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광야에서 슬피 우는 바보새,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와단 2008. 7. 11. 16:55

광야에서 슬피 우는 바보새,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을 읽고 --


1. 고기 못 잡는 어부
신천옹(信天翁)이라는 새가 있다. 거위보다 큰 몸에다 편 날개가 3미터나 되어 날아다니길 잘 해 '태평양의 제왕'이란 별명을 지닌, 주로 대양에 서식하는 이 새는 그 겉보기와는 달리"고기를 잡을 줄은 몰라서 갈매기란 놈이 잡아 먹다가 이따금 흘리는 것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에 '바보새'란 이름도 갖고 있다.
함석헌은 자신을 일러 신천옹이라 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밥벌이 할 줄은 몰라 여든이 다 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그 아니 바보새"(함석헌 평전>> 195쪽, 재인용, 이하 책명은 생략하고 쪽수만 표기함. 재인용은 함석헌의 글이며, 이말이 없는 건 <<평전>> 저자의 글임)냐는 게 그 사연이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 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 하고, 학자도 못 되고, 기술자도 못 되고, 사상가도 못 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 하는 사람"(196,재인용)이라는 자평에 대하여 저자는 "만약 우리가 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그가 살았던 시대에 한정시켜 평가한다면, 예수 역시 실패자, 패배자라고 할 수 있다"(197)는 말로 반격의 참호를 확보한다. 공자를 '상가집의 개'로 평가했던 사마천의 현실주의 역사관을 느끼게하는 대목이다. 사적으로 보면 아버지는 징역 중 잃었고 어머니는 북한에 남겨둬 생사를 모른 채 타계한, 55세에 처음으로 자기 집이랍시고 가져본, 고기못 잡는 새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그러나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타자와 역사적인 흐름에 의하여 서서히 이뤄진다.
함석헌 -- 그는 자신이 부정한 그 모든 것 이상이었다. 그는 신앙인에다 종교 철학자요 사상가였으며, 학자에다 예언자요 문학인이었다. 그는 민주화 운동가이자 통일 일꾼에다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다. 분단 시대 이후 함석헌 만큼 모든 분야에 걸쳐 다각적인 활약을 했던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민족 주체론적인 정신사적 족보를 만든다면 아마도 원효나 다산, 단재 같은 반열에 그를 올린대도 망발은 아닐 것이다. 진실로 위대한 것은 바보와 통하는 셈이다. 그가 들판에서 한낱 먹이나 잡는 새였다면 아무도 그 울음소리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슬픈 울음은 바보새였기 때문에, 그리고 저 옛 선지자들처럼 빈 들판, 광야에서 홀로 울부짖었기에 세인의 심금을 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2. 투옥. 감시 당하는 진리
존경할 인물이 드문 터라 전기문학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우리 문화 풍토에서 호랑이 없는 동굴에 날뛰는 승냥이처럼 재벌, 친일파, 독재 찬양자, 바람둥이들의 일대기가 판을 치고 있다. <<전태일 평전>>을 비롯한 민주 통일 일꾼들의 전기문학은 동지 섣달 들꽃처럼 찾기 어려운 시절에 함석헌 옹의 <<평전>>이 시선을 끄는 건 당연지사다.
우선 저자 김성수의 약력이 이채롭다. 그는 신진공고 자동차학과와 한국철도대학을 나온 뒤 철도청에 근무하던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40분, 함석헌의 운명 소식을 듣고 서울대 병원으로 달려가 조문을 한 3시간 뒤 8년간 몸 담았던 공직을 그만 둔다. 김성수는 이내 영국에서 함석헌처럼 역사학에 전념,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의 이해>(석사학위 논문)와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박사 학위 논문)를 썼는데, 후자의 수정 보완, 번역판이 바로 이 저서가 되었다.
저자는 여기서 함석헌의 역사. 철학적 배경, 영향 받은 인물과 사상, 그리고 그가 남긴 공헌에 초점을 맞춰(25-6)서술하겠다는 포부에서, 그 방법론으로는 방대한 저서를 일차 자료로 분석하고, 각계 인사들과의 면담으로 나머지 부분을 보충했다고 밝혔다(9).
1901년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사자섬)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함형택과 글은 몰랐지만 도리에 밝은 어머니 김형도 사이의 맏아들로 함옹은 태어났다. 7남매 중 "위와 아래 둘은 낳자마자 곧" 죽어버려 2남3녀로 아들로는 맏이였다(한길사 <<함석헌 선집>>5권 343쪽, 이하 선집 권수와 쪽수만 표기함). "어린 시절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여서 또래 사내아이들과 싸움이나 다툼을 해 본 일이 별로 없었다"(29).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평양고보 재학 중 황득순과 결혼(1917), 3.1운동 참가로 자퇴코 오산학교 전학(1921) - 도일(1923), 동경고사 졸업(1928) 후 오산학교 교사(1938년까지), 송산 농사학원 경영(1940), 광복 후 평북 문교부장(1945), 월남(1947. ), 씨알 농장(1957), 문필 및 민주화 운동으로 일관하다가 1989년 타계한 것이 외형적인 함석헌의 생애이다. 여기에다 민족운동사적인 투쟁기를 추가한다면 동경 대지진 때 하룻밤 유치장 신세(1923)를 서두로 오산학교 교사 때의 독서회 사건으로 일주일 정주 경찰서 구치, 송산리 농사학원 때 계우회(鷄友會)사건으로 1년 형,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 형, 8.15 후 신의주 학생사건으로 2차에 걸쳐 수감,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필화 사건,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 단식투쟁(1965), 1970년부터 <<씨알의 소리>> 발간, 1976년 삼일구국 사건으로 수감, 1979년 YWCA위장 결혼 사건 등등 일생을 수사기관과 함께 했다.
여기에다 영향을 주고 받은 인물사를 대입하면 소년시절 숙부 함일형, 오산학교 시절의 이승훈. 유영모, 동경고사 때의 동지 김교신과 그의 소개로 만나게 된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월남 후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 신학자 안병무 제씨를, 사상사적인 편력으로는 기독교, 특히 퀘이커, 불교, 노장철학, 힌두교, 간디, 톨스토이, 칼라일, 셸리, H.G.웰즈. 칼릴 지브란, 샤르댕 등등 독서와 연구 편력을 수없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업적이 많을수록 다루기 어려운 게 평전인데 함석헌도 예외가 아니다. 간략한 위의 메모만 풀이해도 엄청난 분량의 저서가 될 터인데 저자는 주로 기독교사상에 초점을 맞춰 함옹의 일생을 간략하게 재편성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저자는 함옹의 생애를 출생부터 도일(1923)까지를 '생각하는 기독교 청년'의 성장기인 제1기, 이후 해방(1945)까지를 감방대학에서 노장자 사상의 심화기인 제2기, 외골 신앙보다 더 위대한 진리를 찾아 외쳤던 시기를 제3기(1961년 이전까지), 그 이후 타계까지를 제4기로 나눠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 나눔은 함옹이 기독교 사상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 변모했는가를 한 눈으로 파악케 해준다. 선입견과는 달리 함옹의 집안은 제사도 지냈던 전통적인 민족의식을 지녔기에 소년시절엔 혼자 교회엘 다녔다. 그나마도 평양고보에서는 모두들 놀려서 교회엘 안 나가다가 오산학교로 옮기고 나서야 학교 전체 분위기에 따라 열심이었으나 도일 후 우치무라의 영향으로 무교회 사상에 물들었고 정작 그가 이단적이었을 무렵 부모들은 신앙인이 되었다고 한다(<이단자가 되기까지>, 선집 5).

