰 우물이 있어서 화려하거나 압도하지는 않았으나 정승의 집답다는 생각을 하였다. 맹사성의 고택에서 맹사성의 기운과 풍모를 헤아려 느껴 보고 돌아 왔다.

버스를 타고 마을 어귀에 내려 걸어오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하늘을 보시며 “야! 저것 좀 봐. 신비하잖아.” 하셔서 우리도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천안의 밤하늘은 넓고 깊었다. 캄캄한 밤하늘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참으로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가득히 또 찬란하게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우리도 큰 감동을 느끼며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이나 하늘을 드려다 보았다.

그 날 저녁에 우리는 뜰에 앉아서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은 남강 이승훈 선생님과 류영모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이승훈도 류영모도 잘 알지 못했던 우리는 이승훈과 다석 류영모가 왜 그렇게 위대하고 훌륭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승훈 선생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감동하셔서 목소리가 젖어 드셨고 류영모 선생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내게 좋으신 선생님이 계셨지요.” 하셨다. 나는 그 때 남강이나 다석을 잘 몰랐지만 함 선생님이 저렇게 존경을 하는 분들이니 훌륭한 분들일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리고 70이 넘어서도 스승을 저렇게 존경하고 사모하는 함 선생님은 ‘영원히 젊은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함 선생님이 우셨대.


나는 몸이 갈수록 약해지고 허리가 아파서 1976년 봄에 서울대 병원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계속 척추가 휘고 있어서 40대에는 걸을 수 없게 되니까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척추 수술을 받기로 하고 입원하였다. 내가 받은 수술은 매우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굽은 척추를 펴고 바로 잡는 수술을 하기 전에 척추와 허리 근육을 펴는 과정을 밟아야 했다. 네 개의 쇠막대기를 머리에 박고 두 겹의 관으로 그 막대기들을 고정시켰다. 양쪽 무릎에 구멍을 뚫고 쇠막대기를 박고 기브스를 하여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머리와 다리 양쪽으로 추를 달아서 몸을 잡아 늘였다. 밥 먹을 때 잠시 추를 풀어 놓는 시간 외에는 밤낮으로 머리와 다리에 추를 달고 있어야 했다. 추의 무게가 45파운드가 될 때까지 한 달 가량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그냥 누워만 있어도 힘든 일인데 무거운 추를 달고 밤낮으로 누워 지낸다는 것은 사람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병실을 찾아주는 사람들은 많았다. 함 선생님도 자주 병실을 찾아주셔서 위로 하셨다. 수술하는 날에는 아침 8시에 수술을 받는데 선생님은 장기려 박사 댁에서 부산모임을 하시고, 아침 일찍 비행기로 오셔서 수술 시간 몇 분 전에 병실을 찾아 주셨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나를 따라 수술실 앞까지 선생님이 오셨다. 마음이 약해졌던 나는 선생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수술이 끝나고 며칠 후에 지금 경상대 철학교수로 있는 오이환이 찾아와서 “함 선생님이 우셨대.”고 말해 주었다. 나는 “아니, 왜 선생님이 우셨나?”고 물었더니 오이환이 설명을 해 주었다. 원효로 댁에서 선생님이 마당에서 시드는 나무를 보고 “저 나무가 재순이 같다.”하시면서 우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옆에서 본 손녀 은진 양이 오이환에게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함 선생님은 나라의 어른이고 원로이신데 나 같은 병든 학생을 위해 우셨다는 말을 들으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 후 10달 동안 몸에 기브스를 하고 대전의 집에서 누워 지내다가 서울에 올라 와서 한신대에서 공부를 계속 했다. 함 선생님이 삼일구국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구속될지 모른다는 염려가 있었다. 나도 아침 일찍 원효로 댁으로 가서 선생님이 법원으로 가시는 길을 따라 가기로 했다. 원효로 댁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함 선생님은 장례 때 입는 베옷을 입으시고 법원을 향해 걸어 가셨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것을 선생님은 베옷을 입고 몸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큰 수술을 받고 돌아다니는 일도 쉽지 않고 학교공부도 바빠서 매주 모이는 선생님의 강의에 열심히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마다 함 선생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수련회에는 웬만한 일이 없으면 참석하여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 수련회는 함 선생님 강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울 퀘이커 모임, 부산 장기려 박사 모임과 함께, 씨?의 소리 독자들이 일부 참석하는 4~50명 규모로 모였다. 군사정부의 압박이 심할 때라 함 선생님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기 어려웠다. 수련회에서 장기려 박사도 뵐 수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정치상황이 아무리 험악해도 수련회나 공부하는 모임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삼가셨다. 어떤 때는 세상의 험한 물결에서 벗어나 고요한 산속에 있는 것처럼 조용하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한민족의 평화적인 뿌리, 성경과 노자, 장자, 논어, 맹자의 진리 세계, 문명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다른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을 많이 하셨기에 정신적으로 힘을 얻고 만족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글은 읽기도 쉽고 마음을 움직이고 힘을 주어서 나는 선생님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나 심심할 때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뚫리고 힘이 나곤 하였다. 그래도 글을 읽는 것과 선생님 앞에서 직접 말씀을 듣는 것은 달랐다. 수련회에 참석하면 선생님의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무릎 꿇는 것을 좋아하여 1~2 시간은 무릎 꿇고 견딜 수 있었다. 선생님 말씀을 두 시간쯤 무릎 꿇고 앉아서 듣기도 했다.


