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Fox
1624. 7 잉글랜드 레스터셔 드레이턴인더클레이~1691. 1. 13 런던.
잉글랜드의 설교가, 선교사, 퀘이커교(프렌드회) 창설자.
개인적인 신앙체험으로 교회의 관습에 적대감을 갖게 되었으며, 성서적 권위나 신조를 초월하는 내적인 빛, 즉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퀘이커 운동이 생겨나게 된 경위를 자신의 〈일기 Journal〉에 기록했다.
초기생애와 활동
잉글랜드 레스터셔의 드레이턴인더클레이(지금의 페니드레이턴)라는 마을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잠시 동안 구두수선공이 되기 위한 견습활동을 하고 양을 치기도 한 것 같지만 실제로 어떤 직업에 종사했다거나 공식적인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항상 적당할 정도로 돈이 있었으며, 폭넓게 독서하고 읽기 쉽게 글을 썼다. 18세 때 충분한 종교적인 조언이나 체험을 얻기 위해 집을 떠났으며, 훗날 그의 〈일기〉에 기록한 대로 다양한 개인적인 종교 체험이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을 그는 '통로'라고 부르는데, 그의 평가에 의하면 그것은 종교 생활에서 신앙과 실천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을 바로잡아준다고 했다. 그의 종교적인 배경은 성공회보다는 청교도인 것 같다. 그러나 청교도보다 기존 교회의 형식주의와 전통주의에 대해 더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받는 내적인 빛(영감)을 신조나 성서보다 우위에 두며 개인적인 체험을 권위의 참된 원천으로 간주했다.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문자로 씌어져 있어도 문자에 의해서나 인간의 도움에 의해서도 보지 못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보았고 그의 직접적인 성령과 힘에 의해서 보았다. 하느님의 성스러운 사람들도 그러했으며, 그들에 의해 성서는 씌어졌다."
교회의 관습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태도는 일부 정치적·경제적 인습(서약·칭호·군복무 등)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로 나타났다. 그는 걸어서 여행하며 개인이나 단체를 대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잉글랜드의 미들랜드 주에서, 다음에는 북부의 주에서 설교했는데, 그곳의 구도파(求道派:17세기 청교도 분파)는 그와 그의 메시지를 환영했다. 진실의 선포자들이라 불린 폭스와 다른 많은 남녀 순회 설교자들에 의해 지역 모임들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영국 공화정(1649~60) 말기에는 프렌드회가 존재하기 시작했는데, 이 명칭은 훨씬 후에 붙여진 것이며 그 회원들은 초기부터 퀘이커교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폭스는 레이크디스트릭트의 주들인 웨스트멀랜드와 랭커셔, 후에는 요크셔, 런던, 기타 지역들에서 성공적으로 추종자와 동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공공연한 적대감과 공식적인 제재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그들은 교회의 목회자들을 반대함으로써(폭스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양육된' 목사들은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견해를 피력함), 성직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맹세를 하거나 십일조를 내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종교지도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폭스와 그의 동료들은 빈번히 체포되고 감금되었다. 사실 폭스는 1649~73년에 8번이나 투옥되는 고통을 겪었다. 1660년 왕정이 복고되자 퀘이커교를 반대하는 특별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것에 대처하기도 하고 또한 다른 필요에 의해 폭스는 지역 퀘이커 그룹들로 하여금 정기적인 월별·계간별 회의를 조직하도록 고무했는데, 이것은 몇몇 중앙의 전체회의와 함께 퀘이커교 교회 정치의 지속적인 형태가 되었다. 압력이 간헐적으로 계속되다가 폭스가 죽기 직전인 1689년 관용령으로 퀘이커교도들은 구제되었다.
잉글랜드와 그외 지역에서의 선교활동
1669년 폭스는 아일랜드로 선교여행을 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초기 개종자들 중 한 사람인 마거릿 펠과 결혼했다. 그녀는 랭커셔 얼버스턴 스워스모어 홀의 판사 토머스 펠의 미망인이었다. 폭스는 그후 얼마 동안 그곳에서 보냈다. 1671~73년 그는 카리브 해와 북아메리카 본토에 있는 영국 식민지들을 방문하는 중요한 일을 했는데, 기존의 퀘이커 공동체들, 특히 메릴랜드와 로드 아일랜드에 있는 공동체들을 강화하고 조직화했다. 1677, 1684년에는 네덜란드와 북부 유럽의 몇몇 지역을 잠시 방문했다. 1675년경 그는 자신의 생애를 요약한 것을 받아쓰게 했는데, 이것은 보충자료와 함께 그의 사후에 〈일기〉로 편집, 출판되었다. 그는 생애의 말년 15년 동안을 런던이나 런던 근처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그들에게 기숙하며 살았는데, 실제적인 문제점들에 대한 자문회의에 참석하고, 예배모임에서 설교도 하며, 프렌드회에 속한 개인이나 회중들과 폭넓은 서신을 교환했다.
생애를 통해 폭스는 당시의 관행대로 논쟁적인 소책자들을 썼는데, 그들 중 많은 것이 출판되었다. 그들은 신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도 다루고 있는데, 문체는 그다지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영어 성서에 능통했으며, 역량이 없는 역사나 문법 같은 주제에 대한 관심을 내보이기도 했다. 그는 때때로 학식 있는 친구들에게서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이 말한 대로 상당히 자신감이 있었으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매력적인 인격의 소유자인 그는 윌리엄 펜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교양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겸비했던 펜은 폭스를 평가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를 가장 훌륭히 약술한 글로 꼽힌다. 그 자신의 〈일기〉는 완전히 객관적인 글은 아니지만 폭스 자신뿐만 아니라 퀘이커교의 태동에 대해 가장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 초기에 기록된 다른 많은 자료들이 보존된 것은 퀘이커교 운동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폭스 자신이 느꼈기 때문이다.
H. J. Cadbury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