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담긴 함석헌의 역사관
김성수 <함석헌평전> 지은이
시작하는 말
함석헌은 역사 없는 인간이나 인간이 소외된 역사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역사는 그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역사란 달리 말한다면 사관이다. 들여다보는 눈, 관점이다. 역사란 예술의 혼을 가진 장인의 벽화이지 재주 많은 사진가가 찍어놓은 사진일 수는 없다. 역사란 뵈는 대로 있는 그대로 찍어놓은 사진이 아니라 장인의 눈이고 장인의 손이며 장인의 마음인 셈이다. 보는 자리가 변함에 따라 그 보이는 바가 서로 다르다.” 즉 어떤 사관으로 역사를 보느냐가 그에게는 중요했던 듯하다.
1930년대 초반 역사교사 함석헌은 당시의 식민지 기독교 지성인으로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다. 그로부터 약 30년 지난 1961년 그는 자신의 고난사관엔 변함이 없지만 책의 제목을 ‘성서적 입장에서 본’에서 ‘뜻으로 본’으로 바꾸고 내용을 크게 수정한다. 한 세대라고 할 수 있는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함석헌은 왜 자신이 쓴 책의 내용을, 특히 제목을 고칠 수밖에 없었을까? 그의 역사관, 인생관, 종교관이 변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기세가 동아시아의 하늘을 찌르고 중국대륙을 침공하던 시기다. 1961년의 함석헌은 국제적으로는 일찍이 일본․독일․이탈리아의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멸망을 지켜봤고 국내적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와 이승만 기독교정권의 흥망성쇠를 체험했다. 이러한 시대 변동을 체험하고 지켜보면서 그의 사관은 변모한다.
1930년대 그의 사관이 기독교 중심사관이었다면 기독교 정권의 독식과 폭정을 체험하고 나서 그의 사관이 탈(脫)기독교적인, 좀더 보편적인 것으로 변모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1930년대 민족주의적 색채와 사조를 강하게 풍겼다면, 민족을 앞세운 국가주의 멸망을 바라보고 같은 민족끼리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은 이후 그의 사관이 탈(脫)민족적 색채를 띤 세계주의를 지향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판단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사사한 이해관계를 떠나서 사물과 삶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사람이었고, 이러한 사사로운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이었기에 시대의 고민을 직시 할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닐 수 있었다.
함석헌의 역사책을 통해서 그의 사관을 살피는 것은 한 순수한 자연인의 생각의 변이를 통해서 그 상대자 개인 뒤에 존재, 활동하는 절대자의 모습을 볼 수 있기에 의미가 있고 흥미가 있다. 성경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본다고 했고, 함석헌은 역사가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역사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역사관은 곧 그의 종교관이고 하느님관이고 인생관이고 사회관이다. 이런 측면을 염두에 두고 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담긴 함석헌의 역사관을 살펴볼 것이다.
첫째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은 자신과 민족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둘째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그는 상대자 인간이 절대자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을 역사라고 고백한다. 셋째로 그는 이 절대자와 상대자의 대화를 역사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러한 세 가지 면을 자세히 살펴보자.
1 나는 누구이고 한국인이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정체성 확립하기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함석헌이 삼십대 초반 『성서조선』에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그로부터 약 한 세대 뒤인 1961년 발표하면서 그 자신이 손수 고친 책이름이다. 초고에서는 한국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해방 후 재간행을 위해 원고를 흥미롭게도 기독교 기도원 같은 곳이 아닌 해인사에서 수정하면서 기독교 중심주의에 편향되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성서적 입장에서’라는 어구 대신 ‘뜻으로 본’으로 제목을 바꾼다. 1930년대와 비교해 1950~60년대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민감한 함석헌이 그 혼란․혼돈의 시대를 살면서 그의 생각에 생긴 변화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두 책의 제목은 바뀌었을지언정 바뀌지 않은 일관된 방향성이 있다면, 그것은 함석헌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줄곧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 확립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보았으며 그 고난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 “고난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의 입장에 서서 마치 예수라고 하는 하나의 개인이 인격으로 나타낸 것을 역사에서 하나의 민족에다가 적용해 보자는 것입니다.”1) 이런 그의 결의를 바탕으로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성서조선』에 연재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담긴 그의 역사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골자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 뒤라야 우리는 함석헌의 사상이 왜, 그리고 어떻게 변모하게 되었는지를 좀더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적 입장에 본 조선역사』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2) 이렇게 1930년대의 청년 함석헌은 세계 인류의 역사철학을 오직 성경의 관점에서만, 어떻게 보면 아주 독단․독선적으로 이해했었다.