3. 규명되어야 할 쟁점들
저자는 함옹에게는 "교회나 기독교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속한 사회였고, 인류 전체였다"(183)는 관점을 취한다. 그의 기독교사상은 초기의 소박한 신앙에서 무교회 - 퀘이커를 거쳐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110, 재인용)는 단계로 승화해 버렸음을 저자는 입증하고 있다.(각주 1) 이렇듯 초기의 신앙에서 다른 단계로 옮겨갈 때마다 겪었던 함옹의 사상적인 고뇌를 저자는 알기 쉽게 추적해 주었는데 그 가장 중요한 계기는 바로 '역사적인 현실' 문제였던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즉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의 이데올로기로 뭔가 부족함을 느낀데서 우치무라를 따랐고, 분단 한국의 기형적인 정치사회 현실이 퀘이커로, 유신독재가 신앙보다 더 절박하게 온 몸을 내던진 투사적인 인간상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특히 이 평전은 함옹의 만년이랄 수 있는 1960년대 후반기 이후부터는 전반부와 달리 생생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아마 증인들로부터의 취재 덕분인 성 싶다. 여성관계 때문에 곤욕을 치른 비화(115. 알만한 사람은 다 알기에 비화랄 것도 없지만 모두들 쉬쉬 하니까!), 붓을 통한 현실비판에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의 변모 과정에 얽힌 안병무의 역할(132-4), 1988년 서울평화올림픽 위원장으로 추대된 삽화(152-3) 등은 이 저서에서 돋보이는 부분이다.
아쉬움도 없지 않다. 함옹과 기독교 사상의 연관성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서북지역의 기독교 신앙과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문제이다. 같은 기독교면서도 미국 북장로회가 선교를 맡았던 평안도는 보수적인 근본주의에 치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민통치 시기부터 서울지역의 기독교 세력과 대비를 보였던 이곳은 신사참배 거부 등 근본주의를 고수한 사건으로 유명했는데, 8.15 이후 월남하여 흥사단.천주교 세력과 손잡고 반 이승만독재 투쟁에 나섰고, 4월혁명 땐 잠시 집권세력으로 부상했으나 5.16은 이들을 다시 권력 주류로부터 밀어냈고, 장준하를 비롯한 이들은 반박정권의 핵심을 이뤘다.(주 2) 기독교사상사적으로 좀 더 규명되어야 할 사항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함옹이 언제부터 현실 비판적인 지성인으로 활약했으며 그 동기가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연구도 치밀한 접근을 요한다. <<사상계>>와 장준하와의 관계를 도외시하곤 불가능한데, 한 연구자에 의하면 이 잡지는 초기엔 이승만 체제 긍정과 반공, 자유민주주의 옹호가 주된 논조였다가 1956년 이후부터 반독재 논조가 강해졌다고 한다.(주 3)
저자가 부제를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에서>로 잡은 것은 함옹의 기독교 사상(신의 도시)과 민주화 운동(세속 도시)이란 두 측면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도였고, 그런 의미에서 이 저서는 매우 유익했다. 이제 함석헌의 전기적인 연구는 여기서 첫 출발해야 될 것이다. 기독교 사상가만이 아니라 역사학자, 시인, 민주화 운동가, 통일 일꾼, 평화사상가로서의 함옹의 전모를 보여주기 위한 주춧돌이 이제야 놓이게 된 걸 기쁘게 맞는다.

