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함석헌과 한국역사

와단 2008. 10. 23. 14:44

함석헌과 한국역사


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Record governs memory)”


“영원의 실패라는 것은 없다. 몇 번을 실패하더라도 역사가 무의미로 끝나지 않기 위하여 항상 다시 노력할 의무가 남아 있다.”1)



서문을 대신하여 : 한류의 원조


1970년 4월 19일, 4.19혁명 10주년에 함석헌(1901-1989)은 남들 같으면 은퇴 후조용한 삶과 여가를 꿈꿀 때 70세의 나이로 <씨알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했다. 언론의 자유가 얼어붙은 험악한 시절에 그는 “자유언론 없으면 죽음” 이라는 일념으로 “돈도 되지 않는 잡지를 사재를 털어서” 시작한 것이다. 시대정신을 읽는다는 차원에서, 언론의 자유가 억압되던 이 시대, 그는 “신문은 현대의 성경”이라며 정의감이 팽팽한 배고픈 언론인의 역할을 극찬했다. 그러나 물론 이 말은 현재 가진 자들의 대변자로 변절된 재벌언론들에게 적용되는 표현은 결코 아니다.

        하여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남긴 독일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사고, 생각, 존재자체 그리고 인간관계를 결정한다. 그래서 자유로운 언어가 없는 곳에서는 자유롭고 기발한 생각, 사상, 감정표현이 싹틀 수 없다. 이래서 나는 자유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온 삶과 정열을 던진 함석헌의 덕에 오늘 우리가 ‘한류’를 누리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아마데우스>를 보면 권력자(국왕)의 수준에 의해 예술의 수준이 결정된다. 모차르트가 천재성을 발휘해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은 음악의 문외한인 국왕의 허가가 없으면 제대로 공연한번 못하고 곤경을 겪는다. 즉, 한 시대 예술의 수준이 “예술엔 일자무식”인 권력자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만다. 한국에서도 표현의 자유가 말살되던 시절엔 그래서 신동이라 불리던 하명중의 형 영화감독 하길종(1941-1979)도 질식할 것 같은 창작의 제한에 화병으로 요절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록 가수, 작곡가 신중현(1940- )도 무자비한 국가폭력과 정보부원의 고문과 압력으로 음악생활을 중단 하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래서 인간정신과 문화의 활발한 발전을 위해선 자유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꼭 필요한 절대적 요소다. ‘북괴’를 ‘인간’으로 그리는 ‘공동경비구역'이나 '웰컴투 동막골‘, 군사정권의 부조리를 그대로 묘사하는 ’박하사탕‘ 과 ’실미도‘, 부모를 죽이는 장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공공의적‘, 유부녀의 정사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같은 방화들은 모두 표현의 자유가 이룩한 쾌거다. 철저한 표현의 자유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는 인간정신은 극대화 될 수 없다. 아름답고 멋있고, 다양, 엉뚱, 당돌한 생각의 꽃은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공기를 마시지 않고는 질식하고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 결국 노벨문학상은 요원한 꿈이 되고 만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이룩하기 위한 선봉에서서 불의한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함석헌의 모습은 마치 그를 “싸우는 사람”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사실 함석헌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함석헌은 궁극적 선을 향한 가장 치열한 저항의 한 복판에서도 생각하는 일을 끈질기게 멈추지 않았던 사상가였다. 20세기의 한반도에서 벌여졌던 국가폭력의 폭풍 앞에서 한 닢 낙엽처럼 바람에 날려 다닐 수밖에 없는 함석헌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글쎄요’로 대표되는 함석헌의 모호함은 ‘양 칼’이라 불렸던 그의 절친한 친구 김교신과도 비교가 된다. 김교신은 그 당시로서는 거구라 할 수 있는 1.8 미터의 장신에 기운도 장사였다. 김교신은 손기정의 스승으로 체육에도 많은 소질이 있었던 건장한 지성인이었다. 반면에 함석헌은 1.7미터가 조금 안 되는 키에 수줍음을 많이 타고, “평생 싸움한번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어찌 보면 연약한 갈대 같은 모습을 지녔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여성스러움(?)’ 혹은 김교신에 비해 현저한 육체적 열등감(?)이, 오히려 강인하지 못한 평범한 씨알들에겐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더욱이 이런 연약해 보이는 함석헌이 읽는 이로 하여금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2)나 <뜻으로 본 한국역사>3)를 집필 한 것을 되새기면 그의 인간적 매력이 더해진다.


역사, 지루한 이야기?


1960-70년대 학창시절을 거치며, 대부분의 필자세대들이 배워온 역사는 어떠한 것인가? 사실 역사관(觀)이라고는 없는 왕건이나 이성계 등 왕조사를 중심으로 한 암기과목이었고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었다. 이런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한국역사 가운데 섭리하는 궁극적인 존재의 뜻이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산에서 생선을 구하는 격이었다.

        내가 만난사람들 중에도 함석헌의 책을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여러 시험으로 얼룩진 ‘시험공화국’에서, 함석헌의 책이 각종시험에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진작 읽지 못했다고 털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함석헌의 글을 오늘 세대가 별로 읽지 않고 인생의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절을 그저 그렇게 보낸다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고, 어찌 보면 “정신없는 미래의 역군”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차라리 국가적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간 이런 함석헌에 대한 현실의 푸대접 속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의 글을 읽거나 과거에 그를 만났을 때, 필자를 포함, 많은 이들의 가슴이 심하게 박동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의 글과 말에서 요즘은 거의 잃어버린, 때 묻지 않은 한 인간의 순수함과 순박한 정열의 체취를 유감없이 맡을 수 있어서가 아닐까!