일제는 식민 초기부터 한국인의 역사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의도로 한국역사 관계자료와 한국 위인 관련문헌들을 총괄적으로 압수하고 소각해나갔다.3) 이렇게 한국혼과 언어를 말살시키는 혹독한 제국주의 폭정을 고려하면, 함석헌에겐 철저히 기독교 중심주의 사관으로 몰입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아니면 유물론적 역사관이나 사회주의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철저한 기독교 중심주의 사관에 몰입함으로써 자신과 조국의 사상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분투했던 것이다.
정체성 발견을 위한 함석헌의 절박한 몸부림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저술할 당시, 그는 도서관에서 역사자료 한번 제대로 참고할 형편도 못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래서 자신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저술이 역사연구가 아니라 기도와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표현했다. 이 표현 역시 그의 다급한 상황을 반영한다. 궁지에 몰린 그가 기독교 신앙의 힘을 업고 어려움을 타개하려 한 것은 당연한 대응이다. 한마디로 그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과학적인 분석가의 머리로 쓴 것이 아니라 시인의 열정과 가슴으로 썼던 것이다.
강점기 내내 일제는 한국인의 역사의식 해체 작업에 몰두하여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난도질하고 씨알의 사기를 꺾고자 했다. 그래서 일찍이 1922년에 이르러 일제는 ‘조선사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한국인이 자주심이나 독립심이 결핍된 민족이며, 조선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에 불과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일제는 한국인이 스스로 한국의 역사나 지리를 공부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은 물론 그 관련자료를 압수하고, 한국 민족주의와 관련된 책자나 잡지를 간행하지 못하도록 금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이 왜 그토록 애착을 갖던 미술을 사치로 여기고 포기한 채, 압박 당하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결국 한국역사를 쓰기로 결심했는지 그 저간의 사정을 이해할 만하다. 그는 가혹한 일제의 폭정 아래에서 한국역사의 정체성 상실이라는 위기를 극복하고자 세계사의 맥락에서 한국사의 의미를 다시 음미하고 숙고하고 깊이 고뇌했다. 그리고 한국 고대사를 읽으며, 또한 일제 치하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하며,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쓸 수밖에 없는 역사가 바로 한국역사라고 절규하기에 이른다.
이런 그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회복 즉 자아발견은 너무나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였다. 그는 이렇게 그 마음의 조급함을 표현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이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일,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 일이 백 가지 병, 백 가지 폐해의 근본 원인이 된다. 나를 잊었기 때문에 이상이 없고 자유가 없다. 민족적 큰 이상이 없기 때문에 대동단결이 안 된다.”
일찍이 1928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래 오산에서 처음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과 민족의 정체성 위기를 느낀다. 민족에게 제시할, 그리하여 민족을 대동단결시킬 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예닐곱 해 전부터 중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젊은 가슴에 영광스러운 조국의 역사를 안겨 줄 수 있을까 하고 힘써 보았다. 있는 것은 압박이요, 부끄러움이요, 찢어지고 갈라짐이요, 잃고 떨어짐의 역사뿐이다. 4천 년의 한국역사는 굴욕과 좌절 그리고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왜 역사교사가 되었던가 하고 후회하기까지 한다. 한반도가 그 역사를 통해 내란과 외세의 침략을 포함해 100회 이상의 전쟁을 치렀고, 50회 이상을 외세의 발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었던 것을 돌이켜 볼 때 함석헌의 충격을 수긍할 만하다.4)
눈물의 이사야
그는 “이런 조국의 역사를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 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4천년 넘는 역사에 우리는 이날껏 태평 시대라는 것을 모른다. 이 나라 반만년 역사는 민중의 자유와 자존을 억눌러 온 사회적 폭력세력인 정치집단의 착취와 억압과 일관된 우민정책의 역사였을 뿐이기 때문이었다”고 절규한다. 그리고 철저한 자기분열의 과정을 겪는다. 훗날 또다른 글에서 그의 처절한 한국인으로서의 자기분열을 이렇게 쓴다.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튼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 못 낳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 타고르가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 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5)
그러나 성서를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함석헌의 눈은 결국 구약성경의 예언자 ⌈이사야서⌋에 멈춘다. 한국 민족의 고난을 그는 ‘이사야 53장’에서 예시하는 예수의 고난과 동일시했고 한국인의 고난을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의 고난과 나란히 비교했다.6)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도래할 메시아, 해방자의 고난을 이렇게 선포한 바 있다.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나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으나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슬픔을 당하였으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으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이사야 53장 2~5절).
