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진실위 전쟁기 학살에 대해 남한 정부의 사과 요구

와단 2009. 11. 27. 14:03

THE NEW YORK TIMES


2009. 11.26


한국, 전쟁 중 민간인 학살 인정

최상훈 기자


서울, 한국 — 한국전쟁이 시작되던 달에 남한의 군인과 경찰은 최소한 4,900명의 민간인들이 공산주의 동조자일 것으로 두려워하여 처형하였다고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목요일 발표하였다. 


진실위는 2005년 국회법에 의해 설립되었고 한국전쟁기 산악지역의 공산주의 게릴라를 섬멸하는 과정에서 남한정부에 의해 수천 명의 좌익수용자들이나 마을주민들이 즉결 처형되거나 기관총에 의해 학살된 비슷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진상규명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바다에 버려지거나 집단매장 되었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남한 국가조사기관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이라고 알려진, 1950-53년 한국전쟁기간 중 가장 잔인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건의 성격과 규모에 대한 최초 발표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반공의 권위적인 이승만 정권은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를 부인하는 재교육을 하기 위한 의도로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1950년 6월 남침에 의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의 군인과 경찰은 급히 보도연맹 원들을 검거하였고 그 와중에 많은 보도연맹 원들이 사라졌다. 전후 군사통치 시기에 이들 보도연맹 원들이 운명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그동안 남한사회에서 금기시 되어왔었다.

 

 

진실위 전쟁기 학살에 대해 남한 정부의 사과 요구


Richard Lloyd Parry, 아시아 편집자


THE TIMES, 11.27.2009


어제 진실위는 한국전쟁초기에 정부의 지시로 학살된 수천 명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고 정부에 권고했다.  


한국진실위는 1950년 6월과 9월에 거의 5천명에 가까운 좌익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경찰과 군대에 의해 검거되고 학살되었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 숫자는 북한군의 남침이 쇄도하면서 거의 남한군과 미군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남한에 반공주의가 극대화되는 과정에 희생된 사람들의 극히 일부로 여겨지고 있다. 역사가들과 연구자들은 실제 희생자수는 최소한 10만에서 20만까지 될 수 있다고 추정한다.


이 학살은, 진실위에 따르면, 한국정부 최고위 수준에서 지시되었고, 몇 십년동안 남한사회에 금기시 되어왔다. 전쟁 후 남한사회를 통치한 우익 군부독재아래서 생존한 유족들은 공산주의자로 알려질까 봐 두려워서 자신들의 친척이 학살된 사실에 대하여 감추고 살았다.


1980년 후반 한국에 민주주의가 소개된 후로 그리고 4년 전 진실위가 설립된 이래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의 증언과 집단희생지에 대한 사실이 점점 더 밝혀졌다.


어제 확인된 학살은, 국민보도연맹원들에 대한 것이었으며, 보도연맹은 공산주의자들과 좌익동조자들을 “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조직이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발발 전 남한정부는 모집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보도연맹원 숫자를 할당했다. 그 결과 보도연맹원 중의 많은 사람들은 진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할당된 수를 채우기 위해 모집된 단순한 문맹의 농사꾼들이었다. 


1949년말 까지 전국적으로 30만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있었고 그 중 20만 명은 서울에 있었다. 북한군이 남침을 시작했을 때 여전히 남한정부에 의해 관리되던 연맹원들은 북한군에 가담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검거되었다. 


미군의 수동적 공모와, 때로는 미군 앞에서, 때로는 여성과 아동을 포함한 연맹원들은 집단학살 당했고, 종종 총에 맞은 후 바다에 버려지거나 집단 매장되었다. 진실위 박영일팀장은 “연맹원 4,934명이 학살된 것을 확인했다.”고 기자회견 중 말했다. 


“이 확인된 4,934명은 추정하고 있는 희생자수의 약 10%밖에 안된다” 고 위원회는 전에 말했고, 다른 학살된 민간인수를 포함하면 전체 희생자수는 20만 명이나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이승만정부는 전쟁초기 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하여 남한정부에 위협이 될까봐 두려워하고 깊이 걱정했습니다.”


위윈회는 작년에 퇴임한 전 진보적인 노무현 대통령이 설립했고, 그는 부패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금년 5월 자살했다.  


남한의 많은 우익들은 위원회가 불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여긴다. 노대통령 후임인 보수적 이명박정부가 위원회연간예산 1,900만 불을 계속해서 지원할지 의심하고 있다. 


위원회는 또한 1945년 전 친일파에 대한 조사와 전후 군사독재하에서 인권침해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위원회는 미군에 의한 학살을 포함해 7천명이상의 남한사람들로부터 1,200건에 대한 신청을 받았다.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북한군의 남침에 의해 시작되었고 3년 후에 끝났으며 “잊혀진 전쟁”이다. 7십년 후, 여전히 끝나지 않은 마지막 냉전으로 남아있다. 어느 내전도 한국전쟁만큼 사람들에게 진저리가 나도록 지독한 영향을 남기고 사람들을 분열시킨 내전은 없었다,


1945년 후반, 일본 식민지였던 한국은 미소의 영향에 따라 38선을 따라 분단되었다. 그러나 냉전조짐과 더불어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남북한은 각각 한반도의 합법적 정부라고 주장했다; 양측은 공개적은 다른 쪽을 침범하고 정복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몇 달 간의 상호도발 후, 1950년 6월 북한군은 38선을 넘었다. 


북한수도 평양은 점령, 재점령되었다; 서울도 4번이나 잃거나 수복을 반복했다. 북한은 남한과 미국이 주축이 된 유엔군에 의하여 거의 전쟁에 패할 것 같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전쟁은 한반도에 영구적 평화조약 보다는 임시정전 상태로 끝났다. 남한은 415,5000명이 생명을 잃었고, 미국, 영국, 유엔군은 37,000명이 생명을 잃었다. 북한과 중국은 합쳐서 150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남북한군대는 1953년 전쟁 후에도 1950년인 3년 전 시작했던 전쟁전과 거의 비슷한 위치에서 대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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