        <한국역사>를 읽으며 필자가 가졌던 감흥은, “어떤 역사가가 이렇게 역사책을 비장하고, 재미있고, 시원통쾌하고, 찡하고, 통렬하고, 감동스럽게 쓸 수 있을까?”이다. 최소한 필자에게, 암울하고 답답한 지난시대 속에서도, <한국역사>는 삶의 희망과 활력 그리고 비전을 보여주었다. 이 <한국역사>는 역사뿐 아니라 삶과 종교, 사회에 대해서도 방황하던 필자에게 어떤 관(觀)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관, 즉 함석헌의 정신은 험악한 현실을 헤치고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민족이 뼈아프게 생각해야 할 “역사적 짐과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런 면에서 <한국역사>는 나에게 매일 매일의 힘과 용기를 제공해 주는 끊임없는 에너지원이다.

        <한국역사>를 읽기 전엔 역사란 정말 지루한 주제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요즈음 혹자들의 주장처럼, “과거사를 갖고 웬 난리야”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한국역사>는 두 손을 불끈 쥐게 하고, 손엔 땀이 흐르고, 머리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어떤 숭고한 삶의 사명감과 각오마저 내게 심어주었다. 한마디로 필자가 역사에 대한 애정과 정열을 넘어서 역사에 미친 사람이 되게 해주었다. 지금 필자가 ‘과거사위원회’에서 몸담고 있는 것도 이렇게 보면 결코 우연이 아니고 다 함석헌의 덕이다. <한국역사>를 통해 필자는 또한 문학뿐 아니라 역사책에서도 저자의 감정이 이렇게 뜨겁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꼈다.

        한국사학계가 1980년대 식민사관을 어느 정도 극복 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 후 안타까운 점은 소위 실증주의[實證主義, positivism]의 노예가 되어 도무지 가슴을 울리는 역사를 오늘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실증주의가 현상의 배후에 초월적인 존재나 형이상학적 사변을 배격하고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강조하는 점을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가 물질적이고 동물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영적 존재라는 것 또한 부인 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실증적으로만 설명 할 수 있나? 또한 타인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과 심지어 생명조차도 희생하고 기꺼이 던져버린, 인류역사의 거대한 정신의 소유자들과 그들의 심오한 내면세계를 그저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난도질하여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물론 물질이 없으면 인간생존이 불가능하겠지만, 동시에 인간이란 존재는 실증적이고 유물론적 시각으로 만 설명, 이해되기에는 너무 복잡다단한 존재다. 이런 점에서 <한국역사>는, 특별히 1980년대 이후, 우리가 그동안 너무 유물론적 사고와 실증주의적 관점에만 외곬으로 빠져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한국역사>는 한국역사 뿐 아니라, 함석헌이 서있는 자리 그리고 그가 20세기에 겪은 고난에 찬 삶을 통해서, 세계사의 의미와 그 뒤에 역사(役事)하는 절대자의 뜻을 되새겨 보게 한다.

        요즈음에 시끄럽게 회자되는 소위 ‘효율성’이나 ‘경제논리’와는 다르게 함석헌은 도덕과 덕이야말로 앞으로 미래 새 시대를 이끌어나갈 인류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인류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도덕붕괴현상과 정신공황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그래서 <한국역사>는 풍요한 정신적 영양분을 제공해 준다. 인간의 삶에서 진정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넘치는 물질적 풍요와 하이테크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현대인이라는 우리들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기본적 가치, 뜻, 의미보다는 오히려 그저 “잘 먹고 잘살자”는 웰빙, 돈, 향락을 찾아 동물처럼 살아온 것 아닐까라는 의문도 든다. 어찌 보면 오히려 지난세기의 백범, 고당, 남강, 도산, 함석헌, 장기려, 장준하 같은 이들이, 구차한 자신의 안락과 생존보다는 공을 위한 더 높은 뜻을 품고 산데 반해, 최첨단의 시대를 산다는 21세기 인들은, 공적인 가치보다는 재테크를 통한 산술적 이득, 의미보다는 근시안적인 처세술과 생존(경쟁)에 더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쏟아져온다.

        재물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인심은 더 각박하고, 치열한 생존경쟁, 약육강식, 경제논리를 통해서 남을 짓밟고 그저 살아남는 것에만 몰두해 있다. 만물의 영장, 우주적 존재라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지고한 가치가 고작 잘 먹고 잘사는 일이 되어버렸다. 다른 원대한 사상이나 인류 보편적 이상을 가지지 못한 씨알이 온전히 나라를 이루고 세계를 이끌어 나갈 주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함석헌은 한국역사, 크게는 세계역사의 퇴락의 원인을 뜻과 이상의 상실에서 찾았다. 함석헌은 조선이 한때 일본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꿈과 이상을 상실한 필연적 대가라고 보았다.

        이 말은 꿈과 이상을 상실하고 근시안적인 현실, 생존에만 매어있는 민족은 언제든지 다시 다른 민족의 “보이지 않는 식민지”로 전락 할 수 있다는, 함석헌이 오늘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경고다. 누가 역사를 그저 ‘과거사’라고 만 하는가? 역사에서 뜻을 찾는 것은 한 개인, 한 민족이 자신에 대한 성찰과 존재이유를 찾는 것과 같다. 인간이 잡고 가야할 정신적 목표와 영적(spiritual) 이상은 모든 것을 물질과 효율성, 경제논리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4)



함석헌과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일본의 한국강점은 서구의 제3세계 강점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유럽의 아프리카 정복은 힘과 문화의 강자와 약자간의 일방적 케이오 게임이었다면, 일본의 한국강점은 다르다. 한일관계는 오히려 전통적으로는 한국이 큰형으로서 일본을 문화적으로 ‘개화’ 시켜주었던 관계였다.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 영향으로 서구문명의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근세의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뿐이다. 마치 마당쇠에게 오히려 사지를 결박당한 주인신세처럼. 이 말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 시키는 일이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화시키는 일 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는 말이다.