이렇게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함석헌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기에 매달리는 한국을,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의 죽음과 동일시함으로써 한국인이 받는 고난에 의미가 있고 뜻이 있다고 해석했다. 함석헌은 이렇게 한국인이 역사를 통해서 고난을 받은 것은 단순히 한국이 군사적으로 열등하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성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을 ‘수난의 여왕’이라 부른다. 그의 역사관은 결국 세계역사에 있어서 한국뿐 아니라 어느 약자나 패자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인류 역사는 압도적으로 승자, 강자의 입장에서만 씌어졌고, 그래서 그 강자의 입장을 항상 정당화하고 변호하려는 것이 세계사였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는 한국인의 정체성 발견 그리고 역사의 의미발견과 더불어 한국인이 빼앗긴 만주벌판에 관한 함석헌의 통탄서러움이 표현되어 있다. 본문에서 구체적인 예를 하나 보면, 신라가 통일을 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본래 마땅히 될 것대로 된 것이 아니므로, 다시 말하면 참으로 이룬 것이 아니므로 한국역사는 고구려의 패망을 계기로 일대전환을 하게 되고, 그때부터가 비극의 시작이며, 고구려가 그 거인의 시체를 만주벌판에 드러내놓음으로써 한국민족은 고난의 연옥 길을 걷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중국 대륙세력과 일본 해양세력 사이에서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이 잘 들어맞는 역사 경험을 강요당해온 민족으로서 함석헌이 강대한 국가를 열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하겠다. 억누름과 부끄럼이 퍼붓고 한숨과 신음소리가 잇따라 나오게 되는 그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읽는 한국인의 가슴을 비장하게 만들고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고구려인의 후손이어서 그런지 또는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식민지하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초안을 써서 그런지 고구려와 잃어버린 만주벌판에 대한 그의 집착은 가히 대단하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렇게 함석헌이 상고시대로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한국역사를 기독교 고난사관의 관점으로 고찰하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느끼고 되새겨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거리와 의미를 던져준 하나의 질문서다. 그는 뿌리 없는 나무에 잎이 없고 열매가 맺지 못하듯이 상고사 없는 민족역사란 잎 떨어지고 열매 떨어진, 앙상한 고목만 남은 꼴이라 역설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질문, 문제 있는 역사는 대답을 제공해준다고 믿는다.
패자를 위한 역사
나는 한 영국역사 서적에서 백범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묘사한 것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 표현이 바로 승자의 관점에서 씌어진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속담처럼 1903년과 1905년 영․일동맹이 체결된 이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현재까지도 영국, 일본, 미국 등 강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제정치나 사관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았던 역사의 주인임에도 여전히 일부 사람들, 심지어 일부 한국인에게조차 야만스럽고 잔인한 종족으로 인식되곤 한다. 이렇게 약자 또는 패자의 역사는 강자의 힘에 무시되고 말살되어왔다. 힘의 논리에 따라 약자의 역사는 차츰 잊혀지고 강자의 발에 짓밟혀왔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함석헌은 제국주의가 하늘을 찌르는 1930년대에 이미 약자도 패자도 역사에 큰 공헌을 해왔건만 승자들의 독식에 의해 약자들의 공헌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논박한 것이다. 그래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그는 역설적인 논리로 어떻게 약자, 패자도 세계사에 공헌해왔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기독교적 신앙과 해석으로 논증했다. 이로써 그는 일제 식민치하에 억눌려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잔혹한 세뇌 공작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족으로서 정신적 자부심과 긍지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질보다는 정신이 인간 존재를 좌우한다는 전제가 사실이라면 정신이 쓰러진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그의 공헌은 이렇게 아사 상태에 처한 한국인의 정신적 가치와 고난의 의미를 예수와 동일시함으로써 한국인을 정신적 아사 직전 상태에서 인류의 구원자로 부활시킨 데에 있다.
