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민권운동가 함석헌(咸錫憲.1901.3.13∼1989.2.4)
종교인ㆍ문필가. 평북 용천(龍川) 생. 재야원로. 1928년 동경고등사범 문과 졸업. 1970년부터 월간 [씨알의 소리] 발행, 편집인 겸 주간을 맡아왔으며, 1987년에는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을 지내는 등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 왔다.
유족으로는 경기도 동두천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차남 우용(禹用) 등 1남 3녀.
장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간파리 가족묘지.
사상가ㆍ민권운동가ㆍ문필가. 평북 용천(龍川) 출생.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40년 평양 근교의 송산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계우회사건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8ㆍ15광복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광복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47년 단신으로 월남, 퀘이커교도로서 각 학교ㆍ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56년 [사상계(思想界)]를 통하여 주로 사회비평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한국기독교에 할 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효중(尹孝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 큰 화제를 일으켰다. 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60년 이후 퀘이커교 한국대표로서 종교활동도 하였다.
1961년 5ㆍ16군사정변 직후부터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62∼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ㆍ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ㆍ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76년의 명동사건, 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80년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등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ㆍ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인간 혁명>(1961.수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1964)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7) <통일의 길>(1984) <수평선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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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 대로 실천하는 양심> - 李兌榮(가정법률상담소장): (동아일보.1989. 2. 7)
1970년 [씨알의 소리]를 펴내실 때 선생님은 저를 편집위원으로 지명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 가까이 바짝 다가서서 선생님이 받는 온갖 탄압과 고생을 지켜보았지만, 행여 분노의 빛을 보일세라 ‘하는 날까지 해야지’ 그 한마디가 고작이었습니다.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선언문을 낭독하신 후 형사들에게 붙들렸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선생님은 원고는 누가 썼느냐는 물음에 ‘이태영이 써서 나더러 읽으라고 했지…’했습니다. 그때 저는 선생님이 조금도 노엽지 않고 오히려 어린이 같은 순진함과 솔직함, 정직성에 감탄했을 뿐이었습니다.
국민회의 마지막 모임을 하고 나오면서 성당 앞 큰길에서 수천의 경찰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선생님과 나를 당장 내리라고 호통을 쳤을 때도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내리시면 안 됩니다. 잡혀서도 안 됩니다”며 말리는 저의 손을 뿌리쳤고 스스로 차문을 열고 나가셨습니다. 잡혀가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반항하던 저와는 하늘과 땅처럼 대조적이었으며 그 순간의 부끄러움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그처럼 철저한 무저항 비폭력주의자셨습니다. 그러나 독재정권 아래서 그토록 수없이 몸은 이리저리 끌려다니셨지만, 불의에 항복하신 일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철저한 평화주의자이며 철저한 비폭력주의자이면서도 생각대로 똑바로 서서 몸소 실천하시는 ‘행동하는 양심’ 앞에 머리숙여집니다.(발췌)
<바보새 함석헌> - ‘횡설수설’(동아일보.1989. 2. 4)
‘알버트러스’라는 새는 날 때는 어느 새보다도 높이 날지만 물고기 한 마리도 잡을 줄 몰라 남이 먹고 남은 찌꺼기만 먹는 새이다. 땅 위에서는 바보처럼 잘 걷지 못하고 뒤뚱거리지만 날개는 길어서 날 때는 훨훨 하늘 높이 날아가는 새이다. 함석헌옹의 호는 이 새를 뜻하는 ‘바보새’였다. 그는 평화주의자였으며 철저한 비폭력주의자, 무저항주의자로서 그런 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함옹을 ‘팔레스타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인도에 와서 ‘간디’의 지팡이를 짚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서 살고 있는 분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던가 보다. 하얀 두루마기에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더욱 광채 있는 그 눈빛이야말로 백의민족의 모습으로서 강한 상징성을 엿보게 했다. 종교가이자 민권운동가였던 함옹은 민족의 독립과 민주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바른 소리를 광야에 외쳐온 의인이었다. 돈 욕심이 없을뿐더러 감투욕, 명예 욕심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무욕의 삶을 누렸다.
함옹이 <5천만 동포 앞에 눈물로 부르짖는 말>에서 절규한 어록은 아직도 가슴에 메아리친다.
“민족통일은 하나의 물리적 힘이 아닙니다. 정신운동이요, 생명운동입니다. 민족이 분열됐다는 것은 결코 밖에서 온 물리적 힘 때문만이 아닙니다. 안에서 이 전체가 깨지고 생명력이 쇠퇴했기 때문에 밖의 힘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분열된 민족을 다시 통일하려면 결코 물리적인 힘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1940년 일제 때는 독립운동을 하다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고 1958년에는「사상계」에 <아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구속되고, 1976년에는 3ㆍ1명동사건으로 불구속 입건되었으며, 1979년에는 YMCA 위장결혼사건으로 구속됐던 함옹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1980년 폐간 때까지 의로운 글을 내놓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다.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바보새’는 이제 영원한 하늘나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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