        문화의 힘이 없는 무력으로 만의 정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실패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그러니 일본의 한국강점은 일본 측에서도 골칫덩어리였다. 무력 외엔 한국을 정신문화적으로 굴복시킬 수 없었던 일본은 그래서 제갈공명이 맹획을 7번 사로잡아 7번을 놓아주니 그때서야 복종했다는 교훈의 실천이 무엇보다도 절실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굴복을 받아내지 않고 무력만으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계속 억압하고 그 강요된 체제를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이란 신비한 존재는, 김구 앞에 섰던 윤봉길이나 이봉창처럼, 왜장의 열손가락을 잡고 남강에 투신했던 논개처럼, 거대한 정신을 대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그저 초개(草芥)와 같이 버린다.

        그래서 일제는 일왕의 명령으로 거액의 자금과 고급인력을 대대적으로 동원, 한국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싹 쓸어버리고, 조선인에게 복종을 강조하는 일본 혼을 심어주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즉 황국신민 만들기인 정신개조 작업이다. 이러한 일제의 야심에 걸맞게,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지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은 동양최고의 대학이라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위해 당시 일본학계의 최고두뇌들을 총동원한다. 이것은 식민지 조선을 철저히 굴복시키기 위한, 요즈음 말 많은 대운하 프로젝트보다, 더 거대하고 막강한, 일제강점기 최대국가사업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5)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발족한다. 이 위원회는 조선인에 대한 왜곡된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민족의 ‘우수함’을 고취하는 한편 조선인의 열등성, 타율성, 정체성, 사대주의성과 게으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조선전통 민족정신이나 역사의식은 배제하였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왕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하면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 후 총35권, 전체 2만4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를 제작하는 데 일본정부의 막대한 자금과 최고두뇌의 역사학자가가 퍼부은 시간은 무려 16년이었다. 그 결과 1932년 일제는 마침 <조선사>를 마친다. 제작비용으로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여 편찬한 <조선사>는 이렇게 일왕명령으로 만들어지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직접관리, 운용됐던 당시 일제의 “조선정신 죽이기”를 시도한 최대국가사업이었다. 일본은 현명하게도 조선인을 무력으로 굴종시키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하여 일제는, 1932∼1938년 식민사관에 기초한 <조선사>(37책),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0종),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책)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는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펼쳤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의 일환으로 이렇게 한국사를 대폭축소하고, 한민족의 역사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항상 지배를 받는 피지배의 연속이라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역사를 당쟁으로 얼룩진 부패한역사로 규정지으며 일본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필연성’을 내세운다.

        이당시 일제하 국가기관의 설치, 조직 및 직무범위 등을 정한 제도인 관제(官制)를 보면 일제가 얼마나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이완용, 권중현6)을 앉히고 박영효7)·이윤용8)을 비롯해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위원회회장은 조선총독부 총독과 맞먹는 막강한 권력자인 정무총감9)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고문·위원·간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이때 수사관 3명중엔 후일 국립서울대학교 교수를 하며 일본식민사관을 계승한 역할을 톡톡히 했던 이병도(李丙燾: 1896-1989)가 포함되어있다. 훗날 함석헌이 ‘재야사학자’로 감옥 문을 드나들며 생활고에 허덕이며 갖은 탄압과 핍박을 받는 동안, 이병도는 심지어 1960년 허정(1896-1988) 과도정부 하에서도, 문교장관 등을 지냈다. 박정희정권 하에서는 5·16민족상, 대통령표창까지 받는 등 국사학계에 미친 그의 ‘공로’가 대외에 알려졌다. 이래서 함석헌이 한국역사를 “중추, 등뼈가 부러진 역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뿐이 아니다. 1960년대 이병도는 학술원회장을 비롯하여 각종 대학의 명예교수를 독차지했다. 한국사 발전에 기여한 ‘빛나는 공로’로 그는 충무무공훈장, 서울시문화상,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문화상 등등을 싹쓸이 하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학계의 대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 이유로 이병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숨도 쉴 수 없었고, 제대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아니 고개를 들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병도의 정신적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일제의 조선강점이 조선을 근대화시켜주었기에, 일제의 조선지배는 오히려 축복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정신대 공창” 발언이나, “조정래의 아리랑이 광기로 가득 찬 소설”이라는 발언을 거침없이 한다. 이런 논리를 가진 사람을 나를 비롯한 여기 않은 여러분들이 내는 소중한 세금으로 꼬박꼬박 월급과 연구비를 챙겨준다. 이것이 바로오늘 한국이 직면해있는 현주소다. 얼마나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인가! 이런 적반하장의 소리를 하고도 당당히 한국최고의 지성이 모였다는 국립대학의 교수를 하며 넉넉한 월급, 연구비를 받고, 가장 많이 팔린다는 수구재벌 일간지에 칼럼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역사는 이렇게 반드시 오늘 현실에 독이 되어서 돌아온다. 그래서 과거사 정리가 필요 없는 일이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역사를 경멸하는 민족은 반드시 그 역사로부터 경멸을 받는다. 잘못된 과거를 가지고 잘된 미래를 꿈꿀 수는 없다. 인간은 싫으나 좋으나, 긍부정에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역사적인 존재다. 콩 심은 곳엔 반드시 콩이 난다. 이병도를 심은 곳에는 이영훈이 나오고, 박정희가 5.16을 심은 곳에는 곧 전두환의 5.17이 나온다. 이것이 역사의 필연이다.