더 나아가 그의 독특한 역사 해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억눌려 있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약자와 씨알에게 그들의 사명과 비전이 무엇인지 제시해주었다. 또한 기존의 역사관에서 무시되고 격하되었던 패자나 씨알의 수난에 대하여 그 정체성과 긍정적 역할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어둡다는 표현처럼, 한국역사에는 굴욕적인 면이 있음에도 그는 역설의 논리를 써서 한국사의 어두운 면을 통해 그 밝은 면을 더욱 부각시켰다. 이것은 곧 그가 일제하의 한국인들이 비참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세계사에 귀중하고 가치 있는 공헌을 해왔음을 깨닫기를 희망했다는 뜻이다. 이런 새로운 역사관을 통해, 그는 한국인들의 패배주의나 맹목적 숙명론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힘썼다. 식민지화된 민족이 가혹한 외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보존하는 일은, 민족의 사활 그리고 미래의 주체적 정신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결코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시기의 함석헌의 사관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자아의식이나 자아발견을 하지 못한다면 자아완성을 이루기가 막연하고 결국 인류를 위한 이타주의자가 되기 어렵듯이 한 민족도 한 민족으로서의 자의식, 즉 민족주의 없이는 세계주의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역사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 씨알이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적 민족사관에서 탈 기독교적 보편사관
함석헌은 사관은 1930년대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과 북한의 공산주의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변모한다. 그의 생애를 통해 함석헌은 억압받는 자, 약한 자의 편이었다. 기독교 정권인 이승만 정권 아래서 함석헌의 기독교중심주의적 혹은 성경중심주의적 사고는 좀더 보편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그리고 세계주의적인 경향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제 그에게 기독교 신앙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라 선포하고 성경만이 전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서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1961년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서문에서 변화된 사관을 살펴볼 수 있다.
“1961년에 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세째 판을 내려할 때에 나는 크게 수정을 하기로 하였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 가지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 짬 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 와 과학주의다……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버리고 책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 더구나 무교회 신자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7)
1930년대나 1950년대와 비교해, 1960년대 함석헌의 역사관,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특히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쓴 구절은 20대 초반 기독교 근본주의에 심취해 있던 나의 영혼을 송두리째 휘어잡았다. 70년대 유신독재하에서 종교인의 현실참여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청년인 나에게 기성교회가 준 답변은 고작,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하는 현실도피적인 냉랭한 설교뿐이었다. 그때 방황하던 20대 청년의 눈을 뜨게 한 인물이 바로 함석헌, 김동길, 안병무였다.
하여간 이러한 역사관 변화에 대해서 함석헌 스스로가 일찌감치 예측했듯이 함석헌은 보수적인 교회 그룹으로부터 이단자란 낙인이 찍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장사상은 중국에서, 그리고 퀘이커리즘는 영국에서 둘 다 역시 이단 취급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어서 그런지, 그에게는 자신이 이단자라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이제 그는 기독교는 위대하지만 진리는 더욱 위대하다고 선언했고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그가 깨달은 기독교의 진리를 망설임없이 표현했다. 기독교의 목적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그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게 하는 데 있다. 학문도 현실생활에 적용되어 인류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면 무익한 것처럼, 종교도 살아있는 역사의 짐, 인류의 짐을 지지 않는 한 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함석헌의 기독교관과 종교관은 대다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최소한 그후 10년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여 년이 흐른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서야 그의 사상은 민중신학의 등장으로 좀더 구체화되고, 대중으로부터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느님을 전체적 존재로 믿은 그는 전체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자신이 개인적으로 범한 죄를 용서받는 길이라고 믿었던 듯 하다.8) 함석헌은 말한다. “죄는 내 죄, 네 죄가 아니다. 우리 죄, 인간의 죄지. 전체의 죄다. 모든 죄가 나와 관련 아니 된 것이 없다. 내가 죄인의 대가리다. 역사상의 모든 죄악이 다 내가 참예한 죄악이다. 나도 공범이다. 내가 주범이다. 나야말로 상습범이다.”9) 이렇게 그가 보여준 사관은 남에게 빚을 진 채무자의 자세를 갖고 사는 것이었다.
내가 오늘 누리는 모든 여러 가지 이기(利器)나 혜택 중에는 나 자신이 피와 땀으로 이룬 것보다는 우리 조상의 희생이나 이웃이 이루어놓은 헌신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훨씬 많다. 그런 점을 생각할 때 빚진 자의 자세로 살아가야 할 역사적 당위성을 보여준 함석헌의 관점은 지극히 당연하다.
세계사의 맥락 안에서 민족사의 의미
함석헌은 모든 역사를 세계사로 인식한다. 모든 역사는 세계사이고 그래서 한국역사도 세계사의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계 역사 안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발견해서만 비로소 역사를 바로 알았다 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10) 그에게 개인사는 전체사의 한 부분에 불과했고 한국사는 세계사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이렇게 역사의 연계성을 중요시했고 그래서 살아있는 전체를 나타내야 역사라고 보았던 것이다.
