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부패와 불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개인은 권력에 의해 소외되어가거나 처벌받기 일쑤다. 독재자가 정권을 장악한 사회에서, 조국이나 인류공동체에 대해 올바른 의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개인은 불가피하게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고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긴 삶을 강요받게 된다.” - 김성수 <함석헌평전> 중에서
함석헌(1901~1989)은 국내적으로는 국가폭력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국제적으로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마음대로 침략하고 괴롭히는 20세기를 살다갔다. 그는 아버지가 명망 있는 한의사였기에 구한말의 동시대인과 비교해 비교적 여유 있는 환경에서 자라고 공부할 수 있는 특전을 누렸다.
강남의 8학군보다도 유명하다는 관립평양고보에 그가 입학한 것은 1916년. 이곳을 착실히 다니고 체제 순응적 인간으로서 조용히 살았다면 일제하에서 조선인으로서 그의 세속적 출세와 물질적 풍족은 쉽게 보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약속의 길, ‘젖과 꿀이 흐르는’길을 그는 18세의 나이에 벌써 기꺼이 포기했는데, 그것은 곧 3.1운동에 ‘운동권학생’으로 그가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1970~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3.1운동이라는 ‘데모’에 참여한 그는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아니 그가 복학의 길을 포기했다. 너무나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잘 타서 ‘시골 촌색시 같다’는 말을 듣던 그였지만 일본 순사의 발길질과 칼날 앞에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세상에 죽기로 작정한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장되고 편안한 길, 탄탄대로를 일부러 버리고 진탕 길을 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건만 그는 기꺼이 이 질퍽한 고난의 길을 택했다. 그에게 ‘출세’할 기회는 그 후에도 많았다. 1923년 또 조선청년으로서는 드물게 그는 동경유학길에 올랐고 1928년 동경고등사범을 마치고 귀국했다. 모교인 오산고등학교에서 그는 10년간 역사교사를 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철저히 일제에 비협조적인 식민지 지성인이었다. 일본식민정책에 머리를 숙이고 적극적으로 협조만하면 ‘찬란한’ 그의 장래는 또한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10년 동안 일제식민통치에 저항하면서 평교사로 있는 동안 그의 ‘눈치빠른’ 후배들은 알아서 일본제국주의에 기었다. 그래서 그들 중 몇몇은 그가 10년 동안 그저 평교사로 있는 동안 장학관도 되고 관리도 되면서 ‘출세’와 ‘성공’의 고가도로를 달렸다.
1919년 제적 학생이었던 그는 약 20년 만인 1938년 해직교사가 됐다. 한국역사와 한국어를 대신하여 일본역사와 일본어를 가르치기를 거부한 그에게 일제가 내린 보복의 칼날이었던 것이다.
1945년 해방의 순간을 맞기까지 그는 2년여의 감옥생활을 4번에 걸쳐서 겪었다. 2남5녀의 가장으로서 교도소 생활을 밥 먹듯이 했던, 가장을 잃어버린 함석헌 가족의 고통을 이 지면에 다 담기는 불가능하다.
1945년 해방이 왔을 때 그는 밭에서 똥지게를 메고 거름을 주던 농사꾼이었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그는 북한에서 조만식과 함께 민족지도자로 추대된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깐 조만식과 함께 소련공산정권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던 그는 신의주 학생 의거 배후인물로 몰려 몰매를 맞고 총살 직전 죽음의 문턱까지 가고 또 다시 수감된다. 해방된 조국에서 애국자가 또 다시 수감된 것이다.
출세와 세속적 성공을 원했다면 그에게 또 기회가 있었다. 해방직후 그는 북한의 문교부장을 지냈고, 신의주학생 사건 뒤 출옥 후에도 그는 김일성 대학의 교수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북한정권으로부터 받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1947년 월남하기까지 그는 소련군정하에서 또 3번의 수감생활을 하고 재산은 전부 몰수당하는 ‘알거지’가 된 것이다.
자유가 많다는 남한에서조차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감옥 문을 들락날락 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쳐서 1947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그는 끊임없이 교도소, 경찰서, 연금 생활을 반복했다.
그가 내세운 것은 두 가지, 사랑의 길(타 종교에 대한 포용)과 자유의 길(정치-사회적 민주주의)뿐이었다. “예언자는 그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처럼 그가 살며 추구하던 가치는 그가 사랑하던 조국에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979년과 1985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서구 퀘이커교도들에 의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어린 시절 상대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와 그 가족의 삶은 고난과 가난의 연속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한 고위 관리가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그에게 추석 때 쌀 한 가마니를 보내왔다. 그는 쌀 한 톨 손대지 않고 그 쌀가마니를 즉시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의 생애는 불의에 의해 계속해서 외적 수난과 물질적 고통을 받았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분노나 원한의 사람이 아니라 온유하고 유연한 사람으로 남았다. 불의하고 부패한 권력은 끊임없이 엄청난 물질과 막강한 감투로 그를 유혹했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변함없는 ‘아니’였다.
국제투명성기구의 2007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한국은 10점 만점에 5.1점으로 180개국 가운데 43위에 그쳤다. 이 수치는 OECD 30개국 평균 7.18에 훨씬 못 미친다. 이 수치는 아시아에선 싱가포르, 홍콩, 일본, 마카오, 대만에 뒤지고 말레이시아와 동률이다.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사실에 비춰보면 우리나라의 갈 길이 아직도 초라하고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여간 탈세한 억만장자가 한국인의 ‘성공신화’로 받아들여지고 권력의 정상에 오르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온갖 부정부패 그리고 불의의 유혹을 ‘아니’하고 가만히 거절한 바보새 함석헌을 이 불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에 간절히 그리워한다.
김성수 박사 <함석헌평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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