함 선생님이 주신 회중시계


나는 대학 시절부터 시계를 싫어하여 차고 다니지 않았다. 몸에다 무엇을 묶는 것도 싫고 시간에 매이는 것 같기도 하여 시계를 멀리 하였다. 수련회 기간에 옆 사람 시계를 자주 보는 것을 선생님이 보셨는지 어느 날 저녁 선생님의 비서 노릇을 하던 김은경을 통해서 허리에 차는 회중시계를 하나 보내 주셨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더니 김은경이 그 시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함 선생님은 전라남도 끝자락 해남에서 목회를 하는 이 준묵 목사를 자주 찾아가셨는데 시계를 잃어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선생님께 시계를 새로 사 주셨는데 집에 와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계를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 얻은 시계를 나에게 주라고 해서 가져 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계가 너무 소중하고 자랑스러워서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며 보물처럼 아꼈다. 그러나 자주 이사를 하고 옥고를 치르고 유학을 하는 동안에 이 시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게 가장 귀한 보물이고 함 선생님에게서 받은 유일한 유품인데 잃어버리게 되어 너무 아쉬웠다. 나는 선생님의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글씨를 받은 일도 없고, 둘이만 찍은 사진도 없다. 대전에서 기브스를 감고 지낼 때 함 선생님이 삼일구국사건으로 재판 받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께 심판을 받아야 할 인간들이 어떻게 선생님을 심판할 수 있느냐는 편지를 선생님께 보냈는데 답장을 받지 못했다. 지금도 잃어버린 그 시계를 아쉬워한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깊고 창조적인 삶을 사셨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정직하셨다. 1970년대 후반에 원효로에서 몇 사람과 함께 선생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도 허물없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어찌 보면 선생님이 흐트러졌다고 느낄 만큼 격의 없이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이 다 가고 선생님과 단둘이 있게 되자 내가 당돌하게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십니까?” 선생님은 갑자기 정색을 하시고 “안 합니다.”고 대답하셨다. 내가 또 “시간을 정해 놓고 성경을 보십니까?”하고 묻자 선생님은 “안 봅니다.”하고 짧게 대답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규칙적인 경건한 수행생활을 하시는지 알고 싶었다. 나의 질문은 그 때 상황에서 선생님께 해서는 안 되는 잘못된 질문이었는지 모른다. 후에 나는 선생님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셔서 명상하는 생활을 하시고 성경이나 경전도 보시는 것을 가족들에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해외여행을 하실 때도 어디서나 일찍 일어나셔서 몸가짐을 바로 하고 계셨다고 한다. 내가 그 때 당돌하고 어쩌면 잘못된 물음을 드렸는데 화를 내시거나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적당히 변명하거나 둘러 대시지도 않고 “안 합니다.”, “안 봅니다.”라고 끊어서 말씀하신 것은 선생님의 겸허하시면서도 높은 품격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또 1970년대에는 동학과 동학혁명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글이나 말씀에서는 동학에 대한 말씀이 없으셨다. 예전의 글에서 동학에 대해 한 두 차례 언급하실 때도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동학이 주문이나 부적을 썼고, 종교적인 깊이와 순수함이 부족하고 여러 가지 사상들을 섞어놓은 것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내가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은 “내가 동학을 잘못 보았나?” 하시기도 했다. 또 당시에 민중 신학과 민중문학이 새롭게 나와서 모든 생각을 민중 중심으로 할 때였다. ‘노자’의 글도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민중의 집단적인 작품이라는 주장이 나올 때였다. 내가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니까 선생님은 “그렇지 민중에게서 나왔지.” 하셨다. 그래서 내가 “그래도 글을 쓸 때는 한 사람이 쓰지 않았겠습니까?” 했더니 또 “그야 그렇지” 하셨다. 또 당시에는 만주나 간도 이야기가 나올 때가 아니었는데 선생님이 내게 “만주나 간도는 본래 우리 땅이니까 때가 되면 우리가 찾아야 할 거야.”