        하여간 인간사의 도덕성을 철저히 무시한 이런 위험한 괴변은 600만의 유대인학살을 정당화한 히틀러의 선전상 괴벨스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가난한 이웃집 아빠를 내가 때려죽이고, 그 집 아내와 딸을 강탈, 강간한 후, 근대화를 시켜주고, 돈을 많이 벌어다주면, 그 살인, 강탈, 강간행위가 정당화 되고 ‘축복’이 되는가? 일제식민지정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우리를 근대화시켜주고 잘 살게 해주었기 때문에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정당화 하는 것은, 곧 인간생명과 존엄성을 벌레같이 짓밟으며 히틀러, 스탈린이 거둔 소위 경제적 성공을 정당화하고 축복이었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우주보다 귀한 한 인간의 생명”을 도구화하고 마음대로 빼앗은 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정당화 되어서도 안 된다. 인간사회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하나도 도덕성, 둘도 도덕성, 셋도 도덕성이고, 그리고 함석헌 사상의 뿌리도 역시 도덕성이다.

        하여간 위에서 살펴본, 일제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설립은 곧 일제식민정책이 단순한 무력적 탄압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고도화 된 계획과 계산에 따라, 한국사를 다시 만들려고(왜곡) 나아간 것을 의미한다.



함석헌의 고민, 시대의 고민, 그리고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이렇게 일제가 조선사편수회 프로젝트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조선정신을 말살시키는 상황에서, 식민지 지식인 함석헌은 무력감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조선인은 누구인가?” 라는 처절한 자아발견의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민족 정체성의 위기, 자아상실의 위기가 도래 한 것이다.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정체성, 정신의 파괴이고, 한 개인과 민족의 총체적 몰락이다. 아무리 용맹한 장수도 실성한 상태에선 전쟁터에서 제대로 싸울 수 없고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함석헌은 고민했을 것이다. “군사력, 무력이 약한 개인이나 민족은 과연 열등한 존재일까?” 그리고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사명감, 문화, 역사의식 없이는 한 민족의 자의식, 정체성이 붕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아를 상실한 지식인은 그저 혼돈과 갈등 속에서 방랑 할 수밖에 없다. 염상섭의 <만세전>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인화는 함석헌과 동시대인이다. 그는 암울한 일제무단통치하에서, 그저 자신의 공허함과 번민을 달래기 위해 일본매소부(賣笑婦)를 찾아 희희낙락 찻집에서 시간을 보낼 뿐, 실의에 빠진 민족의 앞날을 위해 아무런 비전과 희망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실로 연약하고 기죽은 식민지지식인의 전형을 우리는 이인화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지식인의 책무 중 에 하나가 절망과 실의에 빠진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권리와 입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면, 함석헌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사명을 일깨워 주기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함석헌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민족으로서의 자아발견을 고민하던 1930년대는, 우리에게 오늘 21세기 신자유주의와 미국일방주의 세계질서의 가치가 창궐하는 시대에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알카에다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침공한 미 제국주의에게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자 지식인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국의 이완용(1858-1926), 송병준(1858-1925)처럼 “애국에서 매국으로” 발 빠르게 변모하여 친일파, 친미파가 됨으로서 대동아공영권, 즉 미국의 신세계질서에 재빠르게 편입되어야, 우리민족이 잘 먹고 잘산다는 논리를 열렬히 강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제하 약산 김원봉(1898-1958) 이나 이동휘(1873-1935) 같은 독립 운동가들이 무력게릴라전을 펴서 ‘슈퍼파워’ 일제에 대항했듯이, “최후의 일인까지”, 총칼로, 무력으로 미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는 이, 총에는 총인가?



역사! 금지된 단어


함석헌은 이완용의 길도 이동휘의 길도 아닌 제3의 길을 택했다. 이 제3의 길은 요즘 말로하면 기울어 가는 역사를 홀로 ‘바로세우기’였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조선역사’는 곧 금지된 단어였다. 조선인이 조선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허망하고 위험한’ 꿈을 꾼다는 것은, 곧 총체적 패가망신에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막대한 물적, 인적지원을 받은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조선사편수회의 35권, 2만4천 쪽,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여 편찬한 <조선사>! 그에 대항해, “변변한 참고서 하나 없는 시골학교” 역사교사 함석헌!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저 파리한 염소처럼, 그 빈약한 자료를 씹고 또 씹는” 절박한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었다. 편수회의 <조선사>와 함석헌의 <조선역사>의 싸움은 물량적, 세속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골리앗과 다윗, 사자와 아메바, 빌라도와 예수의 싸움이었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는 그저 ‘몸부림’이었고 꿈틀거림이었다. 당시의 세속적 눈으로 비교하자면, 무명의 예수는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력자 빌라도와 결코 비교가 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상대다. 그러나 2천년 역사의 용광로를 거치고 난 지금, 빌라도가 인류사에 끼친 영향은 예수의 그것과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선사>의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압도적 물량공세 탓인지, 함석헌은 “이것(조선역사)은 역사책이 아니라 내 기도다.”라고 절규했다. 이 몸부림의 과정에서 함석헌은 “십자가에 달리는 한국“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패자를 위한 역사 - 못났기 때문에 잘난 씨알, “뒤로돌아 앞으로 가!”의 역사이었다. 더불어 우리민족이 세계인류 죄악의 짐을 기꺼이 질 사명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끝이 안보이던 고난 속에서도, 함석헌은 한국역사 속에 나타난 절대자의 섭리를 찾으려 했고, 그 섭리를 통해서 조선인이 결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아들 예수”와 같이, 세계사의 모든 죄와 짐을 지고 가는, “수난의 여왕”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역사>는 한국역사를 일제의 무력사에 대항해, 정신사를 중심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어린 마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넣어주고자 씹고 또 씹어 젖을 내보내고자 혼신의 힘으로 책을 쓴 함석헌은, 자기모멸과 절망에 빠져 신음하는 식민지 치하 씨알들에게 이렇게 희망을 북돋아 주고자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한국역사를 거의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씨알들에게 낙관적으로 보는 지혜와 눈을 뜨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래서 함석헌의 <조선역사>는 어두운 시대에서도 실 낫같이 가느다란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조선사의 의미와 뜻을 밝혀주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영원의 실패라는 것은 없다. 몇 번을 실패하더라도 역사가 무의미로 끝나지 않기 위하여 항상 다시 노력할 의무가 남아 있다.”10) 고 강변 한 것이다. 당시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던 시대에, 함석헌은 조선인의 가능성과 자부심을 보여 줌으로서 한반도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웅변적이고 서사적으로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만주, 1930년대 동양의 서부