함석헌이 역사를 부분이 아닌 전체로 본 배경에는 기독교정권이 자유당 정권의 공헌(?)이 역설적이게도 크다. 부분―기독교―만을 강조하고 편애하던 이승만 정권을 겪고 나서 그는 편식이 육체의 건강에 좋지 않듯이 사상이나 종교의 편식도 인간 정신의 건전하고 건강한 발달을 위해서 꼭 좋지는 않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 같다. 더구나 씨알 전체에 대한 책임의식은 저버린 채 한 종교집단이나 종파만 위하는 정권은 함석헌에게 분명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정권으로 비쳤다. 그는 인간의 삶은 만물을 대표하여 전체 우주 역사의 도덕적 책임자로 서게 되는데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11) 함석헌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악인들조차도 역사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했지만 전체 역사를 위해서 한 것은 없다고 판단한다. 오히려 그들의 행동이 전체 역사를 후퇴시켰다고 본다. 이렇게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서 전체를 보는 우주적인 안목과 인간미, 휴머니즘적인 시각이 역사가에겐 필요하다고 암시한다.
함석헌은 물론 탈기독교적 모습을 부각하고자 제목에 들어 있는 ‘성서’란 단어를 ‘뜻’이란 말로 바꾸지만, 그 책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기독교적 사관을 반영한다. 함석헌은 뜻이란 말을 하느님, 의지, 의미 등으로 해석하는데, 굳이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기독교 정권인 자유당 정권을 겪고 나서 기독교인만 생각하는 사상의 편파적 위치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과정을 거쳐 그의 사상은 기독교 중심주의에서 보편주의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한국민족의 세계사적 사명을 강조하지만 한국민족을 무조건 찬양하는 광신적 민족주의는 거부한다.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국익 추구보다는 도덕성과 이타주의를 강조한다. 그의 사관은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향해 독선․편견․배척보다는 관용성과 포용성이 왜 중요한지, 그 필요성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준다.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지나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그의 사관을 보완․수정해 가면서 민족주의를 넘어선 세계주의, 세계화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인류의 조상이 모두 하나이기에 인류는 모두 결국 한 형제자매라는 그의 사관은 인간의 정신과 몸의 관계를 동시적으로 넘나들어서 파악하는 독특함과 특이함을 보여준다.
그에게는 한국민족의 권익만큼 다른 민족의 권익도 동등하게 중요했다. 민족주의라는 미명하에 역사를 통해서 많은 범죄와 죄악이 저지러졌다. 그의 살아생전에 김일성은 북한에서 주체사상으로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민족주의를 주창했고, 남한에선 이승만과 박정희가 반공․부국강병이란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를 선언했을 적에, 함석헌은 흑백논리와 좌우 이념의 장벽을 넘어서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키 재기를 앞세운 민족주의․국가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인류는 이제 세계주의를 앞세운 사관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역사의 산물인 한 인간의 생애와 사상은 그가 처한 역사적 상황 또는 배경과 끊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이렇듯 함석헌의 역사관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고민과 문제를 철저히 반영한다. 그에게 일본 식민지 정권은 그가 항상 추구하던 평화주의에 반대되는 제국주의 폭력의 상징이었다. 해방 직후 소련 정권하에서 북한의 문교부장을 불가피하게 지내며 체험한 공산주의는 무신론적 물질주의였고, 이것은 그의 기본사관, 유신론적 기독교 사관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역사의 원천으로 보았던 것이다. 월남한 뒤 실향민으로서 남한에서 최초로 겪은 이승만 정권의 바탕은 그의 종교적 보편주의에 극명하게 대치되는 기독교 편애주의였다. 그후 1970년대에 들어서 유교사상의 가부장주의를 편의에 맞추어 재강조한 독재자 박정희의 충효이념 역시 그의 자유․탈도그마․초월사상과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역사를 통해 도가에서 유가의 규율이나 속된 태도를 엄중하게 비판한 것처럼12) 함석헌은 1970년대를 통해 박정희가 유교이념을 재강조하는 것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이미 있었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의 끊이지 않는 흐름 속에 숨어 있는 절대자의 명령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발견해서 그대로 실행하려고 애쓰는 그 행동이 곧 함석헌의 살아 생동하는 역사관이었다.