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70년대에 나는 20대였고 80년대에는 30대였다. 선생님을 자주 뵙지도 못했고 뵐 기회가 있어도 깊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선생님을 상대하고 대화를 나누기에는 나의 재주가 부족하고 생각이 짧았다. 선생님은 1901년생이시고 나는 1950년생이니까 나이 차도 많고 함께 하는 일도 없었다. 사회의 큰 지도자나 저명한 지성인들이 선생님 주위에 있어서 일에서나 사상에서나 나 같은 것은 나설 처지가 못 되었다. 내가 그 때 생각이 여물어서 선생님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1981년 봄에 나는 다시 한울회 사건으로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대전에서 재판할 때 거기까지 선생님이 오셔서 자리를 지켜 주셨다. 출옥한 후에 1984년 1월 경 성공회 대학교에서 가졌던 수련회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또 실컷 들을 수 있었다. 장기려 박사도 참석하셨고 분위기는 편안하고 좋았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서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선생님도 말씀을 하시고는 좋으셨는지 말씀을 끝내시고는 “자 이제 가서 점심 식사 잘 하시오.” 하셨다. 그 때 선생님과 둘이 마주 쳤는데 선생님은 나에게 “스승은 이 안에 있어.” 하시면서 가슴을 가리키셨다. 속에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스승이 자기 속에 있다는 것은 류영모 선생님과 함석헌 선생님의 근본 가르침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또 아침에 이를 닦는 것을 보시고 다가 오셔서 “치약을 쓰지 말고 소금으로 이를 닦으라.”고 권하시기도 했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치약을 쓰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이제까지 지키고 있다. 이 수련회에는 지방에서 오신 ‘씨?의 소리’ 독자들도 여러분이 계셨는데 헤어질 때 나보고 “선생님의 사상을 더 공부해서 선생님을 이어받으라.”고 격려하는 분들도 있었다.


1984년 6월에 결혼했을 때 선생님께서 주례를 맡아 주셨다. 결혼식 전에 몇 차례 아내와 함께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선생님은 은근히 나의 결혼을 걱정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 동안 결혼할 용기도 못 냈고 준비도 안 됐었지만 독신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춘기 때부터 “나는 독신으로 살아야겠다.”, “나는 독신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였다. 함 선생님 가까이서 바가바드 기타를 공부하기도 하고, 간디에 대해서도 배워서 나는 간디를 매우 좋아하고 숭배하게 되었다. 누가 나의 결혼에 관해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니까 “싫다는 사람 왜 자꾸 결혼을 시키려고 그래요.” 하셨다고 한다. 나는 근기도 부족하고 의지도 약해서 독신을 관철할 수 없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선생님을 신부될 사람과 함께 찾아뵈었더니 이러저런 말씀 끝에 “요새는 길게 말하지 않아.” 하시고 걱정을 덜어 주셨다. 다리가 불편해서 오래 서 있는 일이 어려운 나의 사정을 헤아리고 짧게 말씀하시겠다고 미리 알려 주신 것이다. 선생님은 결혼식 주례사를 길게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몇 시간씩 말씀을 하셔서 당혹스러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께 말씀을 짧게 해 달라고 말씀을 드릴 수는 없고 선생님 말씀이 길어지면 사람들에게 의자를 가져 오라고 해서 앉아서 말씀을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주례사는 매우 짧고 간결했다. 구약성서의 십계명과 신약성서의 팔복선언을 낭독하시고 말씀하셨는데도 10분을 넘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것과 고난 속에서도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뚜렷이 기억나는 말씀은 나를 가리켜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고난을 겪을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다. 결혼하는 신랑한테 하신 말씀이라 이 말씀은 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축의금을 가져오셨는데 나는 주례를 맡으신 선생님께 사례비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아예 없어서 준비를 하지 못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못 미더우셨던지 “결혼생활이란 기대와 달리 실망할 일도 많다.”는 말씀을 신혼부부에게 해 주셨다.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아