함석헌은 용맹스럽게 만주 벌판을 내달리던 고구려의 갑작스러운 멸망을 ‘요절’로 아쉬워하며 이것을 두고 5천년 역사상 가장 아프고 쓰린 일이라 하였다. 혹자들은 ‘평화주의자’인 함석헌이 왜 그토록 만주에 연연하는지를 비판한다. 그러한 비판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1930년대 만주는 조선인들에게, 19세기 미국과 같이 개척해야 할 여지가 많은 희망과 개척의 땅, 즉 동아시아의 서부와 같은 개척정신이 심화된 상징적 지역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주권을 빼앗긴 조선인들에게 만주는, 일제폭정으로부터 간섭받지 않은 “꿈과 기회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보였다. 함석헌은 이러한 만주의 모습을 통해 조선민족에게 꿈, 기회, 긍지,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한 민족, 특별히 억압받는 한 민족이 주눅 들지 않고 기상을 펴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존감, 긍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는 민족은 발전할 수 없다. <한국역사>는, 필자가 대영제국에 10년을 살면서도, 돈이 없어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영어를 영국인 만 큼 못해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왜 나를 절대자가 한반도에 태어나게 하였는가를 진지하게 숙고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함석헌이 심어준 자존감과 긍지를 갖고 살다보니, 없던 돈도 여기저기서 막 들어오는 등,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비난을 받는 함석헌의 사상이 얼마나 현실생활에도 실제적 힘과 도움을 주는 사상인지 필자는 피부로 실감했다. 물론 <한국역사>를 읽을 때마다 한숨과 분노가 나온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런 분노와 슬픔 속에서도, 한국역사에 담긴 뜻과 의미를 생각하며, 조용히 함석헌의 무서운 낙관적 사관에 수긍을 느낀 적이 더욱 많다.

        함석헌은 단순한, 그러나 무서운 낙관주의를 견지하며, 불의한자는 아무리 강해도 망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역사적 낙관주의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노골적이고 직설적이게, 또 때로는 서사적이고, 사색적이게 기도하듯 써놓은 <한국역사>에는 함석헌이 보여준 한국인의 자신감과 사명의식이 비쳐진다. 내 개인, 혹은 내가 속한 민족이 세계사에서 가지는 참 뜻과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가진 사명을 다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확신도 든다.

        일제강점기 함석헌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민족이 처한 고난의 역사를 승화시켜내는데 있었다고 평가한다. 함석헌은, 비록 조선 사람이 일제강압에 눌려 살고 있지만, 조선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궁극적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어두움이 진하다는 것은 그만큼 빛이 밝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봄이 가까이 오듯이.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한국이 폭력의 세계를 도덕의 세계로 변모시키며, 인류의 죄를 대신지고, 세계사의 하수구가 되어서 더러운 것들을 기꺼이 모두 받아주고, 처리해 줌으로서 인류를 정화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사관은 결코 자기 체념적 숙명론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속에서만이 절대자의 섭리를 발견한다.” 는, ‘패자’의 희생을 통해서만 온 인류역사를 생명과 생동이 넘치는 것으로 한 단계 상승시킨다고 역설한다. 그럼으로 힘과 무력이 아닌 뜻, 정신, 인, 도덕이 인류를 이끄는 기본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뜻으로” 봐서 문제인가?


1987년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야권이 분열, 낙담하고 실의에 빠졌을 당시, 함석헌의 녹화강연을 찬찬히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 옴을 느낀다. 비록 20년 전의 녹화강연이지만, 그 강연이 20년 전의 강연인지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강연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다. 그 말은 지금의 현실과 닮아있는 일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다만 당선인만, '태우'에서 'MB'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적어도 내게는 1987년 강연에서 함석헌이 줄기차게 한가지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것은 “희망을 포기하지 맙시다.”이다. 이렇게 어느 시대나 희망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함석헌은, 그래서 1930년대도 희망을 잃고 “어두움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는” 식민지 조선인에게 희망을 주기위해 기독교 유일신의 입장에서 <조선역사>를 썼다.

        그런데 형제가 서로 죽이는 한국전쟁과 기독교정권이랄 수 있는 이승만 정권을 겪고, 함석헌은 <조선역사>의 “성서적 입장”을 <한국역사>에서는 “뜻으로 본”으로 가차 없이 바꾸어 버린다. 이런 함석헌의 ‘바꿔’사건을 놓고 함석헌이 외로워서 Populism(인기영합주의)에 편승한 것이라는 지적도 물론 있을 수 있다. 한 양심적 지성인의 발언이 한때는 대중으로부터 뜨거운 열광과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때로는, 똑같은 발언이, 대중으로부터 철저한 냉대, 냉소, 소외와 질책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지성인이 정말 ‘양심적’ 인물이라면, 그는 대중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해야 할 말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쓸 것이다.