생각을 역전한 역사관, 현실관
함석헌이 20, 30대를 살아오면서 체험한 조국의 역사는 확실히 영광된 역사가 아니라 외부의 침략과 약탈로 점철된 치욕과 부끄러움의 역사, 그가 표현한대로 등뼈가 부러진 역사, 실패의 역사, 철저한 패자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수치와 모멸의 열등감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사고의 전이, 생각의 역전을 이룬다. 어느 시대든 희생자가 있어야 역사가 진전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육신이 죽게 된 조선왕조를 구하기 위하여 그 선지피를 역사의 제단 위에 붓지 않으면 안 됐던 희생의 장면도 그에게는 궁지에 몰린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영감(inspiration)의 원천이었다. 이런 거꾸로 하는 생각을 통해 그는 열등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지기 쉬운 일제 식민지하의 백성에게 한국인은 세계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선언함으로써 1930년대 한국인의 세계사적 위상을 역설적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희생자를 통해서 역사가 진전된다는 그의 사관을 참여정부가 들어선 2003년의 현실적 의미로는 재벌과 가진 자가 희생을 해야만 전체 씨알을 위한 역사가 진전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살던 아파트의 전세금은 1년에 30%씩, 2년에 60%가 올랐다. 올 대졸자의 3분의 2는 무조건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가히 살인적이다. 오늘 한국의 문제는 이렇듯 분배의 불균형이 가장 심각하다. 경제의 정당한 분배 없이는, 소외된 씨알의 고통에서 비롯한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사회적 병리현상을 다시 겪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인권변호사, 고졸 출신,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전의 한국사는 분명히 민중이나 씨알이 희생됨으로써 전진되어왔다. 그 희생이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이 희생되어서 구한 역사였고, 1970년대에는 전태일 같은 이의 희생으로 전진된 역사였다. 한국의 역사는 지도자나 엘리트층이 아닌 씨알이 역사의 짐을 지고 가는 역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기득권자의 희생이 필요한 시대다. 그것은 물질의 기득권은 물론 정신은 기득권을 포함한다. 그래야 함석헌이 주장한 씨알이 주인이 되는 시대가 더욱 빨리 올 것이다. 그래서 참여정부가 내세운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은 함석헌 역사관의 현대적 해석으로도 적절하다.
역사는 항상 변한다. 그리고 그 역사적 변이에 따라 함석헌의 사상도 변해왔다. 아니, 그의 역사를 보는 해석이 변해왔다고 해야 더 적절하리라. 성경도 역사책이다. 함석헌은 위대한 전도자로서 “역사에 무관심했던 사람은 없다. 그들은 다 시대의 부르짖음을 듣고 일어나는 산 혼들이다”라고 이야기한다.13) 그래서 함석헌도 그가 속한 시대의 부르짖음을 듣고 일어난 사람이었다. 예수의 주요 관심사는 ⌈구약⌋의 율법주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고,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이 제정한 종교 제도나 계율을 지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예수의 주요 관심사는 그가 속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 죽는 것이었다. 함석헌 역시 그가 속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 죽는 것이었지 이른바 성직자들이 제정한 종교 제도나 계율을 지키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장 17절) 함석헌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역사적으로는 지금 공간적으로는 여기서 일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14) 그에게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라기보다는 지금여기 즉 영원한 현재였다.15) 그러므로 그는 그가 속한 역사적 시대를 통해 끊임없이 세속적 불의와 독재정권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의 사회비평과 종교비평은 곧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그의 신앙선언이었고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진리추구의 길이었다. 그의 사회참여는 이런 맥락에서 씨알의 고난과 시련을 마치 자신의 고난과 시련으로 여기는 종교적 신앙고백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사를 통해 불의와 부조리에 대해 침묵과 복종으로만 일관하고 분노를 못 느끼는 씨알의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 그 영혼을 이렇게 자극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랴 만, 있고도 말을 안 하고 자라온 민중이다. 사람인 다음에야 속이 없으랴만 그 속을 나타내지 않아온 사람들이다. 할말이 없어서 일까?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민중보다 할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천 년 역사라면서 민중의 글자가 생긴 것은 겨우 오백 년 전이요, 순수한 민중문학이 없는 민족, 민권의 발달은 전혀 보지 못한 나라다.16)
이렇게 함석헌은 한국사를 맹목적인 복종과 무조건적인 침묵의 역사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역사의식을 갖고 각자가 지니고 있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양도(讓渡)할 수 없는 권리로서 누릴 것을 권장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잡지가 『말씀』 『씨의 소리』였고, 그가 쓴 글이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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