1970년대 중반부터 한신대에서 공부했고 1980년부터 한국 신학연구소에서 일을 하면서 안병무 선생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안병무 선생님은 함 선생님과 가장 가까운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80년경에 안 선생님이 내게 “함 선생님이 박군 이름을 알고 계셔. 함 선생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인데.” 하시며 놀라워 하셨다. 함석헌전집 20권을 낸 한길사 김언호 사장이 1980년대 중반에 함석헌사상 연구논문집을 내기로 하고 내게도 ‘함석헌의 종교사상’에 대한 글을 부탁하며 함석헌전집 20권을 주었다. 내게는 이 일이 부담도 되고 도전도 되어서 함 선생님의 글을 다시 열심히 읽고 정리하였다. 마침 박영호 선생이 쓴 류영모 전기(傳記)가 나와서 이 전기를 읽고 류영모와 함석헌의 긴밀한 사상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논문을 쓴 후 ‘씨?의 소리’ 100호 특집 논문을 청탁 받고 썼고 ‘씨?사상과 민중신학’의 관계를 밝히는 글을 써서 씨?사상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게 되었다. 1988년경에 월간지 ‘샘이 깊은 물’에서 “이 사람이 사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함 선생님의 삶과 정신에 대한 글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한길사에서 나를 추천했다고 하였다. 나는 잡지사의 사진기자와 함께 쌍문동 댁에서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신촌 퀘이커 모임에도 참석하여 선생님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쌍문동 댁에서 만난 선생님은 깨끗하면서 편안하셨다. 선생님이 기르시는 화분이나 선생님 주위에 있는 탁자가 모두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선생님의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로는 폭풍처럼 격렬하면서도 때로는 바람 없는 호수처럼 조용한 선생님의 삶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선생님과의 인터뷰에서 몇 가지 민감한 문제를 물었다. 19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직선제가 도입되고 그 해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하였는데 민주화운동세력의 두 축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이 단일화를 하지 못하고 함께 나오는 바람에 군사정부를 계승한 노태우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걱정은 하면서도 투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민주화운동의 원로로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짐작할 뿐이다. 1989년에 돌아가셨으니까 민주화운동의 결실을 조금도 맞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신 것이다. 1990년대 초까지 독재정부에 맞서 분신과 투신을 하는 청년학생들이 줄을 잇고 있었으니까 선생님은 민주의 봄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셨다. 누구보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열정을 가지고 오랜 세월 헌신하신 선생님이 민주화운동의 열매를 조금도 맛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뿌리는 이와 거두는 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류영모 선생님과 얽힌 문제에 대해서도 여쭈어보았더니 “사람에게는 다 말할 수 없고 하나님에게만 말할 수 있는 차원이 있다.”고 하셨다. 당시 선생님께서 큰 수술을 받으신 후여서 죽음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더니 “노자를 읽어서인지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하기야 선생님은 일찍이 목숨을 내놓고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오시지 않았던가. 특히 1970년 ‘씨?의 소리’를 창간한 목적이 ‘한 사람이 죽기 위해서’라고 하셨고 죽음을 무릅쓰고 피로 증언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던 것을 보면 죽음을 두려워 한 분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1970년대에 조선일보에서 선우휘와 대담한 내용을 보면 선우휘도 “함 선생님은 죽을 자리를 찾는 분”이라고 했다.