        예수의 나귀 탄 예루살렘 입성을 놓고도 여러 반응이 있었다. 초라한 입성에 실망한 시각, 마침내 ‘해방자 예수’ 의 도래를 믿고 승리의 감격에 열광하는 시각, 새로운 권력쟁탈자의 등장으로 보고 경계하는 시각 등등. 그러나 어쩌면 이런 시각들은 예수 자신과는 아무상관이 없다. 인간은 한 사건에 대해 여러 해석을 내릴 수 있고 그래서 또한 해석은 자유의 영역이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아는 예수는, 그저 “아버지의 뜻”이라서 “그 뜻을 이루고자” 예루살렘 입성을 한 것뿐이다. 내가 아는 함석헌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함석헌은, 자신의 말과 글이 씨알의 찬사를 받건 비웃음을 받건, 권력자가 좋아하건 저주하건, 그는 단지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공(公)을 위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쓸 뿐이다. 그자신의 ‘변명’을 보면 이렇다. 왜 그가 지금도 회자가 되는 그 ‘바꿔 사건’을 일으켰는지.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 더구나 무교회 신자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11)

        1960년대의 함석헌은,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고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편애를 벗어나야 하는 단계에 오게 된 것이다. 이런 함석헌의 글은, 28년 전 기독교근본주의에 심취하여, 독선적이고 배타적태도로 타종교를 대하던,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당시 20대 청년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리고 그 칼은 지금도 여전히 박혀있다.

        함석헌이 <조선역사>를 <한국역사>로 고쳐 쓰던 1961년 겨울. 기독교사상가 함석헌이 서울근교에 흔한 개신교기도원이나 서울시내 지인사무실보다는, 고려의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이 보존되어있는 합천해인사를, “바꿔 사건”의 산실(産室)로 선정한 것도 그저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해인사경내를 거닐며 그는 불교와 기독교, 동양과 서양, 도시와 산골 등의 주제를 놓고 여러 생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때는 겨울이니 한나절 눈이 내렸을 것이다.

        그때 경내구석구석 조용히 떨어지던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통찰력과 감수성이 남다른 함석헌이 갑자기 이런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눈은 어디든지 내린다. 더러운 곳이라고 피하지도 않고 깨끗한 곳이라고 더 내리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해가 악인과 선인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인과 불의한 인간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12) 이런 단순하고 평범한 자연현상의 원리에서, 함석헌은 편파적 보다는 보편적, 배타적 보다는 포용적 사랑의 원리, 우주근본의 원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사색과 깨달음을 겪은 후에 함석헌은, 기독교 색채가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독교적 입장을 떠나 우리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한국역사>를 생산해냈다. <한국역사>는 <조선역사>에 비해 기독교의 보편성을 강화해 나간 함석헌의 사상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역사>는 그래서 비록 함석헌의 사관이 기독교역사관에서 출발했지만 궁극에는 어느 한 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편-총체적사유의 지평선에 다다른 그의 정신여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산의 정상을 올라간 등산객이 아래를 내다보며 고백하는, “정상에 오르는 길이 내가 온 길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는 깨달음과도 일치한다. 그러니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구도자는, “결국 모든 종교는 그 근본에서는 하나.”라는 함석헌의 결론과 일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함석헌은 근본적 기독교인들이 선민(選民)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최고라 여기며 타종교를 이단, 사탄시하는 일을 제국주의 종교형태라고 역설하며, 편협한 종교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이 없는 편파적인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보편주의라는 역사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지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말한다, “사회구원 없이 개인구원 없다. 다 같이 가는 데가 어디일까? 의인, 죄인, 문명인, 야만인을 다 같이 구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유신론자, 무신론자가 다 같이 믿으며 살고 있는 종교는 무엇일까?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13) 라고.

        또, “성당ㆍ법당 안에서만 경건하고 눈물 나고, 나오면 곧 말라버리는 그런 믿음, 우주 하나를 찢어 열 개 스무 개로 만드는 종교, 몇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불쌍한 사람을 영원히 가두어두려고 지옥을 마련하는 종교, 그런 따위 귀족주의 종교는 이 앞으로는 사라져야 한다.”고 역설한다.14) 부분보다는 전체를 바탕으로 한 통합적사고와 포괄적 전망.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편협하거나 독선적이기 보다는 다름을 아우르는 관대함을 <한국역사>는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하나님을 “교회에만 가두어 두기엔 너무 큰” 존재로 이해한다.



인류는 유기체 - 민족주의와 국가지상주의 극복


1930년대 일본군국주의가 팽창해가는 시기에 자아발견, 민족정체성 붕괴위협을 느낀 함석헌은 민족주의를 강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국가지상주의, 국익이라는 대명제하에 전쟁을 불사하는, 제국주의국가들의 모습을 보고 함석헌은 민족주의와 국가지상주의의 모순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민족주의는 아닙니다. 세계주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계라도 인격 없는 역사, 문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은 특정적이지 일반적이 아닙니다.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나는 나여야 할 것입니다.”15)는 고백을 선포한다.

        나와 내 가족, 내 문화, 내문명이 귀한 것처럼 남과 남의 가족, 문화, 문명이 동등하게 귀하다. 한국인에게 김치가 소중하듯이, 영국인에게 치즈가 소중하다. 내 종교, 나라, 민족이 소중한 것처럼, 남의 종교, 나라, 민족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함석헌이 <한국역사>를 통해 오늘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었다. 이렇게 함석헌은 식민사관과 민족주의사관을 보편주의사관으로 극복하였던 것이다.