각 주
1. 저자는 함옹의 이 사상적 전환기를 1953년 시 <대선언>에서 찾고 있다(76, 98 두 군데서 언급). "내 기독교에 이단자 되리라 /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 미움은 무서움 설으고 무서움은 허깨비를 낳느니라. // 기독교는 위대하다 /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다 /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대선언>, 한길사 <<함석헌전집>> 6권 257쪽)란 구절은 너무 유명하다. 바로 1953년 7월 4일의 일이다.

2.김상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 엘리트의 형성>, <<역사비평>>, 1998 여름호 게재, 참고.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으로 이어지는 함옹의 정신사적인 영향 역시 이런 맥락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나 장면. 강영훈. 백낙준. 김옥길. 한경직. 조영식. 장준하. 양호민. 김준엽. 신상초. 황산덕 등 각계 거물들과, 특히 <<사상계>> 주요 필진이거나 편집위원을 감안하면 이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3. 한상구 <1950년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내용 -<<사상계>>를 통해 본 1950년대 지식인들의 지적 구조와 그 내용>, 유병용 외 <<한국 현대사와 민족주의>>, 집문당, 1996, 114, 재인용.
박태순 <민주.민족이념을 추구하다 쓰러진 '사상계'>, <<역사비평>> 1997. 여름호 게재, 에서는 함석헌의 <<사상계>> 적극 가담 시기를 1956년으로 보고 있다.
유경환 <월간 '사상계'에 관한 연구 -- 기둥 잘린 나무>, 2000. 8.18. 한국언론학회 언론사 연구 모임 발제 논문,에서도 함석헌은 이 잡지에 1956년 4월호부터 집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황해문화>>2001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