사진기자가 함 선생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선생님은 옆에 있는 나에게 “같이 안 찍으려우.” 하셨으나 내가 같이 찍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나서지를 못 했다. 지금 같으면 사진기자에게 같이 찍어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든다. 선생님 댁의 큰 온실에는 30년 넘게 기른 크고 우람한 선인장도 있고 여러 가지 화초와 나무들이 가득 했다. 낑깡 나무에 노란 열매들이 열렸는데 그 옆에서 사진을 찍던 선생님은 그 노란 열매들을 따서 나에게 주셨다. 원효로에 계실 때도 나에게 작은 화초 하나를 캐 주시면서 “살려 보지 않을라우.”하셔서 받아오셨는데 한신대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기숙사에서 그것을 끝까지 기를 수가 없었다. 방학에는 대전 집으로 가야 해서 그 화초를 돌볼 수가 없었다.


큰 공부를 하시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세계평화를 촉구하는 행사에 함석헌 선생님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참석하였다고 말들이 아주 많았다. 선생님은 당시 병으로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병든 몸을 끌고 88올림픽 평화행사에 나가셨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행사장에 참여 했다고 비판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 때 안병무 선생님이 한백 교회를 시작하셔서 한백교회에서 안 선생님을 자주 뵈었다. 안병무 선생도 매우 언짢아 하셨다. 그 일 때문에 안 선생은 함 선생님을 찾아뵙지도 않으셨다. 병원에서 함 선생님을 뵈었다고 하자 안 선생은 “나도 찾아가 뵈어야 하는데” 하시면서 선생님을 그런 자리로 끌어낸 인사들을 원망하셨다. 후에 안 선생은 함 선생님을 찾아뵙고 동양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한다. 나는 당시 안 선생님이 노여워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함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을 미루어 보면 그런데 나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본래 정신과 자세가 상생과 평화다. 원수도 인정하고 함께 손을 잡자는 것이지 누구를 미워하고 배척하자는 생각은 없으셨다. 물론 권력자와 타협하거나 권력에 굴종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셨다. 박정희에 대해서 글을 쓸 때도 박정희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자세로 쓰셨다. 비폭력 평화 사상의 기본이 적의 이성과 양심을 신뢰하고 움직이려 하는 데 있지 않은가? 싸우는 평화주의자, 함석헌 선생님은 비타협적으로 싸우면서도 늘 상생과 공생의 정신으로 싸우셨다. 또 평생 세계평화를 간절히 꿈꾸던 선생님으로서는 세계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모임에 나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 후반에 ‘씨?의 소리’를 복간했을 때였다. 나는 신년인사 하러 갈 때 나의 책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를 한 권 가져다 드렸다. 책을 받으시고는 “씨?의 소리 같이 해야지요.” 하셨다. ‘씨?의 소리’에 글을 쓰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신년인사를 가면 계훈제 선생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하루 종일 유명 인사들도 들락거렸다. 제주도에서 난초를 재배하던 김태현 선생이 선생님 댁에 계시면서 들어오고 나가는 손님들을 접대했다. 내가 가면 김태현 선생이 활짝 웃으며 크게 반가워 하셨다. 나중에 제주도에 갔을 때 김 선생께 “왜 나를 그렇게 반갑게 맞아 주셨느냐?”고 물었다. 김 선생과 나는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 선생은 “선생님께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지요. 나는 거기 따라서 손님들을 대했을 뿐입니다.”고 설명해 주었다.