        지구공동체로서 타문화와 이웃처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좁아지는 세계 속에서 이제 나 혼자만이 잘 살 수는 없고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내 문화와 가치관만 강요할 수는 없다. 이타주의, 포용주의가 어쩔 수 없이 이시대의 갈등과 문명충돌을 풀 수 있는 최대의 열쇠다. 그래서 함석헌은 일찍이 ‘같이살기운동’을 펼치며, “공동훈련 안하면 씨알노릇 못한다.”고 역설하고 한 때는 씨알공동체를 세우기도 한다. 노자가 “도가 어디 있는가? 전체에 있다.” 한 것처럼 함석헌은 진리는 독점 될 수 없고, 독점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함석헌은 몇몇 집단이나 사람만을 위한 특별한 가치보다, 수많은 씨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가치가 더 중요하다도 느꼈기에, 다른 종교와 이념을 가진 사람들도 기꺼이 포용하고 그들과 가까이 대화했다. 그래서 함석헌과 가까운 지인 중에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보수적인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 장기려(1909-1995)도 있었고, 급진적인 ”통일의 아버지“ 문익환(1919-1994)도 있었다.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김동길, 이문영, 안병무, 김용준도 함석헌의 주위에 있었을 뿐 아니라, 스님 법정과 무신론자 송건호도 함석헌과 가까이 지냈다. 이것은 함석헌의 사상적 범위뿐 아니라 인간적 교제의 폭이 그만큼 넓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전체(모든이)의 제단에 바쳐서만 보존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가족 - ‘희생’의 다른 이름


혹자는 함석헌이 가족사에 무관심했다고 비난한다. 그럼 의인과 그의 가족이 난세에도 호의호식해야 된다는 것인가? 함석헌을 포함 현대사의 인물들의 공통점을 보면 김교신, 장준하, 김구 같은 분들이 나라와 씨알을 위해 삶을 바친 만큼 그들의 가족들은 관심대상에서 철저히 외면되어 너무나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 나라의 긴박한 현실이 그들이 두 가지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함석헌의 경우도 그의 가족사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 함석창(咸錫昌)은 일본 구주대학(九州大學) 영문과를 졸업한 당시에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으나, 형과는 달리 오하라(大原)라고 창씨를 하고 일본에 협력하며 후에 일본 점령하의 만주안동성의 부성장까지 역임하였다. “먹고살기 위해” 일제하 80%의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했던 상황에서, 함석헌이 선택한 길이 누구에게나 강요하기엔 너무 고되고, 전적인 가족의 희생을 요구하는 험난한 길이었지만 함석헌은 기꺼이 그 길을 택했고, 그래서 그런 함석헌과 그의 가족은 일제로부터 톡톡한 ‘죄 값’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불의와 편법이 강물처럼” 융성했고, 국가폭력이 난무했던 20세기 한국역사는 한국인들을 허무주의나 기회주의로 젖어 들게 한 면이 강하다. 한평생 옳은 일을 추구한 의인의 끝은 결국 자기희생과, 풍비박산(風飛雹散) 이라는 냉소주의적 풍토를 초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합천 ‘일해공원’이나 ‘박정희기념관’ 소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생명을 지렁이처럼 밟아버리는 독재자들을 여전히 수용하고 향수에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 닭 같은 감상주의가 이 땅을 지금도 휩쓸고 있다.

        기본적 도덕성마저 상실한 탈세한 억만장자가 선거에 압승하는 철저한 처세술과 도덕의 공동화가 오늘 한국인의 성공신화와 바람직한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위 ‘엘리트’들의 상당수는 일신과 가정의 행복을 위한 가치를 사회정의나 진리추구를 위한 가치보다 더 ‘숭고하다’고 여기며, 철저하고 이기적인 기회주의자로 자리 잡았다. 저지른 범죄에 대한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잃은 지 오래고 오히려 당당하고 뻔뻔하다. 그래도 교회봉사와 ‘성경공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열심히 한다고 한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기수였던 기독교는 그동안 쌓아놓은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는 관심이 지나치게 과열되어있되, 사회정치적 모순이나 부정부패 같은 문제에는 무감각해져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다. 아니 모든 생물은 자기 몸을 보존, 유지하고자 하는 자기보존의 보수성을 가지고 있고, 이보수성은 모든 살아있는 생물의 원초적 본능일 것이다. 그래서 자기와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뒤로 놓아둔 “원초적 본능”을 무시한 함석헌의 가족사는 한마디로 수난사였다. 나의 삶, 나의 가족만을 챙기고 남의 불행과 고통에 쉽게 눈감는 이기적인 오늘의 세태에서 함석헌의 철저히 자기희생적이었던 고난에 찬 삶은 그래서, 그의 사상의 체계성, 그의 말의 논리성, 그의 글의 학문적 검증유무를 떠나서,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마치는 말을 대신하여 : 이상주의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인이 민족으로서의 ‘자기발견’과 ‘자아실현“ 즉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사회학자 안토니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민족주의는 각 민족에게 확고한 비전과 정치적 응집력을 제공해 주며 대중적 열의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게 한다.”16) 그러므로 “민족에겐 공동으로 이해하고, 열망하고, 느끼고, 의식하며, 민족을 하나로 함께 묶어줄 이상적인 이념이 필요하다.”17) 민족의 분단을 넘어 통일을 이뤄야 할 지금(비록 통일부는 없어질 위기에 처했었지만), 우리는 어떤 이상과 비전을 가지고 통일된 한반도의 새 나라를 꿈꿀 수 있을까? 함석헌의 <한국역사>는 우리를 이런 물음 앞에 마주 서게 한다. 불의한 시대에 대한 비판!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생각! 정신적이고 영적 존재라는 인간이 항상 추구해야할 영원불변의 가치!

       역설적이게도, 함석헌이 한국을 놓고 파악한 “세계사의 하수도“ '패배자'로서의 민족개념은, 종래 서구제국주의 민족개념인 '성공', '승자'(특별히 전쟁에서의)와 같은 물리적 강자위주의 가치관에 정면도전이 된다. 동시에 세계의 다른 민족을 국가 간에도 이타주의를 바탕으로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함석헌이 제시한 민족개념은, 이렇게 기존의 승자중심, 강자위주의 민족주의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좀 더 이타적이어야 할 인류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민족주의론이다.    

        함석헌은 물리적 힘이나 군사력이 약한 민족을 열등한 민족으로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한국인만이 세계인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 있다고 느꼈다.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존재인 나는 누구인가?", "수난의 여왕인 한국인은 누구인가?" 라는 함석헌의 질문은 세계사 안에서 억눌린 자, 탄압받는 자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그의 혼신을 다한 자아실현의 외로운 분투였다. 이런 외로운 분투작업을 통해 함석헌은 고난당하는 우리민족은 왜 오늘여기에 있으며 우리가 장차 앞으로 나아갈 길은 무엇일까를 모색했다.

        사람은 내가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나온 이력, 과거사, 즉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함석헌의 가치는 민족이 처한 말 못할 고난상황에서 처음으로 유신론에 바탕을 둔 통시적 역사관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치열하게 던졌다는 데 있다. 자기인식은 역사의식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개인적 물음은 자기가 역사적으로 공간적으로 속한 공동체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대답되고, 이 물음은 다시 우리가 걸어온 길, 즉 역사를 통해서 대답될 수밖에 없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그리고 암살과 민간인 학살이 판을 치던 해방공간과 이승만 정권, 뒤이은 국가폭력이 난무하던 군사독재시절. 또다시 고난과 핍박에 내몰린 우리 씨알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위로, 사명감, 민족정신과 자존심이었고, 역사의식의 고취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의 험난한 인고의 세월을 살았던 씨알들에게 고난은 극복해야 할 것이고, 그 뒤에는 우리의 사명이 있다는 함석헌의 말과 글은 곧 힘이요 궁극적 희망이 되었다.

        함석헌의 힘은 그의 삶과 사상을 현재라는 나무에 접목시킬 수 있는데 있다. 글자 밖으로 생생하게 튀어나오는 그의 산 정신을 읽을 수 있고, 지나간 역사가 산 현재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 함석헌을 통해 필자는 한국역사와 나 개인의 존재가 밀접히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함석헌의 삶과 정신은 작게는 각 씨알의 작은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크게는 한국민족의 거대한 앞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물량주의와 기회주의의 가치관이 팽배하는 이 시대 속에서도, “건국 후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운동가”로 함석헌(77%)이 1위로 선정되고18), 대학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20종에도 <한국역사>는 선정된다.19) 심지어 경제논리만 앞세우고 시의 세계와는 멀어 보이는 이명박 당선인조차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애송시라고 답하는 현실이다.20) 그래서 감히 단언 할 수 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함석헌의 사상과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씨알의 가슴을 울리고 한국역사와 더불어, 영원한 ‘씨알의 소리’로 남을 것이라고.

        함석헌은 한국역사를 씨알의 입장에서 썼다. 기득권자나 가진 자의 통치논리가 아닌 소외된 이웃, 서민, 소수자, 패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시선으로 <한국역사>를 썼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나? 함석헌의 추종자 또는 제자들조차 최소한 기득권자나 “부자의 대변자”가 아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서민, 씨알의 대변자, 즉 “씨알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한국역사를 짊어지고 나갈 주체로서 씨알을 꼽는다. 씨알은 감투도, 돈도, 세력도 없으나 자기가 속한 시대와 사회에 대해, 자기의 세속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기회만 있으면 준엄하고 공정한 비판의 화살을 날린다. 인간의 가치 그리고 삶의 가치가 돈이나 경제보다는 훨씬 더 위에 있는 도덕적 가치라는 것을 삶으로서 일깨워준 이상주의자! 그것이 내가 보는 함석헌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그의 삶과 사상을 함께 공부하고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함석헌의 정신이 한국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다.




1) 함석헌. ‘11. 고려의 다하지 못한 책임-1‘, “성서조선”, 71호, 1934년 12월



2) 이하 <조선역사>


3) 이하 <한국역사>


4) 히브리서11장1절


5)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


6) (權重顯, 1854~1934) 을사오적의 하나이며, 을사조약 때 농상공부대신.


7) (朴泳孝, 1861~1939) 조선 말기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며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일본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


8) 이윤용(李允用, 1854~1939)은 조선말기 정치인이며 한일합방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했다. 이완용의 형.


9) 조선총독 아래에서 군사통수권을 제외한 행정, 사법권을 통괄.


10) 함석헌. ‘11. 고려의 다하지 못한 책임-1‘, “성서조선”, 71호, 1934년 12월



11) 굵은 글씨와 줄은 필자 첨가


12) 마태복음 5:45


13) 함석헌. “넷째 판에 부치는 말”, <한국역사>


14) 상동


15) 함석헌, ‘씨알‘ <씨알의 소리>, 1970년 4월


16) Smith, Anthony. National Identity, p.176


17) 같은 책. p.11.


18) 중앙일보, 2008.1.23


19) 뉴시스. 2008.1.31


20) “시를 읽는 계절”, 노컷뉴스 칼럼. 2007.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