1980년대 후반에 선생님 댁에 새해 인사를 가면 선생님은 밝은 옷을 입으시고, 신문이나 잡지에서 예쁜 사진을 오려서 벽에 붙이고, 해외여행에서 가져온 예쁜 조가비들을 나누어 주셨다. 늙어서도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이 뵙기 좋았다. 또 선생님은 외국에서 친지들이 보내주는 책들을 열심히 읽어서 새로운 지식을 얻으셨다. 예쁜 사진, 예쁜 조가비를 좋아하고, 늘 공부하는 학생으로 사신 함 선생님은 죽을 때까지 어린이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사셨던 분이다.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서울대 병원에 몇 차례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힘없는 모습으로 누워 계시던 선생님은 나를 보시고는 “큰 공부를 하시오. 사람에게는 본능, 이성, 영성이 있는데 이것을 다 아우르는 공부가 큰 공부입니다.” 하셨다. 서구 근대학문의 영향을 받아서 학문이라면 흔히 논리와 개념에 충실하고 이성만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아는데 선생님은 본능(감정), 이성, 영성을 아우르는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탐구를 큰 공부라고 하셨다. 본래 선생님이 추구하신 사상세계는 생명과 정신을 전체적으로 아우르고 꿰뚫는 깊고 넓고 높은 학문의 세계였다.


선생님의 유언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남기셨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남강 선생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루어 보려고 했으나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것은 이 몸과 원효로 집밖에 없다. 몸으로라도 선생님의 뜻을 이루고 싶다. 몸은 표본해서 학생들의 연구에 쓰고 원효로 집은 공적인 일에 쓰라.”

오산학교 설립자요 교장으로서 학생들을 일깨우는데 몸과 정신을 다 바치셨던 남강 선생은 돌아가시면서 몸의 뼈를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 실험 교재로 쓰게 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그러나 일제는 남강의 뼈를 표본으로 만들어 놓으면 민족감정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남강의 시신을 빼앗아 화장하여 뿌려 버렸다. 누구보다 남강의 죽음을 애통해 하셨던 함 선생님은 자신의 몸을 표본으로 만들어서라도 남강의 뜻을 잇고자 하셨다. 함 선생님은 말년에 동아일보사에서 받은 언론상 상금을 포함하여 강연료 등을 남강문화재단에 헌납하셨다.


함 선생님의 유지는 실현되지 않았다. 몸을 표본으로 만드는 일은 유지하고 보존하는 문제가 크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실현되지 못했다. 원효로 집은 오산학교로 넘어갔는데 오산학교에서는 팔기를 원해서 선생님의 유가족들이 공동으로 구매했다가 결국 부동산 업자에게 팔려서 서까래 하나, 화초 한 포기 남기지 않고 헐어버리고 다세대 주택을 짓고 말았다. 유족들 가운데 형편이 어려운 분도 있었고 함석헌 기념 사업회는 살 형편이 못 되어서 벌어진 일이다. 함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함 우용 선생은 집값에서 자신의 몫을 함석헌 기념사업회에 헌납하였다.

선생님이 30년 이상 민주화를 위해서 위대한 사상을 낳기 위해서 그리고 주옥같은 글을 쓰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불태웠던 집과 터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독일에는 “하마터면 괴테가 묵어갈 뻔 했던 집”이라는 이름을 건 여관도 있다는 데, 우리는 함석헌 선생님의 정신과 혼이 서리고 삶의 자취가 배인 곳을 흔적도 없이 깔아뭉갰다.


물론 원효로 집을 놓고 주위의 사람들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함석헌 기념 사업회는 문화관광부, 서울시, 용산구청에 원효로 집을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함석헌 기념관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하였다. 관청에서는 취지는 공감하면서도 시간을 끌며 미루다가는 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서울시에서는 함석헌 기념 사업회에서 비용의 절반을 마련하면 사업을 맡겠다고 하기도 하였으나 함석헌 기념 사업회는 그럴만한 힘도 의지도 없었다.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선생님이 원효로 집을 “공적인 일에 쓰라.”고 하신 것은 간절한 뜻이 계셔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최태사 선생은 오산학교 후배로 함 선생님을 따르면서 선생님의 생계를 돌보아드릴 만큼 선생님을 가까이 모신 분이다. 당시 최선생은 홍성의 풀무학교 이사장으로서 재정난이 심각하여서 함 선생님께 원효로 집을 풀무학교에 달라고 요청하셨다. 그러나 함 선생님은 인간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최 선생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함 선생님이 “공적인 일에 쓰라.”고 하셨을 때 ‘공적인 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남강 이승훈과 함석헌 선생님이 평생 추구하셨던 뜻과 정신을 밝히고 이루는 일이 아니었을까? 이승훈, 류영모, 함석헌 셋이 함께 드러낸 그 정신과 뜻을 밝히고 이루는 일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공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사로는 남강 이승훈을 잇고 마음으로는 다석 류영모를 이으신 선생님


함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 고통을 많이 겪으셨다고 한다. 췌장암은 본래 고통스러운 병이어서 그랬는지 병원에서 진통제를 많이 주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 뵐 때는 아무 감각이나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모습으로 앉아 계셨다. 그 당시 나는 함 선생님의 오산학교 제자로서 오산학교 동창 회장이셨던 안리현 선생과 가까이 지냈다. 함 선생님 가까이 계시면서 마지막을 지킨 안 선생께 선생님이 죽음을 어떻게 맞으셨느냐고 물었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함 선생님은 죽음을 앞두고 1~2주 동안 죽음에 맞서려는 듯이 버티며 안간힘을 쓰셨다고 했다. 나는 그 때 선생님은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는 단계는 지나셨고 살고 죽는 일에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셨다고 여겼는데 기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셨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생명의 철학자시고 “생명은 죽음에 지지 않는 것이고 죽어도 좋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죽음에 맞서려고 안간힘을 쓰신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공부하고 함석헌과 류영모 사이에 얼마나 깊은 정신적 결속이 있었는지를 알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류영모 선생님과 함석헌 선생님은 열한 살 차이가 나지만 나신 날은 3월 13일로 같았다. 돌아가신 날은 류선생님이 2월 3일이고 함선생님이 2월 4일로 하루 차이다. 나는 함 선생님이 류 선생님과 돌아가시는 날을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죽음 앞에서 버티며 안간힘을 썼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함 선생님이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았으면 다석이 돌아가신 날과 같은 날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말도 있고 류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을 하루 비껴서 돌아가신 것이라는 말도 있다.


생전에 두 분은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으나 생각과 정신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석이 함석헌 선생님을 원망하는 말도 하셨지만 다석의 일지에 보면 7~8회에 걸쳐 함 선생님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글이 나온다. “함언은 이제 안 오려는가. 영 이별인가. 하나님 이 놈은 어찌 하라심입니까?”하고 탄식하기도 했다. 80이 넘은 다석을 모시고 박영호 선생이 지방에 갔을 때의 이야기다. 늘 하시듯이 새벽에 일어나서 체조를 하시던 다석이 갑자기 털썩 주저앉으셨다. 박 선생이 놀라서 달려가니 다석은 “그이도 지금쯤 일어났을 텐데 그이는 대체 무얼 생각하나?” 하고 넋을 잃고 앉아계셨다고 한다. 다석이 함 선생님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아쉬워했는지 알 수 있다.

함 선생님도 다석을 스승으로 그리워하고 존경하였다. 다석의 1주기에 다석의 제자들이 다석의 집에 모였을 때 함 선생님은 “선생님과 여러분 앞에"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화해를 요청했다. 그리고 “내가 부족하지만 이만큼 된 것도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고 하셨다.

다석은 “내게 두 벽이 있다. 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고 했다. 자신의 삶과 정신을 둘러싸고 지켜주는 벽이 ‘이승훈’과 ‘함석헌’이라고 한 것은 세 사람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삶과 정신의 끈이 있음을 말해 준다. 함 선생님은 유언을 통해서 역사로는 남강과 잇고, 임종(臨終)을 통해서 마음으로는 다석과 이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함 선생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공적인 일이라면 남강, 다석, 씨? 함석헌 선생님의 정신과 뜻을 밝히고 이루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돌아가신 분과 남은 사람들 사이에 생각과 마음이 꼭 같을 수는 없다. 선생님은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인간에게는 벼락이 떨어질 것이라.”고 하셨지만 무덤에는 비석이 세워졌고, 선생님이 평생 국가권력과 국가주의에 맞서 싸우시면서 ‘들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셨지만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무덤은 국립묘지로 가더라도 함 선생님의 정신과 사상은 이 역사와 사회 속에 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내가_만난_함석헌_선생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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